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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은바리라이프 2007. 12. 30. 21:13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지요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면 눈먼 소경은 어떡하란 말인가? 보이지 않는 고조, 증조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내 가슴 속의 터질 것만 같은 너의 대한 사랑도 보여주어야만 믿겠다면 내 가슴을 쪼개란 말인가?

대부분의 중요한 것은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보고 다 알 수 있다면 연애 결혼한 사람은 결코 이혼하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중매로 결혼한 사람들보다 이혼률이 더 높다는 것은 보아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보아야 믿는다'는 말이나 '증거를 대 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수준 낮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 사이에, 진정한 친구 사이에는 결코 사용되지 말아야 하는 어리석은 말이다.

  • 감각적인 것과 관련된 것은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눈, 귀, 피부, 혀, 코로 보고 들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런 감각 기관들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 많은 빛 가운데 사람이 볼 수 있는 작은 일부분을 가시광선(볼 수 있는 빛)이라 하고, 소리 중에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일부분만을 가리켜서 가청 주파수라 한다. 너무 커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아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으며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이런 것을 감각적 차원, 혹은 동물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사람은 짐승보다 능력이 떨어진다. 차라리 짐승들이 사람보다 이 영역이 더 발달되어 있다. 이렇게 일부분밖에 알 수 없는 이 능력도 아주 일시적이다. 화장실에 처음 들어가서 냄새가 아무리 독해도 조금 있으면 못 맡게 되는 것이 그렇다. 그 냄새에 익숙해져 버리면 냄새를 맡아도 잘 모른다.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것도 바로 이 차원이다.

    보고 믿겠다는 말은 감각과 관련된 것을 대상으로 할 때에만 성립이 된다. 친한 친구, 부모형제, 부부사이에 이런 말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면 올바른 관계가 다 깨어지고 있다는 위험신호이다.
  • 인간의 지혜가 작용한 것은 알아야 보이지, 본다고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사람에게는 보이고, 들리는데 모르는 사람은 보고 들어도 모른다는 말이다. 소풍을 언제 어디로 갈 것이냐에 대해서는 다수결로 결정하면 되지만 유명한 화가나 음악가의 작품을 두고 평가를 할 때는 다수결로 해서는 안 된다.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볼 줄 아는 사람 한 명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의 말을 무조건 따라서 노력하면 알게 되고 그래야 볼 수 있게 된다. 먼저 아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는 끝내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예는 아주 많다.

    영어 듣기: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무조건 듣는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의 설명이 필요하다. 언젠가 아주 짧은 영어 문장을 알아들을 때까지 들려주겠다고 20번 정도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지만 끝내 못 알아듣기에 '이래도 모르겠냐?' 했더니 아이들이 합창을 했다. '알아야 들리지요' '들어보면 아는 것 아니니?' 했더니 자기들이 대답을 해놓고도 우습단다.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들리냐고 물었더니 '아주 쉬운 거네요'라는 것이다. 그렇다. 알아야 들리는 것이다.

    받아 쓰기: 잘 아는 사물, 가령 학교, 책상, 선생님 이런 것들을 받아쓰기한다면 다 쓸 수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받아쓰기란 정말 어렵다. 아는 사람은 대번에 쓸 수 있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은 어려운 것이다.

    그림, 음악: 난 아직도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는 감동을 못 받는다. 우리 아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이 훨씬 더 잘 그린 것 같다.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회에 가서 한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사람이 있는 것은 왜 그럴까? 들어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이 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준 훌륭한 책이다. 저자가 우리와 똑같은 사물을 보고서도 너무나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을 보고 독자들이 어떻게 그런 것이 다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저자의 답변이 바로 '사랑하면 보인다'였다. 나도 사랑 할려고 애를 썼는데 아직 잘 안 보인다. 보아도 보아도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안 보인다는 말이다.비싼 돈 줘가면서 해외관광을 다녀와서는 볼 게 아무 것도 없더라는 사람이 많으니까 공익광고에 '알고 가야 많이 보인다'는 광고가 다 나왔다. 실제로 외국 여행을 가도 모르고 가면 볼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미리 공부하고 가야 많은 것을 보고 온다. 알아야 보인다는 말이다.

    사람의 지혜가 가미된 것은 본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알게 된다.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은 배워야 한다. 동물은 생존 차원의 본능이 아닌 이상 이런 것을 배우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것을 지성적 차원 혹은 인간적 차원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 감각적 차원 위에 지성적 차원이 있듯이 지성적 차원 그 위에 영적 차원이 있다.
    이것은 보아도 알 수 없고 가르쳐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오직 믿어야만 보이는 차원이다. 인간의 지혜가 가미된 지성적 차원도 무조건 믿고 따라서 노력해야 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만물을 창조하신 신의 지혜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 보고 알 수 있을까? 단지 그 분이 자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우리 눈의 가시거리는 대략 50㎞라고 한다. 끝없이 넓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기는 얼마이며 거기에 비하면 50㎞를 볼 수 있는 우리의 시력은 0이 아닌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50/∞=0을 참고 하자. 분모가 무한대로 커지만 분자가 얼마이든 무한대가 아닌 한 0이다) 소경이나 다름없는 이런 눈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보려고 한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믿을 수밖에 없다. 알기 위해서 믿으라는 말은 그래서 진리이다. 이런 영적 차원의 일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 수 있다. 사람 사이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한다. 좋은 예로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있다. 의처증이란 병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제시해도 고칠 수 없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그것은 믿음이 상실되어 생긴 3차원적인 병인데 증거란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감각적 차원(1차원)이기 때문에 1차원적 증거는 아무리 많이 갖다대도 고쳐지지 않는 병이다. 믿음이 회복되지 않고는 결코 고칠 수 없는데 믿음이란 것이 어떤 증거를 주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처증은 불치의 병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정신병자일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차원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가령 학교에서 큰 사고를 저지른 학생을 두고:

    교장 선생님: 그 놈 생긴 게 사고칠 놈이구만, 퇴학시켜!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 버렸다면 감각적 차원이다) - 옛날에는 이런 일도 간혹 있었단다.
    담임 선생님: 사고도 치고 말썽도 부리지만 퇴학시킬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아이를 이해하고 있다면 지성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 절대로 사고 칠 아이는 아닌데 어쩌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 가지고...
    (엄마는 자식에 대해서 무조건 믿어주는 입장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런 엄마의 말은 옳지 않다. 그러나 이 학생이 잘못을 반성하고 돌아선다면 그것은 맹목적으로 자식을 믿어주는 어머니 때문일 수는 있어도 이런 식의 교장이나 담임 때문은 결코 아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도 학생을 믿어준다면 또 모르지만. 맹목적으로 자식을 믿는다고 그 믿음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런 믿음이 소중한 것이라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는 이런 믿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 사이도 이렇게 세 차원으로 설명해 보자.

    감각적 차원: 먹는 것을 사 주거나 같이 잘 놀아주는 친구, 외모가 멋있는 친구만 사귄다.
    지성적 차원: 의리 있는 친구, 인간미가 있는 친구를 사귄다.
    영적 차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데도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도덕 책에 나오는 친구라면 이런 차원일 것이다.

선생님과 제자, 부부 사이도 이렇게 정리해 보면서 진실한 스승과 제자가 되도록 노력해 보자. 결혼을 한다면 부부 사이에도 이런 믿음을 가꾸기 위해서 진실된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이 상실되어 결혼이 깨어지는 수많은 부부를 볼 때 이런 노력은 더욱 절실하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러한가 생각해 보자.

꼭 하나님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사람은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라고 권하고 싶다. 믿어야만 보일 테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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