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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기, 다시 보기] 컴퓨터와 아트展, ‘느리게’ 보기

은바리라이프 2007. 11. 12. 18:02
미리 보기, 다시 보기] 컴퓨터와 아트展, ‘느리게’ 보기
--- 컴퓨터와 아트展 10. 25~2007. 1. 21 대림미술관
Vol. 39   2006. 11. 30~12. 6

<컴퓨터와 아트>전은 지금, 여기의 미디어 아트가 아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이전'의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줄기를 찾아 돌아오듯이. 미디어 아트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시간.




다니엘 로진 <타임스캔> CPU, 커스톰 소프트웨어, 비디오 카메라 2004


지난 11월호 미술전문지 《아트 인 컬쳐》의 특집 - 한국 미디어 아트 1.0 - 을 인용한다면, <컴퓨터와 아트>전은 미디어 아트 1.0, 그 ‘이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뉴욕과 서울의 빗트폼 갤러리와 대림미술관이 함께 컨텐츠를 꾸린 모양새다.


사실 이 전시는 근래 미술계의 트렌드에 반하는 전시다. 한때 미술계를 통째로 접수할 듯 보였던 미디어 아트 전시는 언제부턴가 다소 위축된 게 사실이다. 미디어 아트 전시라고 하면, 미술계 안팎에서 뭔가 ‘앞선’ 개념이 배어 있거나, 인문학적 메시지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 전시는 오히려 미디어 아트의 ‘과거’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 전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개의 전시가 있다. 빗트폼 갤러리 뉴욕에서 열렸던 <스크래치 코드>전(2004년)과 그 전시가 벤치마킹한 <Cybernetic Serendipity>전(영국 ICA, 1968)전이 그것이다. ‘인공지능의 우연한 발견 재능’이라고 해석될 법한 <Cybernetic Serendipity>전은 <컴퓨터 회화>전(뉴욕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 1965), <컴퓨터 아트>전(하노버, 1970) 등과 더불어 예술과 컴퓨터 사이의 관계를 모색한 기념비적인 전시로 알려져 있다.


이 전시들을 직접 보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컴퓨터를 이용했거나 컴퓨터와 연관된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였다는 점, “음악, 과학, 문학, 철학 등 여러 장르와 예술이 결합한 전시”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멀티미디어의 발전과 진화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조망한 《멀티미디어》(랜덜 패커, 켄 조던 엮음, 아트센터 나비 펴냄)라는 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술과 기술 모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발상”을 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미디어 아트의 상업적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갤러리의 기획에 이름 있는 미술관이 공간을 할애한 것에 불과하다며 이 전시를 깎아내린다. 결코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수학자와 작가이자 동시에 ‘디지털 아트의 개척자’로 불리는 벤 라포스키의 음극선관과 아날로그 계산기를 활용한 <전자 추상>과 수학자 프리더 나케와 토니 프리쳇 등의 작품은 수학적 곡선이 갖는 아름다움과 기술적인 형태의 조화로움이 미디어 아트의 또 다른 원류였음을 제대로 보여준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관람객의 움직임과 빛의 변화에 맞춰 사운드를 발산하는 전자 조각을 개척한 피터 보겔의 작업 역시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 우리가 기억해야할 미디어 아트의 선조들



프리더 나케 <13/9/65 Nr.2> 컴퓨터 드로잉의 스크린 프린트 1965


물론 이 전시만으로 1960년대 초기, ‘컴퓨터’를 화두로 한 예술 작업을 ‘완전 정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르베르트 프랑케, 딕 랜드, 쿠르트 알스레벤, 윌리엄 페터, 게오르크 네스, 마이클 놀, 베라 몰나르, 자이젝, 로제 빌더, 벨라 줄레즈, 컴퓨터 아트 소사이어티, 자크 팔룸보 등 컴퓨터를 예술에 편입시킨 선구자들 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가 나름의 의미를 갖는 까닭은 미디어 아트에 대한 회고적 성격을 강조한 데 있을 것이다. 최근에 ‘Passage'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진 작가 코디 최가 자신의 저서 『20세기 미술지형도』에서 강조했듯이,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유의 흐름을 수입한 적이 없었다. 미술 역시 여기에서 피해갈 순 없다. 미디어 아트 역시 마찬가지다. 재현 매체로서 특권을 누려온 회화의 오랜 전통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개념주의와 미디어 아트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회화와 조각이 아닌 다양한 방법을 찾고, 새로운 재료를 도입해온 수많은 예술가들의 ‘실험성’과 회화와 조각을 넘어 일상의 사물을 미술의 장으로 포함시키려 한 미술 실천의 ‘확장’을 미디어 아트와 분리시킬 수 있을까? 1920년대 유럽의 아방가르드 필름이나 1940년대 실험영화, 앤디 워홀의 언더그라운드 필름, 그리고 해프닝이나 플럭서스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영상 이미지’에 대한 실험을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땅에서는 어떠했는가? 삶과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고자 했던 많은 작가들의 실험이 이 땅에서는 철저히 ‘탈구’된 채 흘러왔을 뿐이다. 그저 테크놀러지가 예술과 결합했을 때의 반응과 그에 따른 역반응의 핑퐁 게임만을 즐긴 채, 역사라는 이름으로 미디어 아트의 뿌리를 찾는 시간을 놓친 것이다.


물론 테크놀러지의 발전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미디어 아트의 역사를 단순히 따라만 가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하나의 연대표에 불과하며, 미디어 아트의 시조가 결국 ‘모든 실험 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임을 증명하는 결과만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Cynernetic Serendipity>전을 기획했던 자시아 레인하르트의 말처럼 “미디어 아트는 ‘성취 단계’가 아닌 ‘가능성들’을 다룬다”는 얘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말대로, 미디어 아트는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과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건 과거에도 그래왔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미디어는 그 이름만으로도 ‘속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미디어 아트가 반드시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단순한 컨텐츠 제공을 의미하는 웹 1.0 단계를 뛰어넘어, ‘개방과 공유’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사용자 중심의 플랫폼을 중시하는 웹 2.0이라는 단어마저 체득한 관객들의 마음을 뺏을 수 있는 예술 작업은 빠른 속도가 아닌, ‘느림의 미학’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평면 작업을 통해 미디어 아트의 미래를 예감했던 선구자들의 작업 사이를 거닐며 깨달은 생각이다.


| 윤동희 _ 편집장 hee@abcpap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