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설교] 물로 포도주를 만든 목적

은바리라이프 2008. 4. 23. 19:51
설교] 물로 포도주를 만든 목적
입력 : 2006년 01월 27일 (금) 23:51:08 / 최종편집 : 2006년 01월 28일 (토) 12:09:02 [조회수 : 1522] 이용대

▶ 성경 (요1:51~2:1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가던 중 루스(벧엘)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자다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 위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던 것과 일치합니다. (창28:10이하)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베푸신 많은 이적 중에서 일곱을 선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게 하려 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요20:31) 요한이 위의 말씀에 이어서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처음 표적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증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천사가 오르내리는 교통이 시작되었으며 예수께서 내려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땅과 하늘이 하나로 연락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하늘로부터 왔으며,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내가 베푸는 모든 이적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증거요, 나의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행한 그 일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이니 그 일은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주님께서 하시는 표적들이 하나님이 함께 계신 증거임을 알고 왔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3:2, 6:51, 10:38, 14:11)

어떤 학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행하신 표적은 믿지 않는데, 그의 표적을 믿지 않으면 그의 말씀도 믿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아이가 먹을 것을 내놓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어른들이 감췄던 음식을 내놓았기 때문에 모두 먹고 남았던 것이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표적을 부인하면 하나님(신)을 인정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주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요한복음을 아무리 읽어도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자여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라고 쓰면서도 예수께서 그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셨다고 기록합니다. 많은 분들이 ‘여자여’가 ‘어머니를 존경하여 부르는 호칭’이라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여’라고 부른 대상은 모친 마리아 외에도 여러 여인들이 있는데, 남편 다섯 있었던 수가 성 여인과 (요4:21)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여자여’라고 부르셨고, (요8:10) 부활하신 후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두 번이나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요20:13,15) 이 ‘귀네’라는 헬라어는 평범하게 여성 즉 부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님께서는 귀신 들렸던 여인도 ‘여자여’라고 부르셨고, (눅13:12)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에 자기를 알아본 여종을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눅22:57)

우리가 여러 성경구절을 찾아가며 ‘여자여’ 즉 ‘귀네’라는 말이 ‘어머니를 존경하여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단순히 모든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임을 확인한 이유는, 주님께서 그 모친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여자여’라고 부르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공동번역과 현대인의성경, 중국어성경 등이 ‘여자여’를 ‘어머니’로 의역해서 기록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여자여‘라고 부르신 사실조차 몰라서 처음부터 아무 고민 없이 어머니로 받아들이게 되어, 예수께서 ‘여자여’라고 부르신 의도를 전혀 짐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친을 ‘여자여’라고 부르신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온 ‘여자의 후손’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창3:15, 히2:14, 요일3:8).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세주로 ‘여자의 후손’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 즉 ‘남자의 후손’인 우리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를 구원할 죄가 없는 분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여자의 후손’이 되셨던 것이고,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던 것입니다. 또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피조물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의 어머니일 수는 없기 때문에 ‘여자여’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이든 ‘여자여’이든 하찮은 호칭을 갖고 뭘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이 단어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닌 여자로 부르시고, 요한이 그 의도를 알기에 여자라고 기록하였는데도 깊이 고민해보지도 않고 넘기는 것은 믿는 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의 언행(言行)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데, 주변 인물에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주님을 놓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기서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고 스쳐 지나갔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얼마나 난처한 일이며 낭패인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해왔습니다. 심지어 고소를 당하여 법정에 서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다며 여러 고증까지 갖다 대는 바람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주님의 말씀은 설 자리를 잃고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은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마리아의 걱정에 대한 대답이므로 ‘이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잔칫집의 포도주가 떨어져서 난처한 상황이 되고, 심지어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게 되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일이나 하러온 것이 아니라는 강경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셨고(요6:27,63), 아버지의 유업을 독차지한 형의 부당한 처사를 바로잡아달라는 동생의 요청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하시며 냉정하게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눅12:13-15)

