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이후, 시사만화의 새로운 경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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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의 <한국시사만화 탄압사 -5>시사만화계 진보·보수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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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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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인터넷만화신문 ‘코카뉴스’(www.cocanews.com) 이사가 5월16일 열린 토론회 ‘시사만화·대학언론 탄압사 재조명’에서 발표한 <한국 시사만화 탄압사>를 연속으로 싣는다.(편집자)
1987년 6.10 항쟁은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6.29 선언을 하게 만든 원인이 됐다. 1987년 11월11일 그동안 언론의 목줄을 조여 왔던 ‘언론기본법’이 국회에서 폐지되었고, 신문은 4.19 이후 27년 만에 자유로운 발행시대를 맞았다. ‘보도지침’ 담당 부서였던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과 ‘1도 1사’ 제도도 폐지됐다. 역사적인 ‘6월 항쟁’ 이후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대통령 얼굴을 시사 풍자만화에 그려 넣어도 좋다”고 천명하는 등 겉으로는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주창했지만 내용에서는 여전히 ‘군사정권’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6공화국 초기 부산에서 발행되는 ‘국제신문’에 시사만화를 연재했던 안기태는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만화가 실린 뒤 반공연맹 등 단체들에게 협박전화를 잇따라 받았고, 새벽 1시경 귀갓길에 괴한들에게 몽둥이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적어도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언론통제는 사라졌고, 정권이 언론에 제공하던 특혜도 하나둘씩 없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 들어 한국 시사만화의 역사를 만들어가던 대표적인 시사만화(예컨대 고바우영감, 두꺼비, 왈순아지매 등)들의 내용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태우 정권을 ‘민주화의 실현 주체’로 규정하고, 야당에 대해서는 ‘집요하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분열로 인해 민주 정권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야당을 비난하면서 시사만화가들이 독재 정치 세력으로 규정했던 전두환 정권이 후계자로 지명한 정권을 ‘찬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국언론재단, 앞의 책. 75쪽)
고바우 등 변질, 박재동 등 세대교체..4컷에서 한칸 만평으로
‘6.29’ 이전까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고바우영감’, ‘두꺼비’, ‘왈순아지매’, ‘나대로 선생’ 등과 같은 4칸 만화들은 노동자들의 파업 등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매도하고 왜곡하는 내용을 보이기도 했다.
이와 달리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경향신문의 김상택 등은 과거 4칸 연재만화들이 담당했던 과감하고 적극적인 권력 비판을 선보였다. 특히 박재동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진보성을 보탠 새롭고 참신한 한 칸 만평을 선보임으로서 시사만화의 ‘한 칸 만평’ 시대를 열어젖혔다. 한국 시사만화의 전통이라 할 만한 ‘비판정신’이 ‘4칸 연재만화’에서 ‘한 칸 만평’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시사만화가 세대교체도 급속히 진행됐다. 1994년 서울신문의 윤영옥이 정년퇴직했고, 문화일보의 안의섭은 세상을 떴으며, 같은 해 10월 경향신문의 김판국도 신문사를 떠났다. 이들을 이어서 서울신문에는 조기영, 경향신문에는 박순찬이 등장했다. 심민섭도 1996년 한국일보를 떠났고, 오룡도 같은 해 조선일보를 떠났다. 서울신문은 30년만인 1993년 만평을 부활했는데 처음에는 이원수가 맡다가 지금은 백무현이 담당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오룡이 떠난 후 신경무가 만평을 맡았고, 동아일보는 1997년 백인수를 이어 최남진, 손문상이 만평을 담당하다가 손문상이 부산일보로 옮긴 이후에는 만평을 게재하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는 고우영 등을 거쳐 배계규가, 한겨레신문은 박재동이 1997년 8월에 그만 두면서 박시백, 그리고 다시 장봉군으로 이어졌다. 1999년 3월에는 김상택이 중앙일보로 옮겨가 박기정의 뒤를 이었고, 경향신문은 김상택을 이어 김용민이, 세계일보는 안의섭을 이어 유기송, 유기송 뒤로 조민성이 만평을 맡았다가 지난해 그만둔 뒤로 지면에서 만평은 사라졌다. YS 정권을 거치고 DJ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사만화계는 내부적으로 극심한 진보 보수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결국 시사만화가들 단체가 둘로 쪼개지는 상황을 맡는다. 한국의 시사만화가 단체는 1995년 창립됐던 ‘한국시사만화가회’가 최초. 이후 ‘한국시사만화가회’의 보수 시각에 불만을 가진 진보적인 소장파 시사만화가들이 2000년 새로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를 탄생시켰다.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는 또 시사만화가 뿐 아니라 만화비평가 등을 포함시킨 단체로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2006년부터 ‘전국시사만화협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정치탄압에서 자본권력 검열 강화로
