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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신앙 – 어떻게 믿을것인가: 예배

은바리라이프 2020. 11. 1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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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baek / April 9, 2020 / Being (Person to be - 성찰/기도하자), Christianity (예수님의 이야기, 나의 믿음 이야기) / 11 comments

블로그를 소폭 바꿔봤다. 본인 소개를 하는 About San 을 만들었으니 처음 오시는 분이나 저를 모르시는 분은 한번씩 참고해봐 주시길. 그리고 블로그 글의 목차를 만들었고 블로그 글과 별개로 그때그때 ‘삶의 의미, 특히 신앙의 영역에서’ 내가 영감을 받는 내용들을 소개하는 뉴스레터도 새로 시작해볼 야심찬 계획이니, 모두들 구독을 부탁드린다.

이번글은 코로나-19와 신앙 – 어떻게 믿을것인가 1편이다. 원래는 코로나-19와 일, 자택근무 이야기를 써볼까 했으나, 워낙에 그런걸 쓰시는 분들은 많이 있고, 또 마침 부활절 주를 맞은것을 기념하여, 신앙 이야기를 먼저 써본다. 모든 산업이 바뀌고 뉴 노멀을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 신앙이라고 절대 예외일수 없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있는 신앙과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두 글에 나눠서 쓸 예정이며, 첫번째 주제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 vertical alignment)이고, 다음글에 소개할 두번째 주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 horizontal alignment)이다. 예수님이 주신 절대계명 두개를 다뤄보고 싶다.

이 글의 주된 독자는 크리스천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분들도 쉽게 읽을수 있게 바꿔보려다가 너무 수정할게 많아서 일단은 나중으로. 크리스천 아닌분이 읽기에는 쉽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나,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도 있을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며 양해말씀을 구한다.


1.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 – 모이지만 말아라

크리스천으로서 좀 죄송한 말이지만, 신천지가 이번 코로나와 함께 한국에서 난리가 나면서 내가 든 첫번째 생각은 이거였다.

안 믿는 사람이 보기엔, 신천지나 기독교인이나 뭐가 그렇게 달라 보일까? 자기들 좋은것 믿는다고 모이는거 굳이 말리지야 않겠는데, 제발 주위와 사회에 폐 끼치는 행동만 안해줬으면. 하나님을 섬기든 이만희를 섬기든 나는 알바 아닌데, 바라는거 없으니 이런 시기에 모여서 제발 전염병 확산시키고 사회에 해악이 되는 꼴불견(?)이나 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 아닐까?”

워낙 수많은 교회의 부정 (성범죄, 탈세 등) 와 극한 정치화가 사회에 많은 피로감과 때로는 혐오감(?)까지 주고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페이스북이나 기타 소셜 미디어에서 교회에 대한 피로감을 토론하는 글들이 종종 나왔다. 아래는 상당한 식견을 가진 지식인이 쓴 글인데, 특히 한국의 개신교가 구원 (reset)이란 상품을 어떻게 팔며 발전해 왔는지, 이를 ‘종교상인’이라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읽기 불편할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고, 충분히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소개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가 의료 이슈로 출발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신천지라는 Cult가 일으키는 반사회적 행동들에 대한 수습 국면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시국에 대형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강행한다니 종교 상인들이 끼치는 폐해가 너무 크다. 인간들이 종교라는 망상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남자 버전으로 추측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종교 문제는 Gender 차이가 큰데, 남자들보다 수십 배는 더 영성적이라는 여성들이 종교를 갖는 과정은 아마 다르지싶다.
1. 남성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세상 일이 내 뜻 같지 않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을 지나면 ‘이생망’ 수준이 되거나 아니더라도 어릴 적 꿈꾸었던 인생은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자각이 온다. 여기에 본인 뿐 아니라 자식의 삶도 별 볼 일 없을 거라는 견적이 나온다. 만약 가정까지 흔들리면 무기력해진 상황을 누군가 해결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2. 이런 사람들에게 cult 들이 접근, 세상이 reset되는 날이 가까워졌음을 말해준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는데 그 때 우리 교주가 너를 도와서 안 믿는 자들보다 좋은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미 자력으로는 뒤집기가 불가능해 보이던 인생이기에 태세 전환이 어렵지 않다. Cult의 논리가 그럴듯해서 믿는 게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이 듣고 싶었던 위안이 되는 이야기라 믿는 것이다.
3. 원래 예수가 2000년 전에 말했던 버전은,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써 reset이 되며 영혼만 평화로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오리지날인 천주교 버전은 이웃에게 베풀고 착하게 살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문제는 죽어서야 이뤄지는 reset 상품이 당장 현실이 불만스러운 그룹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성당을 다니는 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종교 생활에 크게 만족도 불만도 없이 덤덤하게 다닌다는 점이다. 영리한 자들은 젊어서는 성당과 멀리 하고 대충 살다가, (개인적) reset이 가까워지면 혹시 몰라 성당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4. 개신교는 좀 상황이 다르다. Reset 시점에서 좋은 자리를 얻는 방법이 이웃에게 잘 하는 것이라면, 상품 판매자인 목사에게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이웃에게 베풀라는 소리 대신 믿음 증거 명목으로 신(이라고 쓰고 교회, 목사)에게 바치게 만든다. ‘물질의 축복’을 주었으니 감사 헌금을 요구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교회 내의 각종 직분과 교환한다. 죽어야 이뤄지는 Reset만 갖고는 BM이 약하기에, 현세의 발복 (승진, 합격,  병으로부터 회복 등)을 특별기도 형식으로 파는 목사들이 대부분이다.
5. 구원(=reset)을 상품으로 파는 종교 집단은 항상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전도관과 거기에서 갈라진 구원파나 최태민, 신천지 JMS 등이 있었고, 기독교도 돈이 되는 대형교회들은 세습이 일반화될 정도로 컬트화 되었다.
6. 우리나라가 종교 상인들에게 꿀빠는 시장이 된 바탕에는 reset 상품을 찾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다는 게 일차적 이유이다. 또한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에 요행이 작용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대학 진학, 공무원 임용, 승진 등 인생이 시험 한 방의 연속이다. 단판 승부의 살얼음판 사회도 초월적 파워를 상품화한 종교 산업에게 비옥한 토양이다. 물론 독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성인이 되어도 철학이랄게 없고, 암기 위주 교육에 합리적 사고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중요 원인이고.

