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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미디어 아트

은바리라이프 2007. 11. 12. 14:34

백남준과 미디어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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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jshrobot (2005-10-18 01:28)집필한 지식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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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정의 되며, 인간은 예술을 매개로 인간 자신을 설명하고 해석한다. 새로이 정립되는 예술의 중심에는 예술표현방식의 변화가 존재하게 된다. 예술표현방식의 변화가 빠를때에는 개념의 정립 또한 어렵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순간이다. 때문에 현대예술은 유래 없는 전환기에 서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 진보를 더 해가는 정보미디어와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표현 방법을 획득해 가는 미디어 아트. 이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함으로 20세기 현대 예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백남준. 비디오와 텔레비전의 예술적 가능성을 상상하고 실현하는데 있어서 그 누구도 백남준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설치물, 영화, 퍼포먼스 등을 통하여 그는 현대미술에서 시간적인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형성시켰다. 그의 삶을 통해서 추론해 보도록 하겠다.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당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섬유업계의 대부이자 무역상인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훌륭한 사업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동경대 미대에 진학하여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백남준의 청소년기의 예술세계는 신재덕, 이건우 등에게 사사받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1947년 경기공립중학교(경기고 전신, 6년제)시절에 접하게 된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그(Arnold Schonberg)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는데, 당시 마르크스에 심취하기도 했던 백남준은 음악의 관념적 전통의 파괴와 함께 급진주의 음악의 선구자인 쇤베르그를 통해서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에 눈을 뜬다.

 

1949년 한국전쟁이 임박하자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 1년 뒤에는 다시 도쿄로 이주했으며, 동경대학에 입학하여 음악, 미술사, 미학을 두루 공부하고, 졸업논문으로 '아놀드 쇤베르크 연구'를 제출한다. 1956년 서구의 고전주의 및 모더니즘 음악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고, 거기서 작곡가 볼프강 포트너(Wolfgang Fortner)에게 사사받는다. 1957년에 그는 쾰른에 있는 WDR라디오국에서 첫번째 오디오테잎 콜라쥬를 만드는데, 이는 이후 비디오콜라쥬 작품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 이듬해 백남준은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면서 동양의 선(禪)사상에 기반을 둔 케이지의 영향으로 서구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TV의 매스 미디어에 대한 초기 예술적 탐구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있었던 첫 개인전 '음악전람회-전자 텔레비전'에서 이루어 졌다. 이 획기적인 전시는 1960년대 초, 대중의 우상이 되어 있던 상업TV 방송의 일방적인 정보지배구조를 변화시키고자 최초로 TV를 임의적으로 조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미디어와 관객과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쌍방향의 조정된 TV로 구성되었다. 비디오 아트의 탄생을 알리는 놀랄만한 이 첫 번째 전시를 통해 백남준은 작곡가이자 퍼포먼스 미술가에서 새로운 미술 형식의 발명가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에도 텔레비전과 비디오에 대한 그의 탐구는 계속되었다. 1965년 이후에는 새로 개발된 비디오 매체를 통해 정보 소통 구조에 대한 예술적 대안을 모색하는 등, 새로운 미디어 아트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작가적 실천은 계속되었고, 이후 1960년대말 이후에는 텔레비전과 움직이는 영상에서 미학적 담론을 제기하는 새로운 아티스트세대의 중심인물이 된다.

한편 뉴욕에서 백남준은 가장 위대한 동료였던 샤로트 무어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백남준 비디오의 시금석이 되었던 작품들과 가장 극적이었던 퍼포먼스에 영감을 주고 격려했으며 공동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백남준은 무어만을 위해 주목할 만한 양의 비디오작품을 제작했고, 그들의 협연은 연기자와 해설자의 개념으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백남준은 교수로서, 그리고 다른 예술가를 지원하는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며, 1977년 비디오 작가 쿠보타 시케코와 결혼하여 일과 인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하게 된다. 그의 친구들인 로리 앤더슨, 요셉 보이스, 데이비드 보위,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과 협연하여 주목할만한 일련의 비디오 테잎과 TV 프로젝트들을 만들었으며, 이과 함께 그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비디오 장치들을 제작하고, 예술적 행위를 재정의 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인다.

이러한 백남준의 시대를 앞선 예술감각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현대 예술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세계적인 예술가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백남준은 세계 각국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1978년 '퐁피두 문화센터'의 전시회를 필두로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파리, 취리히, 바젤 등지에서 세계적인 작품전을 열게 된다.

 

1993년에는 세계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계속적인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독일의 경제월간지 '캐피탈'지에서 해마다 서구미술계 주요 작가들의 활동상황을 집계해 선정하는 'WORLD ARTIST TOP 100'에 매년 최상위권에 선정됨으로써 세계적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된다.

 

 

그럼 이제 백남준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 보도록 하자.

백남준은 ‘경계선에 대한 거부’를 한다. 여러나라, 예술, 학문 그리고 작가, 관객, 비평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벽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친숙하지 않은 분야들의 만남을 통해 생각지 못하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아무런 구속 없이 사상 및 생각의 교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백남준은 교류를 가속화 시키며 정보교환이 더욱 빨라진다는 의미로 시간과 예술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시공간적인 구속을 파기하기 위해 여러대의 티비를 설치한다는 등의 것을 통하여 독립적인 수많은 움직임들을 동시에 평행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건 인간의 신체적 구조 때문에 불가능하다.

또한 백남준은 ‘가볍게 하기의 욕망’에 접근하게 된다. 작품의 이동에 따른 중력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해 주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 전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가변성과 비결정성을 관찰할 수 있다. 커다란 변화가 아닌 단 몇 개의 요소들 만으로도 변화의 크기는 상당히 크게 되며, 원형은 존재할수 없게 된다. 각 작품 하나하나가 변화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럼 이러한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특징의 개괄적 고찰을 실제의 작품에 맞추어 보도록 해보겠다. 이번 전시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작품은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임동식님의 ‘TV는 부화시키는가?’ 라는 작품이였고,다른 하나는 이은하님의 ‘하루종일 TV만 보았다’ 였다. 첫 작품인 ‘TV는 부화시키는가?’는부화기로 비유된 TV위에 각알들이 놓여져 부화의 가능, 불가능을 검증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서 처음에 느낀 것은 작가의 장난기였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할 수도 있는 알들을 TV의 열로써 부화시킨다는 발상을 참신하면서도 어찌 보면 발칙한 생각이다. 하지만 참신성이 상당히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비생명체인 TV가 생명체와 함께 한다는 생각 혹은 생명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한층더 빠를 것이라 생각이 된다.

두 번째 작품인 ‘하루종일 TV만 보았다’는 TV속에 재현된 거실의 의자와 그 모니터에 반사되고 있는 전시장의 의자가 서로 같은 시접으로 놓여 겹쳐 보이게 하는 것으로 둘의 왜곡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TV속의 모습과 밖의 모습의 일치됨을 보여 줌으로써 허구인 안의 모습과 실제인 바깥의 모습의 차이가 발생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 내가 지금 있는 실재의 공간 조차도 이미지화 되고 허구와 함께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작품을 보며 공통적으로 느낀 한가지는 ‘문화지배’라는 느낌이었다. 강한 이미지를 가진 미디어 아트를 통해 문화가 사람을 지배한다는 느낌을 상당히 많이 받게 되었다.

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