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위에 복고바람이 분다
편안한 정체성을 대중 상품 구조에서 찾고자 하는
이중적인 집단 무의식
2005 문화코드는 복고풍
방송가 7080열풍 어디까지 가나?
쟤 누구야? 사람들의 시선이 TV화면에 쏠린다.
“내 밑으로 모두 조용히 해!”
KBS의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의 복학생은 촌티패션에 에어운동화와 지퍼 달린 디스코 청바지를 입고, 핀컬 파마를 한 채 등장해 7,80년대 추억을 소재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한동안 시들했던 개그콘서트의 인기가 복학생 덕분에 살아난다고 한다.
지난 설날 특집으로 방송된 <코미디쇼7080>은 ‘회장님 회장님’, ‘쓰리랑 부부’, ‘동작 그만’, ‘도시의 천사들’, ‘영구야 영구야’, ‘부채도사’, ‘변방의 북소리’ 등 7,80년대 큰 인기를 모았던 코너를 21세기 버전으로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출연자들 역시 김형곤, 심형래, 최양락, 김한, 장두석, 이봉원, 김학래 등 추억의 스타 코미디언들. 안상태, 심현섭, 박성호 등 스타급 후배 개그맨들은 조역을 맡았다. 기획자 역시 우리나라 코미디연출의 대부인 김웅래 전 KBS 제작위원.
더욱 고무적인 것은 시청률이었다. <코미디쇼7080>은 11.7%로 SBS의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10.1%), MBC의 <왕꽃선녀님>(12.4%)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정규편성을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런 전례가 있기도 했다. 현재 KBS 1TV에서 토요일밤에 방송되는 <콘서트7080> 역시, 2004년 설날특집 <열린음악회>, <7080추억의 그룹사운드>와 추석 특집 <7080추억의 빅콘서트>가 인기를 끈 뒤 정규방송으로 편성된 것이다. 시나위, 옥슨80, 구창모, 김정수, 건아들, 블랙테트라, 이치현과 벗님들 등 왕년의 스타들이 돌아가며 출연해 브라운관에 추억의 7,80년을 재현하고 있다.
KBS 뿐만이 아니다. EBS역시 7080세대를 겨냥한 공연무대인 <스페이스 공감>, 다큐 멘터리기법을 취한 성인드라마 <EBS 현대사시리즈-명동백작>등 복고풍 프로그램으로 짭짤한 성공을 거뒀다.
복고는 우리 시대의 문화코드?
386과 7080
복고열풍이 부는 곳은 비단 방송뿐만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복고의 진원지는 음반시장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유행처럼 시작됐던 리메이크 음반 붐은 불황기 음반시장 속에서도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모 가수는 대표곡이 리메이크 곡이라고도 하고, 그 복고열풍에 편승한 것인지, 최근엔 <가요톱10>이라는 이름의 콘서트가 또 성황리에 열린다.
1980년에 시작돼 1998년에 막을 내린 KBS의 대표적인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제목을 가져와 전영록, 김범룡, 최성수 등 7080스타들이 콘서트를 연다.
영화 <썬데이 서울>에서는 왕년의 배우 정소녀와 김추련이 출연해 스크린에서 올드보이의 부활을 알렸고, 심지어 배구경기장에도 강만수, 마낙길, 최천식, 김호철 등 왕년의 스타들을 코트로 불러내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방송가의 성공적인 몇몇 프로그램들은 우리사회의 복고코드를 발 빠르게 읽고 적용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곳곳에 부는 복고바람에 7080이란 숫자는 마치 386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고유명사가 돼 버렸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복고가 뜨는 것일까?되짚어 생각해보면 386과 7080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한 시대의 상징이다. 7080이 지칭하는 7,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오늘날의 중장년층 중 상당수는 현재 우리사회의 중심에 서있는 386과 겹친다.