또, 기독교 내부의 목소리로서 이 글은 한국에 과연 ‘종교는 필요한가’라는 물음이 던져지고 있다며, 교회가 주일성수를 넘어서 생존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이야기한다.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 교회의 생존자체가 위험하다는 이 이야기

과거에는 전염병이 나오면 종교가 흥했다. 불확실한 상황,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본 사람들이 종교로 회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은 목회자나 교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는 것은 딱 한가지이다. “제발 모이지 마라”.

그러면서 필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인간의 능력결핍을 초월적 신의 도움으로 극복하려는 종교로 계속 남아있으려고 한다면, 이 기독교는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종교의 옷을 벗을때에만 생존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독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가?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기독교 이념으로 건국된 미국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찬가지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선 예배를 강행하다가 구속되는 목사도 있었고, 트럼프가 전국가적 기도의 날을 주창한 것에 대해서 시대착오적이고 불쾌하다는 의견도 매우 많다. 모이지만 말아달라고 하는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충분히 이해되고, 충분히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전 사회 구성원이 공공의 선을 위하여 개인의 당장의 유익을 희생하고, 집에 있으며 모이지 않는 이때에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모여서 예배하겠는가 (안그래도 이기적이고 편협하다는 불신의 브랜드가 가득한 상황에). 다행히도 기독교계 내에서도 지각있는 분들의 자성의 메세지들이 나오고 있는것을 본다.

  • 바이러스와 종교: 맹목적 신앙은 위험하다. 특별히 그 맹목성이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신의 생존본능과 이기심을 ‘구원’이라는 말로 포장하게 되면, 그러한 신앙인들의 삶은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코로나 사태의 한복판에서 절감한다. 
  • 코로나 이후 기독교인의 자세를 묻는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제사장으로 그 역할을 해야한다 – 예배뿐 아니라 사회의 필요를 돌아보고 율법을 전파하고 거룩하게 사는 법을 자문해주고 하는.
  • 코로나 19가 일깨워준 예배의 의미: 교회는 우리 사회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한 구성원으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를 다해야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이럴때일수록 더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잘 믿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

2. 온라인에서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예배와 찬양의 모습들

예배란 무엇인가?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묻고 싶은 것은 – 거창한 질문일 수 있지만 – 과연 예배(Worship)란 무엇인가 이다. (교회란 무엇인가도 충분히 의미있는 질문이겠지만, ‘어떻게 믿을것인가’란 질문에 좀더 직접적으로 답하기 위해 일단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창조 목적 자체가 찬송과 예배 (사43:21) 라고 한다. 하나님이 모세라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구할때, 그 이유에 대해 “이들이 애굽땅에서 나와서 나를 예배케 하기 위해 (출 3:12)” 로 말씀하신 바 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온누리교회 이재훈 담임목사님은 3월 마지막주 주의 날을 어떻게 지킬것인가? 라는 설교에서, 예배의 본질,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서 소개하고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요일에 교회 예배당에 모여서 목회자라는 이시대의 전임 영적 제사장에 의해 주관되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고, 사실 이런 예배의 모습은 초대교회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 주장하는 일요일로 대표되는 주의날을 성실하게 지켜야 하며, 이럴때일수록 실제로 한자리에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게 아닐수 없다.

예배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내가 본 가장 명쾌한 정의는 Tim Keller목사님이 이 설교에서 한 정의였다.

예배란 자신의 존재 전부를 동원하여 궁극의 가치를 올리는 행위 – Worship is ascribing ultimate value to something in such a way that engages your entire being

위에 소개한 글에서 필자 신광은 목사님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예배는 ‘테크놀로지의 우상성에 대항하는 예배’, 특성 시간/공간/사람/형식을 넘어서 일상과 세상으로 확대되는 예배. 테크놀로지 그 위에 존재하는 예배.

종교로서의 기독교 예배는 제의(ritual)로 압축된다. 제의는 특정 시간, 특정 장소, 특정 사람, 특정 형식으로 구성된다. 제의는 형식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다. 주일성수도 결국 제의적 문제다. 하지만 제의는 예배 형식이지 본질이 아니다. 예배(worship)의 본질은 가치(worth)를 인정하는 것(ship)이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 가치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새로운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여러 절대 가치들, 곧 돈·권력·명예·성(sex) 등의 우상을 해체를 동반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해방을 초래한다.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가장 큰 우상은 어쩌면 첨단 테크놀로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독교 예배는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테크놀로지의 우상성에 대항하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특정 시간, 특정 공간, 특정 사람, 특정 형식을 넘어선다. 이는 일상과 일터로, 그리고 세상으로 확대될 것이다.

종합해보자. 종교행위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모여서, 특정한 방식 – 제의 – 으로 드려지는)를 뛰어넘는 본질적인 예배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찬송과 존경과 사랑과 감사를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힘과 영과 가슴을 동원하여, 우리의 존재자체를 바쳐서 올려드리는 행위일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우리는 우리 다워지는, 본연의 관계가 회복되는 행위이자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비지니스부터, 인간관계에 이르기 까지 모든것이 바뀌고 있는 이 Cov-19 한가운데에 우리의 예배의 모습또한 예외일수 없을 것이다. 이하에서 온라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예배를 소개한다.

영적 거리좁히기 (Spiritual Nearing) vs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ing)

내가 몸담고 있는 새누리교회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ing) 에 적극 동참하면서, 영적인 거리좁히기 (Spiritual nearing) 움직임을 코로나-19와 함께 시작했다. Kingdom Worship, Kingdom Word, Kingdom Prayer, Kingdom Neighbor, Kingdom Church, Kingdom Culture 라는 크게 여섯가지 축으로, 온라인 예배, 매일 정오에 하는 십이시 기도회, 가정예배를 통해 예배를 세우고 영적으로 더욱 하나가 되자는 움직임이다.

