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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읽기 - <14> 영화‘007’의 끊임없는 진화

은바리라이프 2007. 12. 23. 17:26
대중문화읽기 - <14> 영화‘007’의 끊임없는 진화

개선보다는 뼈를 깎는 혁신 선택
‘제임스 본드’이름 빼곤 다 바꿔
2007년 01월 25일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의 한 장면.

 

그 이름도 유명한 영화 ‘007’. 1962년 ‘007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40년 넘게 스물한 편을 배출한 첩보액션영화 시리즈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미국 개봉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선보인 007 시리즈의 최신작 ‘007 카지노 로얄’이 세계적인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007 어나더데이’(2002년)가 가졌던 최고 흥행기록(4억 3000만 달러)을 넘어 5억 달러에 육박하는, 007 시리즈 중 역대 최고 히트를 기록한 것이죠. 국내에서도 관객 110만여명을 기록해 근래 개봉된 007 시리즈 중 최고 흥행을 거두고 있습니다.

‘007 카지노 로얄’은 기획 당시만 해도 “망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로 일약 발탁된 영국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 때문이었죠. 영화 ‘툼 레이더’와 ‘뮌헨’에 얼굴을 내밀었던 크레이그는 대규모 상업영화에서 한번도 단독 주연을 맡은 적이 없는 검증되지 않은 배우였으니까요. 게다가 크레이그는 역대 제임스 본드로 출연했던 숀 코너리나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과 같은 섹시 스타들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미남이 아닌 데다 이미지는 투박하다 못해 야성적인 쪽에 가까웠죠.

하지만 영화의 이런 모험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동안 007 시리즈가 쌓아 온 ‘성공의 법칙’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개선’보다는 뼈를 깎는‘혁신’을 선택한 것이죠. 과거 007 시리즈에는 성공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세련되고 신사적인 바람둥이 제임스 본드 △아찔한 수영복 차림의 팔등신 본드걸 △기상천외한 제임스 본드의 신무기들 △지구 정복의 야욕을 품은 괴팍한 악당과 같은 요소들 말입니다. 그간 007 시리즈는 이런 성공 요소들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방식으로 개선을 거듭해 왔습니다. 좀 더 섹시한 본드걸, 좀 더 기발한 신무기, 좀 더 악랄한 악당으로 매번 업그레이드해 왔죠.

007의 진화는 마치 휴대폰의 진화와 흡사했습니다. 전화 기능으로 시작해 카메라 기능을 추가하고 그 다음 MP3 기능이 추가되고 이어 DMB 기능을 보태는…. 이런 식으로 작은 기능을 하나하나 부가시키며 업그레이드하는 제품 개발 방식과 다를 바 없었죠.

 

이런 007의 업그레이드 방식은 크게 실패할 리 없는 비교적 안전한 길이지만 크게 성공할 리도 없는 방법입니다. 최근 들어 쏟아져 나오는 액션영화들과의 차별성도 점차 미미해졌던 것이죠. 다시 말해, 40년 넘게 007 시리즈의 성공을 보장해 주었던 성공의 법칙들이 어느새 시리즈 혁신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고 만 것입니다.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 빼고는 모두 갈아 치우면서 일종의 ‘선행(先行)적 혁신’을 감행했습니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보여 주는 새로운 제임스 본드는 신무기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과묵한 데다 웬만한 상대는 주먹으로 해결하는 무지막지함을 자랑합니다. 지략이 뛰어난 편도 아니며, 몸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이죠. 바람둥이도 아닙니다. 한 여자에게 목숨을 바치는 일편단심에 “사랑을 위해서라면 첩보원도 관두겠다”고 선언하는 순정파 제임스 본드죠.

결국 ‘땀내 나는’ 새로운 제임스 본드는 그간 007 시리즈에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낮았던 여성 관객층을 대폭 끌어들여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첨단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수록 더 인간적이고 따스한 뭔가를 갈망하는 관객들의 성향과도 맞아떨어졌죠.

‘007 카지노 로얄’의 성공은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렇습니다. 모험 없이는 성공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저지르십시오!    

이승재<동아일보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