그들의 세력적 부상이 그들의 젊은 시절을 채워주었던 7080의 음악과 개그, 스타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왕년의 중장년층에 비해, 오늘날의 중장년층인 386은 문화적으로도 많은 것을 누리며 자랐고, 그만큼 영향력도 크다.
한 문화평론가는 “7080문화의 유행은 촌스러움을 멀리하려는 경향에서 편안한 정체성을 대중 상품 구조에서 찾고자 하는 ‘이중적인 집단 무의식에서 비롯한다.”고 분석한다. 그렇다. 추억은 언제나 편안하다. IMF 이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 요즘 같은 신용불량, 불황의 시대에 복고의 편안함은 매우 유혹적이다. 하지만 복고의 성공요인은 그것만이 아니다.
복고의 긍정
방송프로그램, 세대의 균형을 찾다
복고가 성공하는 데엔 필연적 이유가 있다. 지금 유행하는 7080문화들은 이미 그 시대 베이비붐 세대에 의해 철저히 검증돼서 안전한 작품들이다.
수세기 전의 예술작품도 명작이라면 지금도 그 생명력이 여전하듯이 대중문화 7080 역시 분명 한 시대의 명작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 관객들을 열광케 했던 작품의 성공요인은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복고열풍은 또 다른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한동안 10대 취향으로만 극심하게 경도됐던 방송이 7080의 등장으로 세대 간 균형을 갖추게 된 것이다.
프로그램도 그렇고 출연자도 그렇고 제작자도 그렇다. 한 시대 방송의 개화를 이끌어냈지만, 단지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한동안 방송출연이 뜸했던 출연자들은 복고프로그램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고, 그동안 소외됐던 4,50대 중 장년층도 당당한 시청자로서 방송사로부터 대접을 받게 된 셈이다.
게다가 7080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젊은 층과 문화적 접점은 넓어지고, 공감은 커지니 세대갈등을 해소하는데도 적잖이 도움이 될 듯하다.
실제로 7080프로그램을 보고 폭소를 터뜨린 10대들이 많았다고 하니, 요즘의 N세대들도 위대한 7080세대의 감수성에 존경심을 표해야 마땅하다. 적어도 두 세대가 웃음의 코드를 공유한 것 아닌가.
창작의 빈곤, 문화의 퇴행?
7080의 미래를 설계하자
하지만 TV에 등장하는 7080인물들을 보면서 정작 7080세대 당사자들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7,80년대 젊은 열정을 발산했던 그들이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해 보여주는 것이 추억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기대했던 건 방송사의 복고와 추억이라는 상품을 팔러 나온 마이너리티의 모습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열정을 가지고 살았던 그리고 한 시대의 문화를 생산하고 발산했던 그들의 성숙한 현재적 모습이다.
낡은 LP판의 단순 재생이 아니라, 과거 문화의 현대적 창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쩌면 7080 시청자들은 그렇게 성숙했을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작금의 7080열풍은 이 시대, 문화의 빈곤을 과거 성공한 복고상품의 판매로 메우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 한계를 가진다. 치열한 현실과의 교감, 문제의식의 탐구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의 한 지평을 열어 나가야할 이 시대의 문화 생산자들이 안이한 ‘안전빵’의 향수에 매몰돼 있는 것은 아닌가.
7080열풍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정작 지금 세대가 7080 문화 속에서 발견하고 계승해야 할 것은 대중음악에 대한 편견이 넘쳐났던 그 암울한 시대에도 독자적인 자기 노선을 걸었던 김수철, 조용필, 사랑과 평화 등의 진보성이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서 보여줘야 할 것도 아스라한 향수에 젖어 현실을 잊어버리는 퇴행적 복고가 아니라, 그 시대의 열정을 오늘에 되살리는 진정한 복고의 긍정이다. 한 문화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과거에서만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집착은 문화를 퇴행시킨다.” 7080열풍은 과거의 집착이 아닌 과거의 창조적 재생산으로 발전해야 한다.
글 김주영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