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세계선교 전략은 | ||||
| 하나님 말씀의 원리에 이끌려가는 선교사들의 현장 이야기를 기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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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선교의 사명(Mission) 은 구령(救靈)을 목표로 한다. 선교전략의 접근 방법론이 총체적인 시각으로 발전된 것이 사실이나 원리로부터인가, 또는 방법론부터인가, 현실 문제로부터인가 아니면 영적인 문제로부터인가, 성경(텍스트)으로부터인가, 상황(콘텍스트)으로부터인가? 하는 우선순위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처한 제3세계의 사회현상을 집약하자면, 대체로 빈곤, 질병, 무지 등인데, 많은 선교사들이 이 사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도록 도움을 줌으로 선교목표에 도달시킬 것인가 하는데 고민한다. 그렇지만 사회 병리적인 현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심리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관찰하는 것이 보다 더 본질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빈곤은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질병도 영적인 질병으로부터, 무지도 역시 영적인 무지로부터 비롯됨을 직시해야 한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사회 이슈 중의 하나가 AIDS 문제인데,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사회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 AIDS 문제로부터 진단을 해나가고 처방에 있어서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리를 따라 좀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속사의 한 페이지인 여호수아서의 서두에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선교 전략의 원리들을 관찰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1:1)이라는 말의 함축된 의미는 "내가 내 일꾼으로 고용했던 모세는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정년 퇴임하여 영구 안식년을 행정 조치하였으니"라고 현대적으로 의역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모세는 120세가 되도록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일을 더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신34:7) 하나님의 시간표(heavenly time table)는 한치의 오차 없이 지도자 모세를 역사의 무대로 퇴진시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약속 성취와 세대 교체를 통하여 새로운 가나안 시대의 주역이 될 여호수아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시려는 신적 의도였음이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여호수아의 소명은 하나님의 비상섭리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국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외교 흐름의 변화 등을 잘 관찰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계선교를 진행하고 계시는지, 현재 상황에서 선교적 틈바구니 또는 돌파구가 무엇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요즘 미국은 이라크와 테러 전쟁을 주도하면서 악의 축을 설정하고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 정세나 최근 동서양 종횡무진으로 발생하는 쓰나미나 카트리나 같은 해일, 파키스탄 인도지역의 지진, 21세기 인류의 최첨단 문명을 비웃는 에이즈나 조류독감 등의 자연재난이 어떤 선교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지 잘 관찰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간파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고 한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나 선교사의 질이 낮아도 된다는 이론이 아님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선교소명, 교회의 선교전략, 선교사역을 말할 때 과연 그런 것들이 성령의 조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유행처럼 지나가는 인위적인 바람인지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며 그냥 거저 주어지는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요단강 도하작전에 성공해야 하고, 철옹성같이 버티고 있는 여리고 성과 아이성등을 정복하여 쟁취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세가 죽은 후 오합지졸로 흐트러진 민심의 합의점을 도출해내야 하고, 여호와 신앙으로 일사 분란하게 전의를 가다듬고 가나안 정복의 비전을 갖도록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요즘 항간에 대권주자들처럼 "내가 해보겠다"고 날뛰지 아니하였다. 지도자의 길이 얼마나 눈물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인지 그는 여러 훈련을 통해 일찍이 경험하였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좋은 지도자가 만들어지기까지 부단히 훈련을 계속하신다. 수 년 전 일본에서 한 사람의 강한 세일즈맨을 만들기 위해 지옥훈련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남아공이라는 필드는 타선교 필드에 비하여 훨씬 양호한 편인데도 물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시골에 단기 선교사로 온 사람이 '세탁기 타령을 한다든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 잠자리가 불편하다, 흑인이 주 선교 대상임에도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위험해서 못 가겠다' 등등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약하여 그저 가족이나 잘 건사하며 안주하려는 일부 신임 선교사들을 볼 때마다 저들이 어떻게, 어떤 선교적 삶의 훈련을 통과해왔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여호와닛시의 체험, 기도를 통한 승리의 체험이 그의 생애를 압도하였다. 사실 영적 전쟁은 기도의 전투에서 이미 승패가 좌우된다. 모세의 중보기도 자세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매달릴 것인지 좋은 모본을 준다. 흔히 기도의 전투가 어느 사역보다도 선행되어야 함을 알고 있지만 가장 소홀히 여기는 사역이기도 하다. (출17:8-16). 어떤 분들은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탄을 결박하기 위해 땅 밟기 기도행진을 주창하고,또 어떤 분들은 조상의 죄를 단단히 결박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어도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중보기도가 하나의 미신(迷信)행위 내지는 비성경적 행태로 혼합 운용되는 것을 경고해야 한다. 이것은 영적 전투를 교란하여 무력화 시키려고 침투한 사탄의 장난임을 직시해야 한다.
전도자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전도의 담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전도의 담력을 잃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대인공포증(對人恐怖症)이다. 기도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날 전도를 나갈 때면 겁이 나서 괜히 핑계거리를 찾아 전도를 쉬게 되고 이런 것이 반복되면 결국 전도를 못하게 된다. 학교 순회하며 예수영화 상영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겉으로 보기에는 낭만적인 문화사역같지만, 우리는 영적인 전투임을 기억하여 늘 긴장하며 기도하게 되는데, 사역이 잘 진행된다고 하여 방심하거나 교만한 태도를 갖는 날이면 여지 없이 낭패를 당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하나님이 명하는 선교를 진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선교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실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물론 예외적인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일을 진행하지만 선교를 감당하고자 하는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에 대해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비상섭리는 물론, 물질적인 특혜조치도 함께하셨음이 교회사적인 상식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계선교를 열망하는 한국교회를 사용하시고 세계를 먹이는 요셉의 창고를 붙잡아주시리라 확실히 믿는다. 왜냐하면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선교사역을 하려고 해도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속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일반적인 역사를 수단으로 취한다. 선교사나 선교사를 지망하려는 분들의 소명이나 사명이 분명하다면 이런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의지를 먼저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북부 아프리카 한 모슬렘권 국가에 비전트립을 준비하며 여리고성이 아무리 견고해도 하나님의 숨겨진 백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강한 확신이 생겼다. 전도의 자유도 없고 개종의 자유가 법적으로 막힌 모슬렘 권에서 선교사가 과연 몇 명이나 전도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선교사는 모스크에서 모슬렘들과 똑같이 절을 하면서 전도를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은 여리고성 사람들 모두를 진멸하고 한 사람의 택자 라합을 통한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인본주의자들은 얼마나 까무러칠까. 라합과 같은 하나님이 예비한 선교의 동역자를 만나는 선교사는 얼마나 행복한 선교사일까. 여호수아의 승리는 말씀대로 순종한 믿음의 승리였다. 선교 전략이 있었다면 철저히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요즘 항간에 목회도, 선교도 성경대로 하면 잘 안 된다는 소리를 듣는다. 가급적 성경적인 것은 말하지 말고 적당히 성경 외적인 신비주의나 생활철학, 유모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심리학 등을 섞어서 써야 신령한 목사로 통한단다. 물론 양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지나치면 문제이다.사람 앞에서는 그럴듯한 평가를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말씀이 기적의 원동력이요, 하나님 말씀이 모든 것의 원천인 것을 제쳐두었다면 말씀지기로서 기본 자세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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