온라인 예배와 Zoom/행아웃을 통한 소그룹 모임은 실제로 생각보다 훨씬 신선하고 은혜로웠다. 찬양이 울려퍼지고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유투브 라이브스트림을채팅창을 쌍방향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수백명이 같이 기도한다는게 묘한 연대감을 만들어줬다. 온라인으로 하는 기도와 소그룹 모임도 한자리에 있는것 못지 않게 한명한명에게 확실한 발언기회를 주며 새로운 방식으로 그룹을 묶어줬다. 그리고 모두가 집에 있으니 전보다 더 모임시간 잡기가 편해졌고, 더 많은 모임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맞게 진화한 예배의 모습중 하나가 아닐까. (참고: 온누리교배의 온라인 순모임 관련 영상)

찬양과 중보기도 (Praise and Intercession)

찬양과 중보 – 예배의 가장 기초 중 기초가 아닐까. 다윗은 왕국을 견고히 하고 나서 4000명의 레위지파에게 찬양과 중보를 통해 기도를 올리게 한다. 제사장으로서 레위지파가 담당했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House of Prayer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직전,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상인들의 가판을 엎으시면서 하신 유명한 말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사56:7) 인용)이 바로 ‘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였다. 모두가 집에 있고 모든게 잠잠해진 이 시기에, 그 어느때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중보가 넘쳐남을 보고 경험한다. 실제로 덴마크의 코펜하겐 대학에서 막 진행된 연구에 의하면, 3월달에 전 세계적으로 24-7 계속된 기도 웹사이트가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관련글)

International Zoom of Prayer (IZOP)

https://www.facebook.com/groups/izopglobal

어쩌다가 알게된 친구들의 초대로 들어가게된 이 Zoom을 통해 찬양하고 중보하는 기도모임은 이제 페이스북 그룹인원만 600명이 넘은, 매일저녁 2시간씩 기도하고 토요일엔 12시간 연속으로 계속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되었다. 위에 인스타그램 포스팅해도 썼듯이, 처음엔 모르는 사람과 서로 통성명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땅을 위해 중보하고 하는게 무슨 은혜가 될까 했는데 왠걸, 한사람 한사람이 어떻게 찬양하고 중보하는지 듣는것 만으로도 은혜가 넘친다. 처음엔 이들의 영이 너무 깨어있고 다들 뜨겁고, 또 영어로 하는 기도모임인지라 위축되거나 스스로를 엄청 의식(self cautious)하기도 했지만 모두들 너무나 부드럽게 젠틀하게 서로를 인바이팅 하고 격려하고 응원해줘서 자연스레 하나될 수 있었다. 마치 이미 따뜻하게 모닥불이 데펴져 있어서 그 근처에만 가도 온기가운데 몸을 녹이고 하나가 되는 것처럼 기도로 데펴진 온라인 모임은 들어가서 잠깐만 함께해도 내 영을 녹이고 나를 따뜻한 그분 앞으로 초대했다.

성령의 인도대로 자유롭게(Free flow)로 누구나 찬양하고 기도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 기도를 처음 경험해본 것은 Francis Chan이 시작한 가정교회 모임 We Are Church 에서 였다. 배경음악도 없이 둥글게 둘러 앉아 자유롭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한명씩 찬양했다가, 기도했다가 – 그게 간구든, 중보든, 회개든, 감사든, 말씀도 낭독하거나 선포했다가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선했고, 그걸 몇번 경험해보면서 성령님을 느끼는것, 선포하는것, 그룹 전체에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상대의 기도를 통해 느끼는것,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면서 그 순간 내 잎술에 할 말을 주시는걸 경험하는것, 이 모든것들을 경험해보는게 너무나 재밌었다. 주로 큰 음악을 배경에 틀고 합심하여 통성기도하는데 익숙한 한국 교회에선 좀처럼 보기힘든 문화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은혜롭게 다가왔다.

위에 내가 속한 Zoom 기도방 외에도, 정말 수많은 온라인 기도회들이 계속되고 있고, 24-7시간 기도들이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마치 구약시대의 성전에서 레위지파들이 계속 끊임없이 성전에서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드린것처럼. 내가 본것만 해도 24-7 Prayer, Burn 24-7 이런것들이 있고, 찾아보면 훨씬 더 많으리라.

중보기도의 방 – House of Prayer에 계속되는 찬양과 기도에 대해서, 같이 기도하는 친구 하나가 계시록 5장에 나온 Harp and Bowl (한국어 번역은 거문고와 대접인데 영어 표현이 훨씬 의미를 잘 전달하는듯, 여기서 Harp는 찬양, Bowl은 기도가 가득 담긴 대접이다) 을 들어 설명했는데 정말 이해가 잘되더라. 깃털처럼 가벼운 영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보하는 찬양과 중보의 결합. 더 궁금하신 분은 이 영어문서를 참고해보시거나, 아래 유투브 영상을 한번 참고해 보시길 (아래 영상은 훨씬 더 찬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뒷부분에 선포되는 기도들이 바로 이 House of Prayer에서 하는 기도와 맥을 같이한다). 한두가지만 이야기하자면

  • 찬양과 중보 (이땅을 향한)하는 시간이며, 개인기도나 직접적인 주위에 대한 기도가 주가 아님
  •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그 마음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보하는 제사장의 마음으로 찬양과 기도함
  • 온라인으로 진행할때는 한명의 찬양리더, 한명의 기도리더가 전체를 리드할 것을 추천

 

오렌지 카운티에서 드려지는 Praise and Prayer 예배

글로벌 연합, 그리고 담대한 선언 (Global Unity, Prophetic declaration)

 

