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사학 특강] (10) 우리에게 그분은 말씀하신다 |
[2001.02.02 10:22] | ||
어떤 사람은 역사가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 놓고 방관하시는 무책임한 분으로 모함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책에 기록된 역사는 진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사람이 왜곡하고 날조하여 거짓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문자는 말보다 진실하지 못하다.사람의 두뇌는 본래 진실한 것만을 기억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을 다 기억하지 못하여 꼬리를 잡히는 것이다.반면에 문자라는 것은 예사로 진실을 날조하고 그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인 것처럼 기세를 올린다.중국의 사서 ‘회남자’(淮南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처음에 창힐이 까마귀 발자욱을 보고 문자를 만들어 약속의 표적으로 하니 이로 인하여 장차 사(詐)와 위(僞)가 생겨날 것이요 그리 되면 사람이 그 근본을 버리고 지(枝)와 말(末)에 힘쓰게 될 것이며 경작의 업을 버리고 이득을 추구하는데만 힘쓰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이 이를 근심하여 비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자보다 말씀이 중요하다고 선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역사를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다.그러므로 한 때 동방의 모든 나라들이 불교의 나라가 되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김유신이 이세민과 손을 잡고 그 동방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려 했으나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은 것도 역시 그분의 섭리였다.하나님은 왜 유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일까? 교회의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권력이나 무력의 도움으로 교회가 발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로마 황제가 교회의 후원자로 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종교 개혁을 주도한 나라들이 산업혁명으로 강력해지면서 기독교는 후진국을 수탈하는 강대국들의 앞잡이로 전락했다.교회는 가난과 핍박 속에서 성장했지 권력의 비호를 받아 잘된 적은 없었다. 칼과 창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려 했던 김유신의 열정은 가상했으나 하나님은 그 방법에 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령 가야를 중심으로 재기를 시도하다가 이사부의 공격으로 실패한 가야의 유민들은 김유신에게 일말의 소망을 걸었다.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모두 민족의 시발점이었던 갑곶섬(江華)으로 옮겨가 그곳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에 전념한 것 같다.개성, 김포, 강화 지역에 살고 있는 김해 김씨와 허씨 그리고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가야의 후손들이다.후에 신라 조정은 유신의 세째 아들 원정(元貞)에게 당시의 정부 조직에도 없던 해간(海干)이라는 새로운 벼슬을 내렸는데 이는 당시 대외무역에 힘쓴 공로와 영향력 때문에 그에게 수여한 명예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신의 시도가 실패한 후 신라는 본격적인 불교의 나라가 되었다.교회 또는 경사(景寺)가 있던 곳에는 사찰이 들어섰을 것이다.그러면서도 민간 신앙을 아주 무시하지는 못하여 재래신앙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지금도 사찰에 남아 있는 삼성(三聖)의 개념은 본래 불교에 없던 것으로 경교의 삼묘(三妙) 즉 삼위일체를 본딴 것이며 칠성(七星)도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과 같은 것이다.사찰의 이름들 가운데는 성경적 의미를 가진 것들도 많이 있어서 그것이 경사였을 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통일 신라에서 고려로 불교 시대가 이어지면서 지나치게 가부장적이었던 우리 민족은 자유분방한 개방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유럽의 르네상스처럼 민족의 재능과 문화가 꽃피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삼국시대의 유물과 학문 그리고 고려 시대의 노래와 자기들을 보면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그러나 환락이 길어지면 국력의 쇠퇴를 가져오게 마련이다.고려에서는 승려가 너무 많아서 아들이 셋 있으면 하나는 승려가 되어도 좋다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다.그러다가 결국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오랫동안 지배를 당한다. 몽골은 대륙을 다 휩쓸고 중앙 아시아를 건너 유럽까지 쳐들어가면서도 고려를 그냥 놔두고 있었다.몽골은 부계보다 모계의 족보가 중요한데 칭기즈칸의 12대조 할머니 ‘알란고아’는 고구려인의 후예였다고 하니 조상의 나라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고려를 존중해서였을 수도 있다.칭기즈칸의 아내 케라르트는 경교 신자로 영내에 교회를 설립했고 대륙 전역에도 십자사(十字寺)를 세웠다.칭기즈칸의 부친 이름은 ‘예수카이’인데 그 이름도 기독교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그 칭기즈칸이 죽고나서 부녀들이 대세를 주도했던 몽골은 갑자기 불교 국가인 고려를 공격한 것이다.강화섬에 천도한 고려는 대장경판을 완성하는 등 호국 불교로 나라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137년이나 지배하던 몽골이 물러갔을 때 고려의 국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쿠데타로 고려를 전복하고 새 나라를 세운 이성계의 세력은 구정권의 종교이며 국력 약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 불교를 탄압하기 위해 억불숭유 정책을 썼다.그들이 채택한 유학은 지난날 한나라가 만들어낸 제국의 통치 이념이었다.그러나 제국의 통치 이념과 가부장적 권위를 결합시킨 유학의 도입은 자유분방으로 치닫던 우리 사회에서 다시 흐트러졌던 백성을 단속하고 셈족의 자손들에게 장자로서의 책임감을 요구하기 시작했다.지난날 풍성했던 우리를 임진과 병자의 난으로 다시 가난하게 하시고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게 하신 까닭을 그분은 밝혀 주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김 성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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