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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읽기<15> - 의학드라마 ‘붐’

은바리라이프 2007. 12. 23. 17:26
대중문화읽기<15> - 의학드라마 ‘붐’

시청자, 수용 폭 넓어져 프로들 세계에 '호기심'
2007년 02월 01일   

요즘 TV는 온통 ‘흰옷’ 입은 인물들이 나오는 드라마로 점령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흰옷이라…. 소복 입은 귀신들이냐고요? 아닙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 바로 의사들입니다.

지상파와 케이블 TV에서 국내외 메디컬 드라마의 방영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1월 6일 첫 전파를 탄 MBC 주말 미니시리즈 ‘하얀 거탑’에 이어, 1월 17일부터는 SBS 수목 미니시리즈 ‘외과의사 봉달희’가 방영 중입니다. 게다가 KBS2에서는 지난해부터 미국 ABC TV의 병원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2’가 일요일 밤마다 방송되고 있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3월 이후에는 ‘다모’의 이재규 PD가 개성 넘치는 의사집단을 다룬 드라마 ‘이발사들’을 연출할 예정이고, ‘주몽’의 최완규 작가는 ‘종합병원2’를 집필합니다. ‘하얀 거탑’이 인기를 끌자 케이블 TV(OCN)에선 원작인 일본 드라마를 최근 방영하기 시작했죠.

특히 ‘하얀 거탑’은 국내 메디컬 드라마의 급격한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해 줍니다. 이 드라마에는 그 ‘흔한’ 청춘스타도 없고, 차고 넘치는 러브 스토리도 없습니다. 이정길 김창완 김명민 정한용 변희봉 등 연기파 배우들이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시종 ‘프로’들의 이야기를 긴박감 넘치게 담아냅니다.

 

촌각을 다투는 수술실의 급박한 분위기, 난무하는 전문용어, 수술 해법을 놓고 치열한 실력대결을 벌이는 의사들의 모습은 기본에 속합니다. 여기에다 이 드라마는 여태껏 한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의사 세계의 암투를 실감나게 그려 냅니다. 의학 드라마라기보다는 회유와 협박, 배신과 기회주의가 난무하는 정치 드라마에 가깝죠. 차기 외과 과장을 뽑는 선거를 앞두고 대학병원 내 양대 파벌은 음성적인 인맥을 총동원하고 심지어 투표권을 가진 의사들의 자동차 트렁크에 수억원의 현금이 든 갈비상자를 실어 넣는 추태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얀 거탑’의 결정적 특징은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때론 선하고 때론 악한 다면적인 캐릭터를 보여 주는 데다가(특히 안경을 벗고 생전 처음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변신한 김창완의 연기는 압권입니다), 결론도 도덕적이지 못합니다. ‘돈’을 퍼부은 쪽이 결국 과장 선거에서 승리하니까 말이죠.

이렇듯 무겁고 어둡고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의학 드라마가 유행하게 된 건 시청자들의 수용 폭이 넓어진 덕분입니다. 얼굴만 믿는 청춘스타들이 벌이는 가볍고 뻔한 멜로나 코믹물에 식상한 시청자들이 ‘CSI 과학수사대’와 같은 미국의 범죄수사 전문 드라마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전문직의 깊이 있는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뜻에서 1월 1일 첫 방영된 MBC 일일드라마 ‘나쁜 여자 착한 여자’는 오히려 과거로 퇴행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유부남인 소아과 원장(이재룡)과 유부녀인 산부인과 의사(성현아)가 불륜의 외줄타기를 벌인다는 내용의 이 드라마는 의사의 전문적인 세계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바람만 피워대는 선정적인 장면들로 점철되면서 시청자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고 있으니까요.

순천향병원 의료진의 전문적인 조언에 뿌리를 둔 ‘하얀 거탑’이 치밀한 전개로 호평을 받고 있는 반면, ‘나쁜 여자…’는 방송 3일 만에 서울시의사회로부터 “의사를 불륜이나 저지르는 직업으로 묘사했다”면서 졸지에 방송금지 가처분 소송을 당했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다고 해서 전부 공부하는 건 아니듯이, 흰옷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 의사는 아닙니다.

이승재<동아일보 영화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