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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인사로 단정할 수 있나?

은바리라이프 2020. 6. 16. 07:52

 

<특별기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인사로 단정할 수 있나?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성결교단의 사부라고 불리는 이명직 목사가 수록되었다. 분명 이명직 목사는 일제 말기에 한국성결교회의 대표로서 일본의 대동아전쟁 수행에 협조했다. 하지만 이명직 목사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결국 일본의 종교정책 수행에 지대한 장애를 입혔다. 따라서 이명직 목사를 일방적으로 친일인사로 매도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평가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명직 목사와 일본당국의 갈등관계를 역사적으로 밝힘으로서 이명직 목사에 대한 보다 공정한 평가를 시도하려고 한다.

활천의 필화사건:이명직 목사는 [활천]을 통하여 일본의 정책에 반하는 글을 싣고, 이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1923년 3월 [활천]에 실린 다니엘서 강해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고 있고, 이것 때문에 이 부분은 0000으로 처리되었다. 1924년 12월 이명직은 [활천]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강경교회 신사참배 반대사건을 보도하여 일본경찰에 호출당해 고통을 받기도 했다.

1939년 4월부터 이명직은 [활천]에 에스겔서를 강해하였는데, 에스겔서에 나오는 곡과 마곡은 소련이며, 이것은 필시 망한다고 기록하였는데, 총독부는 당시 일본과 소련은 우호국이었으므로 우호국간에 이간질 시킨다고 하여 에스겔서 연재를 중단시켰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명직 목사가 일본당국과 마찰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종교정책과 이명직의 갈등:이명직은 일본의 종교정책에 대해서 상당한 부분 반대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종교정책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 일제 말, 일본은 조선교회를 일본교회의 지배아래 두려고 했다. 그리고 조선성결교회를 일본성(聖)교회의 통치아래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명직 목사는 조선성결교회가 일본성교회와 합동하는 것을 반대했다.

일본교회와의 합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조선의 모든 교파를 합하여 하나의 교단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을 위해서는 교리의 일치가 중요한데, 일본은 기독교의 경전에서 구약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당시 일본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고, 독일은 시온주의를 반대하고 있으며, 구약은 바로 시온주의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직 목사는 구약이 기독교의 경전이며, 이것은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런 이명직 목사의 주장 때문에 조선교회 합동정책은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성결교회의 해산으로 이어졌다.

또한 일제는 조선의 모든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하여 일제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감리교신학교, 경성신학교, 조선신학원(한신대의 전신)을 하나로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명직 목사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결국 신학교 합동은 감리교신학교와 조선신학원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일제의 피해자, 이명직과 성결교회:성결교회와 이명직 목사는 일제의 피해자이다. 1943년 5월 24일 이명직 목사를 비롯한 성결교회의 교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일제히 검거되어 온갖 고문과 박해를 받았으며, 철저한 심문을 당했다. 이들은 주로 이명직 목사가 쓴 글을 근거로 해서 성결교회가 국체명징사상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명직 목사는 같은 해, 12월 28일까지 수감되어서 조사를 받았다. 이명직 목사는 일제의 조사대상이었고, 피해자였다.

일부 학자들이 이명직의 이름으로 된 성결교회의 해산성명서를 근거로 일제에 협력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도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작성하고, 강제로 서명하게 한 것이다.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자진해산인 것이다. 이런 것을 친일의 증거를 삼는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일제와 성결교회는 근본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일본은 천황을 국체로 하고 있으나, 성결교회는 예수를 재림의 왕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일제는 성결교회의 교리가 일본의 국체에 위반된다고 생각하고, 성결교회를 해산시켰던 것이다.

역사평가는 공정해야 한다:성결교회는 일제의 종교탄압의 대상이었고, 이명직은 바로 그 성결교회의 대표자였다. 이같은 인물을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기술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물론 이명직 목사가 일제에게 협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명직 목사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반대한 부분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이명직 목사를 일방적으로 친일인사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
참고:여기에 대한 자세한 근거는 신문사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