한편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시사만화계가 맡고 있는 새로운 양상은 과거 정치권력의 탄압은 사라졌으나 회사 내부의 자체 검열이 강화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시사만화는 소속 언론사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시절 소속 신문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놓고 벌어진 동아일보와 손문상 화백 간의 시각차로 결국 손 화백은 2002년 동아일보를 떠나 부산일보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손 화백은 또 2007년 3월 부산일보도 그만두었는데, 부산일보 측의 논조와 자신의 논조가 자주 충돌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4년에는 문화일보에서 10월 한 달 동안에만 4번에 걸쳐 만평이 누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원인은 편집국장의 시각과 이재용 화백의 시각이 달랐기 때문인데 결국 이 화백이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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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일보 2004년 10월 5일자 만평> © 코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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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04년 10월 29일자> © 코카뉴스 |
예로 들은 문화일보 2004년 10월 5일자 만평은 서울시청 광장 이용과 관련해 진보성향 시민사회 단체에는 이용을 불허한 당시 이명박 시장을 비판한 내용이다. 또 10월 29일자는 여야 간의 막말 정치를 싸잡아 비판한 것인데, 여당의 막말보다 야당의 막말이 더 심하다는 이유로 누락되고 말았다. 상식선에서 이 정도 내용의 만평이 내부검열에 의해 누락됐다면 작가의 스트레스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결국 이재용 화백은 문화일보만 그만 둔 것이 아니라 아예 언론계를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한국 시사만화가들이 처한 환경은 회사와 갈등이 파생했을 경우 약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입증했다.
기본적으로 시사만화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줄어든 데다, 특정 회사 안에서 자체 검열로 시사만화가 탄압을 받는 것은 정권의 탄압처럼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시사만화가들이 회사 내부에서 부당하게 탄압을 받는 경우 그들은 고립됐으며,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시사만화와 시사만화가들은 권력에 대한 ‘비판자’, 권력을 ‘귀찮게 만드는 자’, 권력을 ‘괴롭히는 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이제 그 ‘권력’의 속성이 변하고 있다.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으로 대치됐으며, 또 신문사 내부의 ‘자체통제’도 시사만화가들의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위축시키고 있다. 광고주인 특정 재벌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비판할 때 보다 더한 눈치를 봐야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시사만화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특하고 강력한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그 유전자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유전자다. 권력은 시대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어떤 때는 정치권력 또 어떤 때는 자본권력과 같은 식이다. 이제 그들은 언론내부 권력에 탄압받고 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언론내부의 권력’은 언론사 밖의 어떤 ‘힘’과 연관돼 있기 마련이다. 가령 특정 언론사가 특정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지할 경우 소속 시사만화가가 그 후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도록 내부 검열을 강화할 수 있다. 이 경우 시사만화가들에게 직접 가해지는 압력은 내부 검열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외부의 정치권력이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 재벌의 광고로 먹고사는 언론사의 경우 소속 시사만화가들이 그 재벌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내부 검열을 강화할 것이다. 이 경우에도 시사만화가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내부 통제란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경제권력이 되는 것이다.
신문사 내부 검열이 넘쳐나는 현재의 상황은 우리 시사만화가들에게 1930년대 미국 풍자만화가인 헨리 메이저(Henry Major)의 경구를 생각나게 한다.
“시사만화가들은 그들이 그린 그림 때문에 수시로 투옥됐다. 이제 그들은 당연히 그려야 할 것을 그리지 않은 죄로 구속돼야 한다.”
시사만화가들은 잠시 잊고 내버려두었던 자신들의 유전자를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저널리스트로서의 책임을 다시 한 번 무겁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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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5 [03:31] ⓒ참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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