3월달에 진행된 Watchmen에서 한 4시간짜리 글로벌 연합예배 – 한국이 주제이다

또하나 이시기에 알게된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움직임이 글로벌 연합, 그리고 담대한 선언을 중심으로 한 예배이다. 대표적인게 이 Watchmen 인데 3월말에 진행된 4시간짜리 온라인 예배와 기도에 들어갔다가 정말 많이 울고 은혜받고 놀랐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로 한시간에 한 영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는게 감격스러웠고, 수많은 영성가들이 모여서 서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나누고 선포하고, 특히나 기도의 한가운데에 한민족과 한국, 남북이 있었다는게 (이번에는 한국에 초점을 맞춘 편이었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탈북자가 나와서 간증을 했고,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도 기도했고, 한국어로도 찬양이 울려퍼졌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온라인 예배에는 무려 75개국의 사람들이 함께했고, 총 12만개의 서로다른 기기가 접속했다고 (한 기기당 여러명이 예배드릴수 있으니 총 예배 인원은 이를 넘어서는) 한다. 실제 행사는 유투브 라이브 스트림, 페이스북 랑이브, 줌 콜로 동시에 진행되었고, 소수의 모더레이터/리더들은 줌을 통해 서로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듣고 채팅으로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빌 캠벨, 하이디 베이커, 랜디 클라크 등 예언과 성령 사역으로 알려진 많은 사람들이 리드

좀더 찾아보고 알게 되었는데, 여기 속한 상당수 사람들이 소위말한 신사도 운동을 함께하고 있거나, 많은 경우 예언과 다양한 성령 (치유 등) 사역자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계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단시 하거나 상당히 껄끄럽게 보는 것도. 더 알아보고 경험해보고 지켜볼 일이다 (워낙에 나는 직접 경험해봐야 직성에 풀리는지라). 지나치게 예언에 목을 메거나 카리스마틱 하게 가는건 물론 경계해야 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책읽고 말씀듣고 일부는 집회를 통해 만나도 보고 경험해본 바로는 이들의 영이 좀 강하고 확실한 색을 낼 지언정 성령님을 떠나 있다고는 느낄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전세계 각국에서 한시간에 한영으로 서로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하는건 분명 전에 없었던 예배가 아닐까. 감격스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그 예는 끝이 없다 (The list goes on and on)

아래 이 시기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예배와 찬양을 몇가지만 소개한다. 첫번째 영상은 미국의 농구 영웅(?) 스테판 커리가 크리스천 가수 크리스 톰린 (난 크리스 톰린이 스테판 커리보다 좋다 ㅋㅋ)와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만나서 노래하는 영상이다. 크리스톰린 딸 너무 이쁘다.

 

아래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만 있는 이 시기에 이웃들에게 노래를 선물하는 흑인 아저씨의 엄청 소울넘치는 찬양이다. 강추!

 

이런것도 있었다. 리더의 체크인 이라고, 미국 각계각층의 크리스천 리더들이 온라인에서 돌아가며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고 본인의 생각을 나누는 프로그램. 목사, 찬양 사역자, 정부에 일하는 사람, 배우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했다. 직접적인 예배는 아니지만 예배를 독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좋은 예가 아닐까 하여 가져왔다. 한국에도 이런거 있으면 참 좋을텐데 – 그런생각을 해보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글 페이스북 들도 앞다투어 신앙 커뮤니티를 육성하고 돕기 위한 리소스를 내놓고 있다. 잘 찾아보면 활용할 리소스가 무궁무진하다.

정말 그 예는 끝이 없다. 누가 교회가 죽었다고, 예배가 죽었다고 하겠는가. 온라인 뿐 아니라 예배당에 모이지 못할 뿐이지, 드라이브 뜨루 (Drive through) 기도도 있고, 병원 옥상에서 들여지는 기도들도 있고 이 모든것들이 온라인으로 또 다시 퍼지고 하면서 정말로 이시대의 예배와 찬양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3. 우리 각자 앞에 놓인 선택지 – 온전한, 새로운 예배자로 설 것인가

코로나-19는 블랙스완(Black Swan)일까, 뉴노멀(New Normal)일까, 즉 일시 이벤트인가. 구조적 변화인가? 이제는 뉴노멀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지금은 어찌보면 분명 신앙의 위기상황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가 익숙했던 예배는 아예 드릴수 없게된, 그리고 세상이 교회에게 바라는거 없으니 그냥 모이지만 말아달라고 하는, 그런 상황에 우리는 놓여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위기 상황에 유독 강했다. 오히려 모일수 없게되는 상황이 오거나 할때 더욱더 새로운 모습의 교회가, 선교가, 예배가, 부흥이 나타났다. 처음 스데반 집사 순교이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과 터키/그리스로 교회가 흩어지며 퍼진것 부터 하여, 지금 중국의 지하교회의 모습에 이르기 까지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예배를 세우고 예배를 붙잡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전심으로 기뻐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그 예배는 그 어느때 보다도 다채롭고 유기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창조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고 진화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좋은점(?)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수많은 불필요했던 삶의 군더더기 들이 (distraction)이 정리된 점일 것이다. 불필요하게 사무실에서 자리를 지켰던 시간도, 의례적으로 만나던 사람들도, 심지어는 볼거리와 오락거리도 많이 사라졌다 (스포츠도 다 취소됨). 어찌보면 피할구석이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삶의 군더더기가 없어짐을 이야기하는 글

이 시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다 알리.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분의 우리와의 관계 회복을 원하시고, 그 핵심이 “예배”라는 것이다. 성경의 일관된 스토리는 단절된 관계를 회복(Redemption, Restoration, Reconciliation)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예수님을 통한) 라는 것. 그 메세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영화가 있어서 아래 소개한다. Beautiful Boy – 마약중독에 걸린 아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야기다.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아들의 절규를 아버지는 도저히 들어줄수 없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아들을 중독시킨 마약을 너무나 미워하고, 그거에서 아들을 떼어놓기 위해 감금도 시도하고 전화도 도청하고 별의별짓을 다한다.

