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렘 8:1-9:1)
[활천 2001년 7월]
1. 죽음보다 더 비참한 생존자의 운명: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렘 8:3)
예레미야 8:1-3은 유다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다. 이 심판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죽어서 매장된 자들에게도 임한다. 살육으로도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약탈 욕에 사로잡힌 적들에 의해서 매장된 지 오래 지나 뼈만 남은 사체들이 그 묘실에서 마구 파헤쳐진다. 죽은 자들은 그 뼈가 흩뿌려지는 능욕을 당할 것이다. 이들의 뼈는 이들이 살아 있을 때 신들로 섬겼던 해와 달 그리고 하늘의 많은 별들 아래 흩어진다. 천체 신들에 대한 제사 관행은 특히 므낫세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었다(왕하 21:3, 5; 23:4-5). 그러나 이러한 우상들은 그들의 신봉자들이 멸시받는 상태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흩어진 뼈들은 거두어지거나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서 거름이 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시체가 농토의 거름으로 쓰이는 것은 극도의 멸시로 간주되었다(참조. 렘 9:22; 16:4 왕하 9:37; 시 83:10). 오늘날의 중동 전쟁에서도 그러한 멸시와 모독이 행하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심판의 태풍을 빗겨나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들의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존자들은 죽음 이후 시체마저도 능욕을 당하는 상태를 오히려 더 부러워한다. 이러한 기현상은 그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의 크기를 드러낸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토록 가혹했다. 요한계시록 9:6도 이러한 상태를 마지막 때의 고난에 견준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2. 짐승만도 못한 유다 백성: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렘 8:7)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고집스러운 행실을 도저히 이해하실 수 없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반문한다: “누구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누구나 떠나가면(슈브), 다시 돌아오지(슈브) 않겠느냐? 그런데도 어찌하여 예루살렘의 이 백성은, 떠나면(슈브) 늘 떠나 있음(메슈바)을 고집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슈브)를 거절하느냐?”(4-5절, 사역). 여기서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돌이키다/회개하다)가 4번 그리고 슈브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메슈바)가 1번 사용된다. 여기에서 “돌이키다”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이는 현재 하나님을 떠나 있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다시 되돌아올 것을 강하게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한 번 정도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늘 떠나 있음”과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유다 백성은 넘어져도 일어나지 않는다. 길을 떠나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한번 빗나가면 배반을 고집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판단을 의도적으로 의심이라도 하시듯 다시 한 번 그들의 현주소를 살피신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셨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바른 말을 하지 않고 그 누구도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하며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지 않는다. 예외 없이 모두가 제 길로 돌아갔다. 마치 싸움터를 향하여 달리는 말과도 같이. 하나님의 총체적인 재검토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결과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완고함은 그 어느 것과도 비길 데 없이 상식을 뛰어넘는다. 예레미야는 자연계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탄식한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야웨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7절). 날짐승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세운 자연의 이치를 오차 없이 따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규례)를 알지 못한다. 유다 백성들은 짐승들만도 못하다. 이러한 탄식은 선배 예언자인 이사야의 선포를 생각나게 한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하나님이 동물에게 본능을 주셨다면, 인간에게는 양심을 주셨다. 동물은 그 본능의 코드에 맞추어 자신들의 삶의 궤도를 좀처럼 일탈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들이 훼방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자처하는, 자칭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자신의 양심 코드와 어긋나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한번쯤은 몰라도 두 번 다시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하자. 양심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닌가!
3. 율법 소유보다 율법 청종: “야웨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예레미야 8:8-9은 내용상 상당히 모호하다. 초기의 학자들은 8절에 나오는 “야웨의 율법”을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 발견된 “신명기”로 간주하고(왕하 22:8), 이 본문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신명기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야웨의 율법이 신명기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야웨의 율법이 무엇인지 현재의 본문 상황에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문서로 된 율법(토라)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7절에서 유다 백성이 야웨의 규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다. 아마도 이에 대하여 그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대꾸하였을 것이다: “무슨 소리냐! 우리는 야웨의 규례를 알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야웨의 율법 속에 기록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지금 보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그들이 소유한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야웨의 율법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서기관들이나 현자들이 의도적으로 백성들에게 불어넣었을 허황된 자만심, 곧 율법을 소유함으로써 지혜를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이 자신에게 부여되었다는 자만심을 공격한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야웨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8절).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야웨의 율법”의 내용인 “야웨의 말씀”을 부각시킨다. 즉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9절).
