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대선지서

5. 용서받을 수 없는 유다 백성

은바리라이프 2008. 2. 20. 18:29

5. 용서받을 수 없는 유다 백성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렘 5:1∼14)

 

 [활천 2001년 5월]

 


1. 심판보다는 용서: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예레미야 5:1-6은 야웨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 내용이다. 1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하신다. 과연 “정의(미쉬파트)를 행하며 진리(애무나)를 구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물론 현재의 본문에서는 이에 대하여 더 이상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야웨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예레미야 22:3의 말씀에 근거할 때, 이방인, 고아, 과부와 가난한 자 등과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personae miserae)을 돌보며 그들과 연대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왕들에 대하여 선포한 다음의 말씀에서도 확인된다: “네 아버지[요시야]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야웨의 말씀이니라”(렘 22:15-16).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예루살렘을 용서하겠다고 하신다. 예레미야는 디오게네스(Diogenes)처럼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이 장면은 창세기 18:22-32의 사건과 유사하다. 그곳에 의하면 소돔 성이 멸망을 면하기 위해서는 10명의 의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 한 명만이 요구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진노가 아니고 사랑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의도가 처벌이 아니고 용서라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예루살렘 성읍 전체를 용서하시려고 하신다.

1절에서 명령형이 무려 4번이나 나온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말 개역성경보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 더 잘 반영되었다: “예루살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솨아트) 둘러보고(라아) 찾아보아라(야다)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보아라(바카쉬).” 이렇게 동사가 명령형으로 4번씩이나 언급된 것은 “사태의 긴박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명령에는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명이라도 빨리 찾아와서 제발 심판만은 면하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가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심판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용서와 구원의 의지가 더 강하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한 사람 때문에 그가 속한 공동체 전부가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2. 체벌을 통한 회개촉구: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렘 5:3)

예레미야는 유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개입을 회고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은 아픈 줄을 모른다. 즉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신 것인데도 그들은 그 멸망에서 교훈(하나님의 뜻) 받기를 거절한다. 오히려 그들은 얼굴을 바윗돌보다도 더 굳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한다. 하나님은 체벌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이 되돌아오기를 원하셨다. 선배 예언자 아모스도 하나님이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기를 촉구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 적이 있다: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야웨의 말씀이니라”(암 4:10). 물론 아모스의 청중들이 회개를 거절하였듯이 예레미야의 청중들도 양심이 바윗돌보다 더 굳어버려 돌아오기를 거절한다. 체벌을 통한 회개촉구는 무위로 끝나버렸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보란 듯이 거절당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마지막 손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래의 상태로 돌이키기 위한 교육적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하나님의 본심은 마치 사랑하는 자녀를 매로 쳐서라도 잘못된 행실을 바로 잡아주려고 애쓰는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것이다. 때때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하나님의 사랑의 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본래적인 정상 궤도에서 크게 빗겨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3. 고삐 풀린 황소 같은 지도자들(그돌림):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렘 5:5)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는 먼저 “비천한 자들”(달림)을 만난다. 이 비천한 자들이란 아마도 수공업자, 농부들 그리고 소매상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야웨의 길, 즉 하나님의 법에 관한 관심보다는 매일 매일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을 것이다. 이들이 야웨의 길 곧 하나님의 법(미쉬파트)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의 이해와 지식의 빈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계에 몰두해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무감각해 있었고 시대의 징조들을 읽을 수 없었거나 그렇게 할 의지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비천한 자들의 생활형편을 고려한다면 정의(미쉬파트)와 진리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지도자들” 혹은 “귀인들”(그돌림)을 만난다. 이들은 야웨의 길, 곧 하나님의 법을 마땅히 아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 부류에는 아마도 교육받은 계층들이 속하였을 것이다. 예들 들면 궁중의 관리들, 지도급 백성들, 제사장들, 지혜자들 그리고 예언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비천한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내가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미쉬파트)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미 3:1).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어버렸다. 그들은 고삐가 풀린 황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소는 일상적으로 멍에를 메고 결박(쟁기 자국) 지어서 쟁기를 끈다. 이 장면은 멍에를 부수고 가죽끈을 끊으면서 반발하는 행동을 묘사한다. 지도자들의 이러한 삶은 비천한 자들과 같은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의식적인 반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한 사람 찾기는 실패한다. 결국 유다 백성들에게는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된다: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본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렘 5:6).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초한 일은 비천한 자들보다도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도자란 그 사회에서 비교적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특권에는 그에 준하는 의무가 수반된다. 따라서 특별한 권리는 군림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들이 특별한 권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불행해진다. 하나님은 많이 맡긴 자에게는 그만큼 많은 것들을 찾으신다.

 

4. 용서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백성: “내가 너를 어찌 사하겠느냐”(렘 5:7)

예레미야 5:7-11은 다시 한 번 유다 백성의 배신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들(바알)을 숭배한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만족시켜 주셨고,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모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창기의 집에서 행음한다. 여기서의 행음이란 바알 제의에서 향해지는 행음의식(Hurendienst)을 말한다(렘 2:20-25). 이 행음은 종교적인 배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부도덕한 육체적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인 매춘 행위는 페니키아와 시리아 지역의 다산(多産) 여신 제사에서도 언제나 수반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욕정이 가득한 호색가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렘 5:7). 이 지경에 이른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찌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렘 5:9).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때로 당신의 백성들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서 벌하심으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기도 한다. 지혜자의 권고는 늘 귀담아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잠 3:11-12).


5. 맹목적인 자기 도취: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렘 5:13)

예레미야 5:12은 백성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심판 예언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듣지 않는다. 그들은 야웨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야웨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야웨를 아무 것도 아닌 분으로 간주한다. 즉 야웨는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한 심판을 현실화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야웨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습 1:12). “야웨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표현은 무신론적인 선언이라고는 볼 수 없고 야웨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렘 14:13)는 구원 예언자들의 말씀에 의존해 있는 것 같다(참조. 렘 14:13-16). 예레미야는 이러한 예언자들을 바람으로 간주하고 말씀이 그들 속에 있지 않다고 단정짓는다. 여기서 바람이란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보통 “바람”, “호흡”(숨), “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바람과 영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언어 유희적으로 쓰이고 있다. 즉 거짓 구원 예언자들이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함 받아야 마땅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언자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야웨]가 네[예레미야]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렘 5:14).


유다 백성들은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던 거짓 구원 예언자들의 예언에 현혹되어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백성들도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은 피해자가 아닌가?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 예레미야는 이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답한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백성들은 거짓 구원 예언을 즐겼던 것이다. 거짓 예언에 미혹된 자들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 스스로도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참 목자와 삯군 목자를 구별할 수 있는 통찰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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