 

영화 뷰티플 보이 – 마약중독에 걸린 아들을 마약에서 구해내기 위한 아버지의 싸움을 그렸다

나만해도 내 아들 딸이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면, 그게 마약처럼 극한게 아니라, 어떤면에선 애들에게 좋을수 있는 학교생활이나, 친구관계나, 커리어나, 그런거라 할지라도 그 중독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 아이와 나와의 관계를 해치고 아이의 정신상태를 들었다놨다 하고 있다면,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날까 상상이 안된다.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아이를 돌이키고 싶지 않을까? 만약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다면? 예배를 바라시는것은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에, 그리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여 하나되기를 원하시기에. 그분은 자체적으로 온전하고 완전한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더한다기 보다는, 예배를 받고자 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관계의 회복을 원하시는 것.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 – 그게 돈이든, 직업이든, 심지어는 건강이든 – 에 두고 있었다면 우리가 불안할 이유야 얼마든지 많다.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멀쩡했던 직장이 위태하는 상황에서,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든든한 보호막들은 어느순간 종이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앞선 글 – 커리어 그로쓰 해킹 vs 믿음의 서핑에서 썼듯이, 인생을 망망대해에 비유한다면 이 시기는 엄청난 폭풍으로 평소에 믿어왔던 배들도 다 부서지고 사람들이 눈앞에서 물에 빠지는게 보이는 엄청난 혼란과 불안의 시기일수 있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서 이 망망대해 같은 삶을 살아가는가

하지만 우리가 눈을 들어 믿음의 주를 바라보고 (히 12:2) 예배할때, 보이지 않는 끈을 붙잡고 (앞선글의 비유 참고) 믿음의 서핑을 할때, 아래 이용규 선교사님의 글처럼 우리의 불안은 사라지고, 우리의 관계는 더욱 온전해지고, 우리는 그분안에서 쉼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바쁜 삶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간 하루먹을 양식만 매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받아가며,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그날그날 전적으로 의지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앞날은 알수 없지만 그날그날 위를 보고 예배하며 훈련받고 다시금 온전히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전 세계 인류가 집에서, 이 폭풍을 어떻게 지날지 고민하고 갖은 수를 내고 있고, 일부는 넷플릭스와 유투브, 모바일 게임과 심지어는 포르노 등 (코로나로 미국에 자택 거주 (shelter in place) 권고가 떨어진 첫주 전세계 포르노 이용량이 약 11%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으로 불안을 달래고 새로 생긴 시간을 채울때,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 것인가.

모든 군더더기가 사라지고, 주위의 시선도 없이, 나를 보호해주던 음악이나 모든걸 인도해주던 교역자도 옆에 없이, 우리 각자는 집에서 선택에 당면하고 있다. 우리는 온전한 예배자로 설 것인가. 예배가 중심이 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 소위말해 컬츄럴 크리스천으로서 예배보다는 교제가 주가 되거나,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다녔다면, 지금 시기는 너무도 어려울 수 있다. 신앙을 떠나게 되기도 쉬우리라. 이럴때일수록 집중할 때이다. 이때야 말로 기존의 선데이 크리스천에서 벗어나 삶의 현장 한가운데, 우리의 시간과 공간 한가운데서,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이다. 한명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본인이 직접 내려와 대신 희생하기를 주저치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려 한다면 – 우리의 모든 힘과 영과 마음을 다하여 –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다.

쉽지 않을수 있다는것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만해도 하루종일 육아하고 이것저것 일에 몸도 마음도 지치면 그냥 쉬고싶은 마음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을 보고 맛봐야 할 것이며 (taste and see), 그 온전해진 관계안에서 샘솟는 기쁨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the joy of the lord is our strength, 느 8:10).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pleasing aroma) 찬양과 예배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도하고 소망한다.


부록 1 – 이용규 선교사님의 성도를 향한 편지 – 코로나 -19에 부쳐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의 한 복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버드 동문들에게 보내는 총장의 편지를 통해서 총장 내외분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유대인 교수들 다수가 감염되었고 그 결과 학계에도 바이러스가 많이 침투한 것 같습니다. 텍사스 주립대학교 오스틴의 총장 내외도 뉴욕의 동문회에 갔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병원 의사로 근무하는 분을 통해서 뉴욕의 병원은 이미 전시상황을 방불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의약품과 의료 기구가 부족해서 환자를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선별적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며 기도 부탁을 해 왔습니다.

미국이 전체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리버럴 성향을 보였던 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쉽게 연관성을 지어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워싱턴, 뉴욕, 캘리포니아 세 개의 주가 가장 타격을 받고 있는 주로 보입니다.
어쨌든 현대 세계화 조류 가운데 가장 주도적이었고 가장 큰 수혜를 입고 있던 지역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자랑을 무력하게 하는 자연의 힘을 경험합니다. 그 한 복판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비함을 배우게 됩니다.

각자 각자가 다양환 상황과 환경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메시지가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 원하신다고 느껴지는 몇 가지를 나눠봅니다.

첫째, 우리의 불안에 대해서

그 동안 우리를 움직여 왔던 근본적인 추진력이 두려움에서 나왔는지 믿음에서 나왔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황 가운데 우리를 부추기는 것이 혹시 두려움은 아닐지?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양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은 불편해질 환경, 경제적인 손실과 실패 상황, 그리고 죽음 등일 겁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상황은 그저 그것을 좀더 증폭된 형태로 드러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하나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지, 과연 무엇에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을 때 찾아오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평안하고자 노력하거나 평안한 척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적 평화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별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평안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 안전을 추구하기 이전에 의미를 추구하며 보내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얻게될 것에 대한 기대로 이 시간을 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안전을 맡기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하게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실 겁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어 백만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시기와 관련해서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요? 그 때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만난 하나님 그리고 그로 인한 관계 회복의 순간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입니다. 그 때 기억될 일을 위해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시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관계에 대해서

딘 셔먼(Dean Sherman)이라는 와이엠 강사가 있습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책을 써서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교계에 소개한 분입니다. 10년전에도 그 분의 강의를 들었었는데 이번에 그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간에 강의가 더 깊어지고 풍성해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70대 중반의 노신사입니다. 제가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가 60대 중반이었지요. 10년만에 더 깊어진 그 분의 모습은 제게 귀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도 십년 뒤에는 또 저렇게 성장한 모습으로 가고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지요.

그 분이 이번 강의에서 하신 말씀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사탄의 핵심 목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죄를 짓게 했지요.