야웨의 율법은 야웨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빈 그릇에 불과하다. 율법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율법은 연구와 청종의 대상이다. 또 성서의 내용을 피상적으로 많이 아는 것보다 한 가지라도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참 뜻을 제대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던 베뢰아 성도들이 그립다(행 17:11).
4. 치명적인 독: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보내리니”(렘 8:17)
예레미야 8:14-17은 공포에 빠진 유다 백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닥칠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이들 스스로 탄식하는 형식을 빌어 그들의 절박한 상태를 표현한다. 그들은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있느냐?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며 절규하고 있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이라도 심판이 잠시 동안만 지체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곳은 영원한 피난처가 아니라 잠시의 도피처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이 재앙은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다(14-15절).
예레미야는 단에서 들려오는 적군이 타고 오는 말들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단 지역은 이전의 북왕국의 북쪽 경계에 위치한 도시이다. 따라서 단 지역이 적군의 도착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도시일 것이다. 그 말들의 울음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적들의 숫자가 실로 엄청나게 많았음을 느낄 수 있다. 적들은 쳐들어와 이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을, 성읍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이러한 불길한 예상이 1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된다: “야웨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사람을 물어서 죽게 하는 불뱀 이야기는 민수기 21:6-9에 언급되어 있다. 거기서도 야웨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불뱀을 보내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모세 당시에는 구리뱀을 만들어 불뱀에게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그런 구원은 없다. 그 어떤 주술적 주문(呪文, 전 10:11; 참조. 사 3:3)도 그리고 그 어떤 부적(符籍, 사 3:20; 참조. 민 21:4-9)도 독을 중화할 수 없다. 마술로도 제거할 수 없는 독사로 상징되는 다가오는 심판은 불가피한 것이다.
5. 하나님의 탄식과 백성의 탄식 모두를 느끼는 예언자의 탄식: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렘 8:21)
예레미야 8:18-9:1은 예레미야서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예레미야 자신이 겪는 내적 번민(Patos)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단락의 분위기는 바로 앞 8:4-17과는 대조적이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심판과 공포가 아니라 동족 유다를 위한 염려와 비애이다. 이 백성은 “죽음에 이르는 병”(sick to death)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8:22).
이 단락은 예언자의 탄식(8:18-19a상반절), 백성의 탄식(19a하반절), 야웨의 탄식(19b절), 백성의 탄식(8:20) 그리고 예언자의 탄식(8:21-9:1)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짜임새가 보여주듯이 예레미야는 결코 자기 민족의 고난을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레미야도 자기 백성의 고통과 탄식에 함께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통증을 느낀다: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18절),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잠겼도다”(21절), “어찌하여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9:1). 예레미야는 불치병에 걸려 삶의 희망이 끊어진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눈에는 유다 백성들이 사로잡혀 가는 모습이 벌써 보인다. 그리고 사로잡혀간 먼 땅으로부터 들려오는 동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다: “야웨께서 시온에 계시지 않는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않는가?”(19절). 특히 남 왕국에서는 시온신앙과 다윗왕조신앙이 유다 백성의 신앙의 양대 기둥이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주하시는 예루살렘(시온) 성전과 영원히 왕위가 계속된다는 다윗왕조는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질문에는 시온과 유다 왕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마땅히 도와주셔야 할 야웨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시지 않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해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는 도움을 구하는 외침이 아니라, 백성들의 절망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절망감은 그들이 사용한 다음의 속담에서도 드러난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 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21절).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였던 도움이 없었다는 뜻의 이 속담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한다. 예레미야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동포가 겪는 외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이 절망적인 백성의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야웨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절망적으로 부르짖는다. 하지만 야웨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버리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면서 괴로워하신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19b절).
따라서 예레미야는 한편으로는 야웨의 떠나심을 탄식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자신을 떠남에 대해 섭섭해하시는 야웨의 울부짖음도 듣는다. 예언자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백성의 말도 들어야 한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탄식은 자업자득으로 겪는 괴로움 앞에서 낙심하는 백성의 탄식과 그 백성에게 분노하시는 야웨의 탄식을 함께 느끼는 탄식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양쪽의 괴로움을 한몸에 지니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픔과 백성의 아픔에 민감한 것이 예레미야만이 가지는 독특한 영성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고통과 백성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는 예레미야의 영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공감의 영성은 특히 하나님을 먼저 만난 자들에게 요구된다. 성결가족들이 이러한 영성으로 무장만 된다면 땅에 떨어진 한국 교회의 도덕성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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