삭제/니므롯

●노아의 자손들

은바리라이프 2008. 4. 28. 11:39

노아의 자손들(1)(창세기 10:1-5)

모세는 야벳의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야벳이 장자이었든지 아니면 모세가 이것을 기록했을 당시에는 야벳의 가족의 이스라엘의 가장 먼 조상이어서 그들에 관한 관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세는 그 족속에 관해서는 지극히 간략하게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적이었던 함의 후예에 관한 기사는 대충만 언급하고 지나가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관심하고 있는 역사란 교회의 역사요, 이 세상 민족들의 역사는 그것이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의 관련 사건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한에서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홍수 이후에 노아의 아들들이 각기 아들들을 낳아서 홍수로 멸망함을 받은 인류 세계를 회복하고 재건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이전에 죽게 하신 이가 이제는 살게 하신다.

2. 야벳의 후예들이 여러 이방의 섬들을 할당받게 되었으니(5절), 답사한 후에 제비를 뽑아 그들이 나누어 가진 것이다. 아마도 영국의 섬들도 그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유대인들은 바다 저편의 모든 땅을 "섬" 이라고 부른다(렘 25:22).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 42:4)는 약속,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심으로 개심케 된다는 약속을 이해하게 해 준다.


노아의 자손들(2)(창세기 10:6-14)

이 구절은 가운데서 우리들이 관찰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사는 니므롯에 관한 것이라 하겠다(8-10절). 그는 여기에서 당대의 위대한 인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했으니, 이는 다시 말해서, 그보다 앞서 간 사람들은 그의 이웃들과 동일한 수준에서는 것을 족하게 여기고 각자 자신의 가정에서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더 이상 나아가고자 하지 않았던 반면에, 야심에 불타는 니므롯의 마음은 거기에서 정지하고 있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이웃들보다 훨씬 뛰어나고자 결심하여 그들 가운데서 뛰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었다. 홍수 이전의 장부들에게 적용했던 동일한 정신("그들은 용사라,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6:4) 이 이제 그에게 소생케 되었다. 일찍이 그같은 영걸들의 교만과 횡포로 세상에서 그 무서운 심판이 속히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지배에 대한 야심과 허식을 마음속에 천성으로 타고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가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하늘에서 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자들은 지금까지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자. 계명성과 같이(사 14:14, 15), 지옥과 같은 세상에는 그 같은 사람들의 교만한 마음을 꺾어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음 사실을 보자.

Ⅰ. 니므롯을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이것으로 시작했고, 이것으로 인하여 속담이 되다시피 유명해졌다. 모든 훌륭한 사냥꾼은 그를 기념하는 뜻에서 "니므롯" 이라 불리운다.

1. 혹자는 생각하기를, 그는 사냥을 잘하여 그 나라에 횡행하는 야수들을 제거함으로써 자기 나라에 봉사하고 또 그리하여 교묘하게 이웃들의 사랑을 사게 되어 그들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집권자들은 은인이며, 적어도 그렇게 불리운다(눅 22:25).

2. 또 혹자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맡아서 해내야 할 다른 계략을 추구하고자 사냥이라는 구실 하에 사람들을 자기 휘하에 모이게 하여, 스스로 그 나라의 주인이 되고 그네들을 자기의 예속하에 두게 되었다 한다. 그는 "특이한(힘센) 사냥꾼" 이라 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이웃의 권리와 재산을 약탈하는 횡포스러운 침략자요,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노략질하고 강압과 횡포로써 온갖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 버리는, 이른바 죄 없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자였다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 강대한 왕이라고 생각했으나, 여호와 앞에서는(즉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그는 "특이한 사냥꾼" 에 불과했다. 위대한 정복자가 훌륭한 사냥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알렉산더가 시이저 같은 인물도 성서 앞에서는 일반 역사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런 인물이 못된다. 알렉산더는 예언 속에 한 번 나타나기는 하나 게선 수염소와 같은 것에 불과했다(단 8:5). 니므롯은 여호와께 거슬리는 특이한 사냥꾼이었다. 70인역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그는 찬탈한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우상 숭배를 내세웠다. 그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새로운 신앙을 세우지만, 그 두 가지는 근원적으로 파멸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바벨은 매음부들의 모태이다.