죄는 바이러스 이상으로 전염성이 강하고 관계를 파괴합니다.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면서 그것이 죄와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죄처럼 전염성이 빠릅니다. 그리고 기존 바이러스와 다르게 무증상 환자를 통해서도 전염시킬 정도로 위장술이 뛰어납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교묘하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탄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사탄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죄는 결국 자연계를 훼손하고 야생동물과 사람의 간격이 가까워지게 합니다. 많은 먹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보신 목적으로 야생동물을 잡아서 그것을 날 것으로 먹는 과정에서 동물의 몸속에서만 기생할 수 있었던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사람에게 침투하여 사람에게 기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탄은 그 상황을 이용해서 사람을 더욱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일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성도를 파멸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충동시켜서 관계를 파괴하게 합니다. 즉 사탄의 영적 전쟁의 핵심목표는 관계를 타고 들어와서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관계를 깨면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영원한 생명도 깨어집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근거이자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름 아닌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사탄은 이 바이러스를 통해서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데 모는 에너지를 집중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 기간 사람들이 서로를 원망하고 비난하게 하게 할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부추길 것이고 이 상황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 노력하게 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이 기간 관계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면 사탄의 간교한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칫 하면 남들에게 적당히 잘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용납과 포용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에 감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분과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분의 사랑의 방식이 나의 방식을 압도하기를 소망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지요. 그렇게 자기중심성이 죽어지고 그 분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넘쳐흐를 때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와 좋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간 동안에 우리의 무너진 부분을 세우고 돌아보게 하시며 우리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초청에 반응하게 된다면 이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관계로 자라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됩니다.

사회적 격리 기간은 다시 말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밀접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싫든 좋든 가족과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가게 됩니다. 이 때 가족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세우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관계 가운데 취약했던 부분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숨기고 싶었던 관계의 한 부분이 드러나고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내면의 이기심과 엮여서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음을 보고 겸허해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땅끝은 자녀들이라는 말을 했는데 수긍이 가는 표현입니다. 안타깝게도 선교사들의 자녀들 중 다수가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밖에서의 삶과 집에서의 삶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역에 쏟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자녀들에게 동일한 에너지를 쏟을 수 없었던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워야 했습니다. 바쁜 스케줄을 유지하다 보니 피곤함 가운데 집에서는 제 원하는 세팅을 만들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새 아이들에게는 제가 가정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녀들의 모습이 제게 상함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번 안식년 기간 그것을 만회해 보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의 요청에 응하기 시작하고 또 인도네시아 사역을 위해서 몇 차례 방문 계획을 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 가운데 그 모든 것을 끊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모든 계획들이 꼭 필요한 것이었니?”

두 주 전에 뉴저지와 뉴욕에 집회 가게 되면서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다녀와야 했습니다. 아내가 DTS 과정 수업을 들어야 해서 제가 아이들을 맡아야 했기에 집회에 아이들을 데려가야 했습니다. 실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틴 에이저인 둘째와 초등학생 셋째 넷째의 필요가 서로 다른 데다가 셋째가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하면서 불안증이 생기고 틱 현상을 겪게 되었지요. 예민하고 자주 폭발하는데 아이를 달래는 것이 역부족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몇 차례 야단친 것으로 인해 아이가 저의 훈계를 기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부담은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이었습니다.
집회 차 가서 집회 준비하는 중에 아이들을 섬겨주고 또 아이들의 다른 필요에 반응해 주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두세 차례 아이들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뚜껑이 열리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네 모습이란다. 그런데 그런 너를 내가 품었고 사랑했단다.”

저는 제 아이조차 품어낼 수 없는 사역자임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제 아이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저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받아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항상 제가 중심에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잘 따라오라고 요구했던 것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들이 제 훈련교관이란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들을 품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이들은 그런 저의 모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수용이 저를 바꾼 것처럼 아이들은 저의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 사랑 가운데 안전함을 느낄 때 아이들은 비로소 제 말을 듣고 태도를 바꾸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아내와 저는 새로운 도전 가운데 직면했습니다. 일 분담의 영역에서 서로 간의 긴장이 생기더군요. 아이들을 직접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순간이란 사실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이 시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 자녀들을 우리 손에 맡겨 주셨습니다. 이런 시간은 우리 인생 가운데 두 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특별한 시간입니다. 아이들의 삶에서 부모와 함께 했던 순간으로 각인되는 특별한 기회이지요. 이 시기는 아이들의 신앙과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대해서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한없이 낮아지는 시간이기도 할 겁니다. 이 시간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고 함께 누리는 시간을 가지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

셋째, 멈춤과 안식에 대해서

미국은 셧다운에서 락다운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외부 출입을 억제시키는 행정명령이 떨어졌지요.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구상의 어느 교회가 성도들에게 이삼주간 모든 사업장의 문을 닫고 들어가서 하나님과 구별된 시간을 가지라고 촉구한들 귀 기울일 성도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미국의 각주의 정부를 사용하셔서 사업장의 문을 닫고 집안에서 격리된 시간을 가지도록 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의 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십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들이 안식일과 희년을 범하고 하나님과의 구별된 시간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 모든 범한 시간을 계산해서 70년간 바벨론 땅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편지해서 말했습니다. 그곳에서 집 사고 결혼하고 아들 딸 키우고 번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유수 기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식과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벌로 주어진 시간이라기 보다는 안식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특별한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수치와 억눌림의 시간이지만 그 내면의 삶에서는 회복과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며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욕구를 따라가느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돌아보지 못했던 것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이 시간을 허락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시간은 의료진들이나 행정책임자들에게는 정신없이 바쁜 시간일 겁니다.
한편 집안에 갇혀 있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영혼과 가족의 영적 그리고 정서적 필요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시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리셋의 시간의 시간이 된다면 이 시기는 우리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저는 두 주라는 격리 시간이 가지는 절묘함에 감탄합니다.
최소 두 주의 격리 기간이 필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했을 때 몸이 그 바이러스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맞는 항체를 만들어서 바이러스를 극복해 내는 시간입니다. 우리 몸은 새로운 도전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작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후 21일째에야 천사가 다니엘에게 찾아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즉시 하나님께 응답되었지만 천사가 다니엘 앞에 설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몸과 생각이 안정을 찾고 정리되기에는 일정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쁜 우리 몸은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며칠 쉬면 몸이 오히려 더 피곤합니다.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어 있으면 그 수치가 낮아질 때 몸에 이상증상을 느끼는 것이지요.
아드레날린이 없는 상태를 비정상 상태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오래 가면 몸이 망가지지요. 이 아드레날린 중독현상이 없어지려면 삼주간의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긴장된 뇌는 하나님의 세미하고 젠틀한 음성에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깊은 쉼 가운데서 우리의 상태가 정상을 회복했을 때 섬세한 그 분의 음성에 반응하게 되지요.

