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칼럼·논문·서적/기독칼럼

“이명직 목사는 ‘친일파’ 아닌 일제의 ‘피해자’”

은바리라이프 2020. 6. 16. 07:50

“이명직 목사는 ‘친일파’ 아닌 일제의 ‘피해자’”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입력 : 2009.11.23 06:52

박명수 교수, 일방적 매도 지적하고 공정한 평가 요청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는 ‘성결교단의 사부’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가 최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된 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이명직 목사를 친일인사로 매도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평가”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명직 목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한국성결신문(www.kehcnews.co.kr)에 특별기고한 글에서 이명직 목사와 일본 당국의 갈등관계를 역사적으로 밝혔다.

박명수 교수는 “역사의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며 “성결교회는 일제 종교탄압의 대상이었고, 이명직은 바로 그 성결교회의 대표자였는데도 이같은 인물을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기술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물론 이명직 목사가 일제에 협력한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일제 종교정책에 반대한 부분도 분명 존재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친일 인사로 단정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밝혔다.

<활천>에서의 필화 사건

박 교수는 교단 잡지인 <활천>의 필화사건부터 언급했다. 이명직 목사는 <활천>에 일본의 정책에 반하는 글을 싣고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1923년 3월 다니엘서 강해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했고, 이 부분은 결국 OOOO으로 처리됐다. 1924년 12월호에는 주간으로 있으면서 강경교회 신사참배 사건을 보도하다 일본 경찰에 호출당해 고통받기도 했다.

 

이 목사는 1934년 4월부터 <활천>에 에스겔서를 강해했는데, 에스겔서에 나오는 곡과 마곡은 소련이며 이는 필시 망한다고 기록했다. 총독부는 이에 대해 당시 우호국이었던 일본과 소련 사이를 이간질시킨다는 명목으로 연재를 중단시켰다. 박 교수는 “우리는 여기서 이명직 목사가 일본 당국과 마찰이 다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종교정책 놓고 갈등

이명직 목사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상당 부분 반대했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이는 궁극적으로 일제 종교 정책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 말기 일본 교회는 조선 교회를 지배하려 했고, 특히 조선성결교회는 일본성(聖)교회 통치 아래 두려 했다. 이때 이 목사는 조선성결교회와 일본성교회의 합동을 반대해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일제는 조선교회의 모든 교파를 합해 하나의 교단으로 만들고자 했다. 일제는 ‘하나의 교단’을 위해 교리를 일치시키고자 기독교 경전에서 구약을 제거하려 했다. 일제는 당시 독일과 동맹 관계였고, 독일이 반대한 시온주의의 온상이었던 구약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이 목사는 이때도 “구약은 기독교의 경전이며, 이는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해 조선교회 합동정책 자체가 실패하고 말았고, 이 사건으로 결국 조선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해 해체의 비운을 맞았다.

일제는 조선의 모든 신학교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지만, 이 목사는 이마저도 막아냈다. 당시 감리교신학교와 경성신학교(서울신대의 전신), 조선신학원(한신대의 전신) 등 세 학교를 하나로 만들고자 했지만, 이 목사의 거부로 감리교신학교와 조선신학원만 합동했다.

이명직 목사는 일제의 피해자일 뿐

이명직 목사는 일제 말기인 1943년 5월 24일 성결교회 여러 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검거돼 온갖 고문과 박해를 받고 심문을 당했다. 일제는 이 목사가 썼던 글들을 근거로 성결교회가 국체 명징사상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으며, 이 목사는 12월 28일까지 수감돼 조사를 받았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이처럼 이명직 목사는 일제 조사 대상이었고, 피해자였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일부 학자들이 이명직 목사 이름으로 된 성결교회 해산성명서를 근거로 일제에 협력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뤄졌고, 그것도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작성하고 강제로 서명하게 한 것”이라며 “강요에 의해 이뤄진 자진해산이었음에도 이를 친일 증거로 삼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일제와 성결교회는 근본적으로 대립될 수 밖에 없었던 관계”라며 “이는 일제가 천황을 국체로 삼았지만 성결교회는 예수를 재림의 왕으로 믿었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일제는 성결교회의 교리가 국체에 위반된다며 해산시킨 것”이라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