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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위인이 없다

은바리라이프 2007. 12. 30. 21:17
성경에는 위인이 없다


사람이 쓴 책은 사람이 위대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각종 위인전은 위대한 인물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단점이나 약점을 잘 기록하지 않는다. 가능한 좋은 점만 부각시켜 본을 보이게 하려고 하거나 자신들의 조상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었는가를 자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인들의 전기를 보면 태몽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어릴 때부터 남달랐음을 강조하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전기에도 어릴 때 오줌 싸서 소금 얻으러 다녔거나 부모님들을 속이고 용돈을 훔친 위인은 없다.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잘잘못이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분들의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를 왜 그대로 기록했을까? 아니, 어떤 경우에는 잘못한 것을 더 자세히 기록하기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면 과연 그들은 위인인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펴보기 바란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잘 모른다면 도대체 위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일반적인 전기들과 비교해 보면 정말 재미있다. 그저 짧은 지면에 간단하게 소개만 드릴테니 좋은 선생님을 찾아서 배울 수 있기 바란다.

아브라함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군 할아버지와 거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성경은 그를 신격화하지도 않으며 특별한 위인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외국을 떠돌 때 아내를 빼앗기고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서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였다가 아내를 두 번이나 빼앗겼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되찾아 오기도 했다. 데이트 도중에 깡패에게 애인을 버려두고 도망간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위인이라고 할 것인가(창 12:17, 20:1-7)?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제대로 믿지 않은 증거로 첩을 통해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비웃다가 아들 이름이 '웃음(=이삭)'이 되고만 것을 들 수 있다. 웃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7-19)라고 했는데 이 말은 경상도 말로 '마, 됐심다'와 같은 의미이다. 이건 일종의 반항이다. 선생님이 무어라 하는데 이런 소리했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하나님께 그런 소리를 다 했으니... 창 21:22에 보면 당시의 왕인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라니? 어감이 좀 나쁘다. 사실은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해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이런 말을 하면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한 것이다. 그 때 조약의 조건이 '거짓말 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조건을 걸고 맺은 조약이 또 있을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편에 있으니 아비멜렉이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는 뜻이다.

야곱
야곱은 애시당초에 위인의 반열에 들지 않는 사람이다. 형님을 속이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가로챈 교활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상대로 온갖 잔꾀를 다 부린 사람이기도 하다. 외삼촌 집에서 외삼촌을 상대로 온갖 잔머리를 다 굴리며 싸우기도 했다. 그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고 계셨지만 그는 단 한번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죽을 때가 다 돼서야 창 48:15에서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남긴다.

모세
계백 장군의 출전 장면이나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나서는 쟌 다르크의 모습과 모세의 모습을 비교하면 우리의 주인공은 너무나 초라하고 허약하다. 아이고 저런 걸 지도자라고...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출 3:11, 4:1, 4:10, 4:13, 6:12, 30). 하나님께서 많은 이적을 보여주시고 몇 번이나 내 백성을 구해내라고 당부해도 끝끝내 버티다가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자 그제서야 쫓겨 내려온 지도자가 아닌가? 못한다고 수도 없이 발뺌을 하기도 하고 장인에게 민족을 구하러 간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형제들이 잘 있는가 보려고 한다'는 식으로 처가를 떠났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삼으셨습니다라고 하면 장인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랬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모세의 위대함이란 이런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점차 탈피한 후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후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어설픈 지도자와 형편없는 백성을 가장 위대한 선지자와 위대한 민족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다윗
위대한 왕이었지만 바보짓도 한 두 번 한 게 아니다. 남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으니 세상에 이런 위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다윗을 위대하다고 말하다니? 아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왕의 일인데 좀 감춰주면 안될까? 성경은 이런 것을 절대로 감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록되어졌기 때문이다.

베드로
마가복음이 쓰여진 때의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우두머리)으로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존경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분의 이야기를 양아들이 쓰면서 이렇게 까발릴 수가 있을까? 선생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는데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자다가 세 번이나 꾸지람을 들은 것이나(막 14:37, 막 14:66), 조그마한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막 14:51)은 공산당의 총칼 앞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버리지 않은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에 비교하면 너무나 비굴하다.

성경은 결코 사람이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위인들은 거의 대부분 약한 모습이나 비굴한 모습을 다 가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상세하게 그런 잘못을 기록해 놓았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더라면 그런 위대한 조상들의 사소한 잘못은 모른 척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기록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성경을 기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성경은 위대한 사람을 보여 줄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다른 위인전과 비교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위인들 투성이다. 아브라함을 읽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읽어야 하고 바울을 읽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읽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는 셈이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었는가를 열심히 강조하는 것은 핀트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위대할 것 없는 사람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가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다.

위인전의 위인은 사람이 만든 위인이지만 성경의 위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위인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이런 하나님의 손에 잡혀 위대한 인생을 살기 바란다. 성경은 모든 교과서보다 우선해서 배워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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