우리 자녀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쉼을 누리고 심심해져야 창조성을 개발할 수 있게 됩니다. 몽골 선교사 자녀였던 악동 뮤지션의 경우도 심심했던 시간을 지나면서 자신의 음악성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흑사병 격리 기간에 세익스피어는 리어왕 희곡을 썼습니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은 전염병 격리 기간에 적분을 완성하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가택연금의 시기 동안 신약의 많은 부분을 씁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쓰지요.

실은 이 기간에 부활 다큐멘터리에 기초한 저의 책쓰기와 편집 그리고 더 내려놓음 번역과 편집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 글쓰기도 시작되었네요.

한편 이 때 우리는 도리어 무료함 때문에 죄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밀렸던 드라마나 영화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면 많은 부분에서 무너짐이 생길 겁니다. 때로는 소셜 미디어에 빠지고 그 결과 눈과 생각의 음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가 아이들이 창의성을 개발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훈련을 받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유혹에 노출되는 시기가 되기도 할 겁니다. 이 시기가 가족관계를 리셋하는 시기가 될 수도 있고 서로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가 재정적인 어려움 가운데 걱정을 더하는 시기가 될 수도 있지만 광야에서 하루의 은혜로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에 달려있다는 것이 믿음의 기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 우리가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오직 그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쌓아두었는가가 우리를 안심시키지 않습니다. 천만 불 자산을 가지고도 오늘을 불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이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오늘의 공급에 감사하며 내일 일은 하나님의 공급에 기대는 삶, 오늘 하나님을 누리며 내일 일해주실 하나님을기대하는 삶, 안식 속에서 내 필요를 채우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을 키우는 삶이 펼쳐지기를 축복합니다.

부록 2 – 송길원목사 – 코로나가 가져다준 선물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되었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한숨이 깊어진다. 비로소 나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한다. 속히 일상의 기적과 함께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는 일상을 달라고.

나는 배웠다.
마스크를 써 본 뒤에야 지난날의 내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고 침묵을 배웠다. 너무나 쉽게 말했다. 너무 쉽게 비판하고 너무도 쉽게 조언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경박했다. 나는 배웠다. ‘살아있는 침묵’을 스스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몰락을 통해서만 ‘죽음으로 침묵’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성직자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 대구로 달려간 신혼 1년 차 간호(천)사가 가슴을 울렸다. 잠들 곳이 없어 장례식장에서 잠든다는 겁 없는 간호(천)사들의 이야기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따뜻한 더치커피를 캔에 담아 전달하는 손길들을 보며 살맛 나는 세상을 느꼈다. 이마에 깊이 팬 고글 자국 위에 밴드를 붙이며 싱긋 웃는 웃음이 희망 백신이었다. 나는 배웠다. 작은 돌쩌귀가 문을 움직이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저들의 살아있는 행동인 것을.

나는 배웠다.
죽음이 영원히 3인칭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내게도 닥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죽음인 것을 배웠다. 인간이 쌓은 천만의 도성도 바벨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미생물의 침투에 너무도 쉽게 쓰러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웠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퍼붓고 살았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를 배웠다.

나는 배웠다.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재정의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될지, 바이러스의 희생양이 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닥친 불행과 시련을 운명이 아닌 삶의 한 조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배웠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북아프리카의 항구 오랑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배척,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지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최대 피해 지역인 대구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었다.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었다.’(미국 ABC 방송 이언 기자) 일본의 대지진 때 일어났던 사재기도 없었다. 오히려 ‘착한 건물주 운동’으로 서로를 감싸 안았다. 외출 자제로 인간 방파제가 되어 대한민국을 지켰다. ‘배려와 존중’으로 빛났다. 나는 위기에서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고 극한 상황에서 ‘도시의 품격’이 확인된다(이동훈)는 것을 배웠다.

나는 배웠다.
어떤 기생충보다 무섭고 무서운 기생충은 ‘대충’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대충이었다. 손 씻기도 대충, 사회적 거리 유지도 대충, 생각도 대충…. 이번 사태에도 너무 안이했다. 이제는 나 스스로 면역주치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환경 문제나 생태계의 파괴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다시 찾아올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환경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나는 확실히 배웠다. 공생과 공존이 상생(相生)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코로나도 아닌 내 마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나는 배워야 한다. 아파도 웃어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게 진정한 인간 승리임을. 나는 기도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이탈리어다. 세기의 천재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비롯 수많은 명작을 남긴다. 많은 세월이 흐른다. 인생의 황혼녘인 87세 때 자신의 스케치북 한쪽에 남긴 글이다. 내 나이 겨우 60을 넘겼다. 그래,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

“안코라 임파로! (Ancora imparo!)”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있다.