(2)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부하 사냥꾼들이 전능자 하나님을 무시할 수 있기나 한 듯이 하늘에 도전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억압과 횡포를 계속하였다. 전능성은 만군의 주 여호와와 그의 군사들에게만 합당한 것이다. "마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작은 일인 양,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였다" (사 7:13).

Ⅱ. 그의 나라는 바벨에서 시작되었다(10절). 니므롯은 훌륭한 통치자였다. 술책으로든 무력으로든, 그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선택되어서이든지 강압으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이같이 해서 군주국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그 후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고, 전망도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통치자가 될 권리를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은 자로 나타나 있으나, 혹자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의 행정에 대한 적합성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뽑히게 되었든지 또는 전력으로나 술책으로 점차적으로 숙달하여져서 모르는 사이에 왕좌에 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 깊은(民政)형태, 특히 단 한 개인에게 통치권이 주어져 있는 정치 형태를 주목하라. 만일 니므롯과 그의 이웃들이 이것을 시작했다면, 다른 민족들도 그들의 공통된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 즉시 한 사람의 휘하에 합동할 줄 알았을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시작했든지 간에, 이것을 세상에 대한 지극히 큰 축복이라고 본다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 의 사태는 참으로 악화일로에 있었다고 간주되었을 것이다.

Ⅲ. 니므롯은 훌륭한 건축가였다. 아마 그는 바벨탑을 세운 건축가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곳에서 자기의 나라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노아의 아들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이 언어의 혼란으로 좌절되었을 때,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돌아가(우리말 성견 난외에 그같이 되어 있다) 니느웨 등을 세웠다" 했으니, 이 같은 도시들을 세움으로써 그들을 지휘하고 다스렸을 것이다. 니므롯을 통해서 야심의 본성을 살펴보자.

1. 그것은 끝이 없다. 많이 가질수록 더욱 가지고자 한다. 계속 "달라, 달라" 고 외친다.

2. 그것은 쉬임 없다. 4도성을 자기의 휘하에 두었던 니므롯은 4도성을 더 소유하기까지는 만족할 수 없었다.

3. 그것은 값비싼 것이다. 니므롯이 도성을 다스리는 영광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세우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우려는 정신은 교만한 마음의 공통된 결과이다.

4. 그것을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어떠한 일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니므롯의 이름은 반항을 뜻하는 것이니(그가 참으로 자기의 권력을 자기의 이웃을 압제하는 데에 악용하였다면), 폭군들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반항은 마법의 죄와도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노아의 자손들(3)(창세기 10:15-20)

여기서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가나안의 후예와 그의 후손들의 가족과 민족들, 그리고 그들이 소유했던 땅에 관한 기사가 본 장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앞에 굴복하는 민족이 되고, 그들의 땅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거룩한 땅 즉 임마누엘의 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러는 동안에 그의 백성을 선택했던 바로 그 곳에서 저주의 운명을 가나안 족속에서 내리실 때에 그 땅을 유의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세는 신명기 32장 8절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으니,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라고 했다.

2. 이 기사를 통해 볼 때, 가나안의 후예들은 그 수효가 많았었고 부유하여 지극히 즐거운 환경속에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저주를 받고 있었는데, 그 저주는 이유 없는 저주가 아니요 하나님의 저주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저주하에 놓여 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다분히 성공하고 번창하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사랑일는지 미움일는지, 축복을 받을는지 저주가 될 것인지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것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전 9:1  참조).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실제적으로, 그리고 항시 무섭게 역사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은밀한 저주, 즉 영혼에 대한 저주이어서 눈에 보이게 역사하지도 아니하며, 서서히 오는 저주이어서 즉각적으로 역사하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것으로써 진노의 날을 보류 받고는 있으나 결코 그 날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나안이 셈과 야벳보다는 훨씬 좋은 땅을 소유하고 있으나 셈과 야벳이 보다 좋은 운명을 지니고 있으니, 이는 그들이 축복을 상속받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자손들(4)(창세기 10:21-32)

셈의 후예에 관한 이 기사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겠다.

