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창조사학 특강] (11·끝)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

은바리라이프 2008. 2. 11. 18:03
[창조사학 특강] (11·끝) 우리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

[2001.02.03 10:45]   모바일로 기사 보내기


하나님이 역사를 방관하지 않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면 고려와 이조의 지배층이 그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혹은 불교를 도입하고 또는 유학을 채택했다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동안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왔던가.우리 조상들이 아이들을 기르며 들려주었던 민담과 설화를 살펴보면 지배자들의 역사에 담겨져 있지 않은 삶의 실체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 어느 지역이든 전해 내려오는 ‘햇님 달님’의 설화를 보자.

오누이를 남겨 놓고 떡장사를 나간 할머니의 떡을 호랑이가 다 빼앗아 먹고 결국 할머니의 몸까지 잡아먹었다.호랑이가 할머니로 변장하고 오누이를 찾아오자 그들은 나무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우리를 살리시려면 새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죽이시려면 헌 동아줄을 내려주시라고 기도하자 하늘에서 새 동아줄이 내려와 오누이는 그것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다.성경은 그리스도가 떡으로 오셨으며(요 6:33) 그 몸을 대속물로 주기위해 오셨다고 말한다.(마 20:28) 또 마지막에는 짐승이 그리스도로 변장하고 올 것이며(계 13:4) 성도는 들림받는다고 한다.(살전 4:17)

유명한 ‘춘향전’의 이야기를 보면 춘향을 데리러 온다고 약속한 이도령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는 동안에 변학도가 수청을 요구하며 박해한다.어사가 돼 돌아와 변학도를 다스리는 이도령은 사단을 심판하기위해 재림하는 메시아의 모습이다.이도령이 잠시 변장하고 왔다가 다시 어사로 나타나는 것은 재림론의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생각나게 한다.민담 ‘섬동지전’의 두꺼비는 지네 사당에 바쳐진 처녀를 위해 지네와 싸우다가 지네와 함께 죽는다.그러나 두꺼비는 다시 살아나 준수한 신랑으로 변하여 처녀와 결혼식을 올린다.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가 신랑이 돼 그 신부인 교회와 혼인잔치를 하는 성경의 종말론 그대로다.(계 19:7)

심청전에서 심청은 아버지가 절에 드리고 싶어하는 공양미 삼백석때문에 팔려가서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그러나 심봉사는 공양미를 절에 바치고도 눈을 뜨지 못했고 나중에 살아서 돌아온 딸을 만나 눈을 뜨게 된다.이 설화의 심청도 역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놀부와 흥부의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우리 조상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이런 것들이 수없이 많다.이 모든 설화들 가운데는 고대로부터 구원자를 기다려왔던 우리 민족의 메시아 사상이 들어 있고 성경적 교훈이 담겨져 있다.

우리 민족의 조상이 고아시아족이든 알타이계의 숙신족이든 우리는 이 땅에서 함께 섞여서 살아왔고 전래된 설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왔든 또는 하나님의 딸이 내려왔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긍지로 여기며 살아온 천손민족(天孫民族)이다.교만과 환락의 문화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긍지와 품위를 회복하는 것이다.동물적 본능이 사람을 희롱하고 화폐의 가치가 인간을 지배하는 이 야만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보화를 찾아내고(마 13:44) 뱀에게 빼앗겼던 영안(靈眼)을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 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민족은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이다(사 64:8).그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서 무엇을 바라시길래 3600명의 신들이 우굴거리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우리 조상들을 꺼내어 이 동방으로 이끌어 오셨을까.1960년대부터 우리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결의로 목숨을 걸고 경제개발을 시작했다.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무리가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우리는 길고 긴 가난의 세월을 벗고 한강의 기적을 연출해 내었다.1997년 12월 외환위기로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까지 무역거래 규모는 197개 국가 중에서 제11위였다.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 요셉을 생각한다.

야곱이 늦게 얻은 아들 요셉을 너무 편애하여 그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다.형들은 그 요셉을 잡아 장사꾼들에게 팔았고 장사꾼들은 그를 애굽왕의 시위대장에게 팔았다.그러나 요셉은 낙심하지 않았다.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디를 가든지 최선을 다했고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감옥 총무를 했다.그는 결국 왕을 만날 기회를 잡아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풍년기에 양곡을 저축하여 전 세계에 기근이 왔을 때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다.혹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이 시대의 요셉으로 지명한 것은 아닐까.비록 IMF 사태로 발목을 잡혔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하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인류를 구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멀고 먼 시베리아를 지나 바이칼 호를 건너 아사달까지 오게 하였으며 또 무엇이 중앙 아시아와 알타이 산맥을 넘어서 송화강까지 오게했던 것일까.우리 조상들의 정신속에는 ‘천손사상’ 외에 또 어떤 것이 있었을까.그들이 동방으로 오기까지에는 아리랑 가사처럼 수많은 ‘떠남’의 동기들이 있었을 것이다.아마 아우들과의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땅을 양보하고 떠나온 ‘장자의 정신’(창 13:9)과 형제간의 싸움을 피하려는 ‘평화정신’(마 5:9) 때문에 땅의 끝까지 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또 우리의 본향은 저 천국에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자리잡을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 ‘나그네 정신’(히 11:13)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이 그 자손에게 단단히 부탁했던 것은 나의 유익보다 여러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필자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으로 졸고를 끝맺는다.논란도 있고 이의도 있을 것이나 2001년 벽두에 드린 이 화두를 시작으로 하여 많은 분들이 이 방면의 연구에 나서 주셨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김 성 일<작가·한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