부록 3 – 한 카톨릭 신부의 시 – Lockdown

Yes there is fear.
Yes there is isolation.
Yes there is panic buying.
Yes there is sickness.
Yes there is even death.
But,
They say that in Wuhan after so many years of noise
You can hear the birds again.
They say that after just a few weeks of quiet
The sky is no longer thick with fumes
But blue and grey and clear.
They say that in the streets of Assisi
People are singing to each other
across the empty squares,
keeping their windows open
so that those who are alone
may hear the sounds of family around them.
They say that a hotel in the West of Ireland
Is offering free meals and delivery to the housebound.
Today a young woman I know
is busy spreading fliers with her number
through the neighbourhood
So that the elders may have someone to call on.
Today Churches, Synagogues, Mosques and Temples
are preparing to welcome
and shelter the homeless, the sick, the weary
All over the world people are slowing down and reflecting
All over the world people are looking at their neighbours in a new way
All over the world people are waking up to a new reality
To how big we really are.
To how little control we really have.
To what really matters.
To Love.
So we pray and we remember that
Yes there is fear.
But there does not have to be hate.
Yes there is isolation.
But there does not have to be loneliness.
Yes there is panic buying.
But there does not have to be meanness.
Yes there is sickness.
But there does not have to be disease of the soul
Yes there is even death.
But there can always be a rebirth of love.
Wake to the choices you make as to how to live now.
Today, breathe.
Listen, behind the factory noises of your panic
The birds are singing again
The sky is clearing,
Spring is coming,
And we are always encompassed by Love.
Open the windows of your soul
And though you may not be able
to touch across the empty square,
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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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anbaek

늦깍이 크리스천 (follower of Jesus), 우렁각시 민경이 남편, 하루하율하임이 아빠, 둘째 아들, 새누리교회 성도, 한국에서 30년 살고 지금은 실리콘밸리 거주중, 스타트업 업계 종사중. 좋아하는 것 - 부부싸움한것 나누기, 하루하율이민경이랑 놀기, 일벌리기 (바람잡기), 독서, 글쓰기, 운동, 여행 예배/기도/찬양, 그리고 가끔씩 춤추기. 만트라 -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Give the world the best I've 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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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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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YU CHULL HAN

    April 12, 2020 at 7:39 pm

    안녕하세요. zoom 기도방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가보니 아무것도 없다고 나오네요. 혹시 없어진건가요?

    • sanbaek

      April 12, 2020 at 11:32 pm

      아 매일 하지만 24-7은 아니에요 매일매일 여는 시간이 정해져있습니다. 그 zoom facebook group에 조인하면 보실수 있어요. 혹시 또 안되면 알려주세요!

  3. Annie

    April 13, 2020 at 4:32 am

    너무 소중한 글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꽤 오래전부터 백산님 글을 잘 읽어왔었는데, 오늘은 침묵을 깨고 댓글을 남길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여러 의견과 분석들이 많지만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꼭 필요한 생각의 나눔 감사드려요. 글 읽으면서 제자신과 이 시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생각과 글 부탁 드립니다. 건강 잘 지키시기 바라며 곧 모든 것이 치유된 세상에서 밝게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 sanbaek

      May 6, 2020 at 6:11 pm

      네 공감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참 자신감 있게 썼지만 물위를 걷다가 빠진 베드로 처럼 저도 자주 넘어지고 예배에 거하지 못함을 봅니다. 예배드릴수 있는게 예배 받아 주시는게 너무 큰 축복이고 감사임을 느끼네요 다시 모여서 예배드릴날 그리고 모든게 치유된 세상을 소망합니다! ^^

  4. Pingback: 만병의 근원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 권리의식) | San's diary

  5. mrkrong

    May 15, 2020 at 8:23 am

    안녕하세요 형제님. 우연히 블로그를 발견하고 글을 읽게 되었는데 우연은 아닌 것 같아 글을 남겨봅니다!
    글을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서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초면에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형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ㅎ
    저는 부산에서 살고 있는 25살 청년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회를 처음 다녔고 그 이후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대로 산다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2년동안 내 죄조차 이기지 못하는 제 모습, 또 나의 죄때문에 피해를 입는 가족들과 교회 공동체 가족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 그렇지만 용서를 구하지도 못하는 용기 없는 제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절망스러웠지만 이런 나를 용납하고 품어주는 교회 가족들의 사랑과, 진리가 저를 자유케하신다는 예수님 말씀 의지하면서 매일 주님과 교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지내면서 cpa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 블로그도 예전에 오르비에 쓰셨던 사무관 얘기를 보게 되어서 찾게 되었는데 이렇게 귀하신 신앙의 선배님이 계셨다는 사실에 너무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어서 감사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셨는지 그 이야기도 너무 궁금하네요 ㅎㅎ

    한국도 코로나 때문에 잠시 공예배가 중단되면서, 또 수험 공부를 하다보니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에 따라 골방에서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한 것 같아요. 또 다 같이 드리는 공예배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건지, 또 진짜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임에 감사하네요.
    한국은 다행히도 지난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어서 공예배가 재개되었는데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미국은 아직 상황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자리를 계속해서 사모하시는 형제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다가 갑자기 watchmen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랬네요 ㅋㅋㅋ 저희 교회는 약 5년 정도 계속해서 watchmen과 David Demian 목사님(올리신 사진 왼쪽 상단 분)과 함께 여정을 걸어왔는데 그 자리에 같이 계셨었다니 더 반갑네요! 그날 저희 교회 Timothy(김예준)형제도 마음을 나눴었는데 혹시 기억하실진 모르겠네요 ㅋㅋ
    어제도 watchmen group call 있었는데 참여하셨었는지 모르겠네요!

    읽다가 공통점을 발견해서 너무 반가워서 글이 너무 길어진것 같네요.. 정말 큰 용기와 힘 받고 갑니다!!

    • sanbaek

      May 25, 2020 at 6:46 pm

      Reply

      Thank you for the kind words. 저도 용기와 힘을 같이 받네요. 이게 주 안에서 교제하는 형제 자매에게 허락한 축복인듯. 죄가 죄되게 하시는 축복이 있은 후 (로마서 4-7장) 저도 더 좌절했던걸 기억 해요. 전에는 그냥 지나갈수 있었던 제 모습이 더 좌절스럽고. 그게 다 회복의 과정, 성화의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한명의 사람이 온전해 지기 까지 얼마나 많은, 그리고 끊임없는 사랑과 응원과 격려와 용서와 용납이 필요한지 다시 한번 느끼네요. 와치맨 진짜 좋더라고요. What a small world!

  6. Pingback: 첫 뉴스레터: 코로나와 우리의 삶, 배움, 그리고 행동 | San's di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