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이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 때’에서 주님의 의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때’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셨는데, 대부분의 주님의 ‘때’는 십자가를 지시는 때를 가리키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고 사역하시는 공생애를 말하기도 합니다. (요5:25,9:4,11:9) 여기서는 십자가의 때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공생애와 연관된 어떤 말씀 즉 이적을 행하거나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직 안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또 주의해 보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일을 행하실 줄을 마리아가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부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천사가 잉태할 것을 전하면서 예언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알았을 것 같지만, 아직 아무 이적도 행하지 않은 예수께서 없는 포도주를 있게 할 줄 알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셔서 성막을 짓는 일을 하게 하셨고, (출35:34) 사울도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백성들을 독려하여 곤경에 처한 길르앗 사람들을 구해내고 왕위에 오르게 하셨으며, (삼상11:6) 바사 왕 고레스를 감동하사 성전을 재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스1:1) 여기서도 예수께서 첫 이적을 베푸시도록 성령께서 마리아를 감동시키지 않으셨다면 마리아가 이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훈을 얻기 위하여 자꾸만 사람을 주목하는데, 사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대상은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마리아의 믿음과 종들의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도 주님께서는 이 표적을 행하시고 당신의 일을 나타내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려고 마리아를 감동시키시고 하인들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참여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달리 구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주의해 보아야 하는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내고 계시는가?’여야 하는 것입니다.

채우라 갖다 주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거절하셨는데도 그 집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런 마리아의 태도는 그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상관없다던 분이 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을까요? 그것은 이 집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고, 채운 후에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시고,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좋은 포도주라고 칭찬을 합니다.

여기서도 하인들이 물을 붓고 떠다 준 행위에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닙니다. 하인들이 물을 채우라는 명을 거절할 이유가 없고, 떠서 갖다 주라고 했을 때도 그들의 어떤 행위 때문에 포도주가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 채웠을 때 포도주가 되었을 수도 있고 떠다 주었을 때 포도주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변화되는 과정이 이 하인의 행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꼭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를 고발하면서 그런 우리에게 믿음을 주려고 기록하였지 믿음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고 믿게 하려고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이 포도주로

예수께서 물을 채우라고 하신 돌 항아리 여섯 개는 유대인의 결례(潔禮)를 따라 거기 놓였다고 했는데 아마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잔칫집에 오신 손님들이 손과 발을 씻도록 물을 담아 두었던 항아리인데, 오신 손님들이 물을 다 퍼서 썼기 때문에 비어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어있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셨고,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을 때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적을 베푸셨을까요?

첫 째, 항아리의 변화입니다.

잔칫집의 돌 항아리는 발 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물을 채우시더니 포도주로 가득 찬 항아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처럼 담는 그릇입니다. 우리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을 때에 빈 집 상태로 있다가 일곱 귀신이 들어오는 바람에 형편이 더 심하게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릇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고, (요1:12)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였으며(빌2:5),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빈 마음으로 지내면 온갖 악한 것들이 그 마음을 잠식하게 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롬1:28). 세상 사람들도 자기 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그릇은 아무리 닦고 광을 내도 그 내용물이 바뀌지 않는 한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둘 째, 내용물의 변화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풍요와 만족 기쁨의 상징입니다. (창49:11~12, 시104:15)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은, 발을 씻고 버려지는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물을 풍요와 만족과 기쁨을 주는 값진 포도주로 바꾸듯,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우리를 존귀한 존재로 변화시키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셨던 것이지만, 주님께서 하신 일로 잔칫집의 문제도 해결된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영적 변화는 우리 육신의 삶에 녹아져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마6:33)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까? 건강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입니까?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원하던 것을 가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여러분 자신이 보석 같은 존귀한 존재로 변화될 것이고, 원하던 것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만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소유에 있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발 씻는 물같이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치이고 소외당하는 별 볼일 없는 우리를 포도주처럼 가치 있는 존재로 바꾸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풍요와 만족과 기쁨을 두시고 그래서 잔칫집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쁨을 더해주는 포도주처럼 유익한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여 어두움에서 나와 빛의 자녀가 되었고, 또 다른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으며, 부패한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을 감옥 안에서 만났습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은 ‘유익하다’는 뜻의 오네시모란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주인에게서 도망 친 종이, 게다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으니 그 주인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었겠습니까? 유익은커녕 백해무익한 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바울을 통하여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이름처럼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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