Ⅰ. 셈에 관한 기사(21절). 여기에는 한 인간의 생명을 뜻하는 "셈" 이란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두 가지의 칭호가 함께 나타나 있다.

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 이었다. 에벨은 셈의 증손자였다. 그러나 그가 어찌하여 아르박삿이나 셀라 등의 자손들이 조상이라기 보다는 "에벨" 의 온 조상이라고 불리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백성인 아브라함과 그 백성이 에벨로부터 계승해 내려 왔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Eber→Heber Hebrew)이란 말도 그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장 13절을 보면 "히브리 사람 아브람" 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 인 것이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빌 3:5). 우리들이 생각하기로는 에벨 자신도 모든 사람이 배신한 시대에 믿음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 가족에 대해서는 경건함의 모법이었으며, 따라서 그 경건한 칭호는 "히브리 사람" 에벨로 흔히 쓰여졌고, 아마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있어 바벨의 혼란 상태 속에서 그의 가정을 통하여 그 같은 칭호를 지녔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신앙 고백자들이 "에벨의 자손" 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감을 받은 저자가 셈에게 그같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부여할 때, 그를 "히브리 사람들의 조상"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록 모세가 이것을 기록할 때에는 그들이 비천하고 멸시를 당하고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으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고로 사람들이 그들과의 친척이 된다는 것은 영광이었다 하겠다. 함은 비록 아들이 많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후손들에게 저주가 뒤따르게 된(9:22) "가나안의 아비" 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셈은 자식이 많이 있어 그 후손들에게 축복이 따르게된 "에벨의 조상" 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성도의 가정이 귀족의 가정보다도 진정 더욱 영화로우며, 셈의 거룩한 씨가 함의 왕실의 씨보다는 더 나으며, 야곱의 열 두 지파가 이스라엘 열 두 방백들보다 더욱 영예스럽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17:20). 선하다 함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다.

2. 셈은 "야벳의 동생" (우리말 성경에는 "형")이라 했다. 이로서 셈이 흔히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가 노아의 장자가 아니라, 야벳이 그보다 연장자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사실상 흔히 앞에서도 그렇게 불리고 있듯이 왜 셈의 칭호와는 별도로 그는 "야벳의 형이었다" 라고 해야 했을까? 함의 형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아마 이것은, 이방인들이 교회를 통하여 유대인과 연합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서의 기록자가 셈은 히브리인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그의 영광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야벳의 씨가 영원히 교회와는 두절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서 출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축복에 있어서도 "야벳의 형" 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심할 것이 있다.

(1) 어떠한 형태로든지, 은혜로 말미암아서 또 하나님의 계약과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서로 만나게 되는 자는 그 모두가 형제라고 하는 사실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나누어주시는 데 있어서, 연령 순위를 따라 하시지 않으며, 때때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에 있어서도 연소자가 기선을 제압하기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는 것이다.

Ⅱ. 벨렉이라는 이름에 대한 이유가 있다(25절0. 즉 그 때에(즉 그가 나서 이름이 주어질 때에 그 곳에 거주해야 할 인간의 후손들이 "세상에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제비로 뽑아 분할하던 것같이, 노아가 그 땅을 질서정연하게 나누었든지 또는 그들이 그 같은 분할에 순종치 아니하여,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가운데서 언어의 혼돈으로써 그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이 같은 시기가 어떤 때였든지 간에 경건한 에벨은 그 아들의 이름으로 이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따라서 우리들의 아들들도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할지 모른다. 우리들의 시대에,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세상과 교회가 지극히 불행하게도 나뉘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