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구 계수
성경에 기제된 인구 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구약 시대에는 이 인구 조사가 정기적인 행사로서, 많은 사람들을 집합시키는 수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인구 조사의 목적은 숫자는 계수 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원 연습을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이방 민족의 침입에 신속히 대처하면서 그 밖의 재난에 대하여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하여 동원 연습을 했던 것이다. 그 밖에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의 인구 조사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윗의 자만심과 거만함의 현시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신약 시대에는 공화국의 후기부터 인구 조사가 비정규적으로 실시된 것으로 보이고, 그후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의하여 조직화되었으며, 지방의 호적 등록도 실시되었다. 특히 눅2:1에는 B. C.7년의 인구 조사에 대하여 나타나는데, 이는 헤롯에 대한 은밀한 저항'으로 인해 소란스러워진 유대 지방에 뒤늦게 실시되었던 인구 조사였으며, A.D.6년에 행해진 폭동을 야기시켰던 갈릴리에서의 사건이었다.
2. 성막
하나님의 처소를 상징하는 성막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것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이르는 것이 성전인 성막을 통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던 이동식 성소로 가나안 또는 광야에서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26장에는 성막에 관한 자세한 건축 묘사가 되어 있는데, 그 내부는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 있고,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으며, 각 끝 부분에는 그룹이 있는 순금으로 만든 평판에 화해를 위한 제사 피가 뿌려졌다. 또한 화해소 위에는 순금으로 입힌 향단이 있으며, 귀퉁이에는 돌출된 뿔들이 있고, 그 북쪽에는 진설병을 놓기 위한 상과 일곱 개의 가지가 붙은 등대가 있다. 이러한 성막에 관한 묘사는 여러 논쟁을 거쳐 또 이동 가능한 큰 천막이 발견되면서 수정되었다.
성경에는 이러한 성막에 관하여 세밀한 기록을 피하고 있는데, 이는 성막에 관한 기록의 목적이 상징적인 특징을 강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3. 레위지파
레위 지파에 관한 기록은 모세오경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성막을 건축하고 운반하고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는데, 제사장직은 아론 후손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레위 지파는 제사장의 보조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처음나는 것을 대표하는 일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25세부터 50세까지 성막에서 봉사했으며,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권리는 없었지만 십일조를 기업으로 받았다.
레8:11,12에는 레위 지파에 관해 제사장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선물로 표현되었다. 역대기에는 제사장과 긴밀하게 공조하여 성소의 기구를 관장하고 '진설하는 떡'을 맡아 준비하기도 했고, 포로기 이후에는 귀환한 레위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을 깨우치는 등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4. 시내산
1) 역사
E문서와 신명기 문학에서 '호렙산'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서명을 받은 곳도 시내산이며(출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고 언약 관계를 시작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출19:20). 후에 엘리야 시대에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현현이 있었으며(왕상19:8), 때문에 이스라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삿5:5; 느9:13; 시68:8,17).
2) 위치
일반적으로 시내산의 위치를 시내 반도의 남부, 아카바만 동쪽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기 힘들다.
구약에 등장하는 시내산 주변의 명칭들도 고대에는 잘 알려진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역시 그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기 힘들다(민33:14-17). 일부 어떤 학자들은 출19:16-19을 화산 폭발로 해석하여 시내산의 위치를 아라비아 북서쪽 내에서 발견된 화산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이것은 정확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의 묘사는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표현되는 자연적인 상과 종종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편 A. D. 4세기 이래 일어났던 전통에 따르면 시내산은 시내 반도 남부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에 많은 사원들이 건축되었고, 이곳에 있는 '예벨무사' (Jebel Musa, 모세의 산)가 시내산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A. D. 527년 '유스티니안' (Justinian)은 이곳에 성캐더린(St. Catherine) 수도원을 세웠으며, 엄청난 규모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