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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3.0

은바리라이프 2020. 5. 1. 16:47

교회 3.0

 

 

머리말

저자 닐 콜은 미국 도시의 젊은이들을 겨냥한 어웨이커닝 교회와 교회 배가 협회설립자다. 교회 배가 협회는 9년동안 40개국 45개 이상의 도시에서 수천개의 교회를 세웠다.

저자는 수 천년동안 인간은 기존의 지식체계를 토대로 삼아 살아왔는데, 이 책이 제시하는 새로운 발상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성경이나 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의 모습을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버전에 비유하며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 하라고 말한다.

교회 1.0 : 1세기 교회는 교회1.0이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1.0, 안디옥교회 1.1, 갈라디아교회들 1.2, 고린도교회 1.3, 에베소교회 1.4. 초대교회다. 313년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하면서, 기독교는 주류로 올라서면서 교회 2.0이 탄생했다.

교회 2.0 :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조직화', '제도화'된 교회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조직 체계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2.1에서 2.2 버전 정도로의 미미한 변화에 불과했다.

교회 3,0 : 건물이나 숫자와 관계없는 교회이다. 그저 성도들의 모임. 그리고 유기체적 교회를 3.0 이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고본질이 아니면 무엇이든 '해체할 수 있는 유기적 교회다. 교회 3.0은 모든 면에서 교회 시스템을 향상시키고, 초대교회를 능가할 수 있다. 이 시대 교회는 단순하고, 재생력 강하고, 관계 중심적인 교회로 업그레이드되야 한다.

 

PART 1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는 잠자고 있다

1장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1세기에는 그리스어가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공영어였다. 오늘날 세계 공용어는 영어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여러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또 일찍이 로마의 도로망은 세계 각국으로 이어졌다. 바울과 바나바, 베드로, 요한은 그 길을 따라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공학을 비롯해 원거리통신망 등 눈부신 기술 발전이 세계를 대폭 축소해 놓았다. 기술 문명의 발전은 인류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을 이루었다. 이제는 좋은 발상만 있다면 누구든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지역 교회에서 지구촌 교회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핵심은 물론이고, 구원받고 성화되는 과정 모두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와 변화하는 세상의 관전에서 볼 때 우리 안에 펼쳐진 기회를 붙잡기 위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21세기는 1세기의 자매 시대처럼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1세기에 하나님 나라가 빠르게 확장된 것처럼, 21세기는 그와 같은 위대한 복음 전파의 기회가 있다.

2장 세상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종의 철학체계라기보다는 모더니즘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며,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 반응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논리적인 사상이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이며,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가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실패한 모더니즘의 해결책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작용에도 아주 유용한 것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원적 가치관을 파헤치면 복음전파의 기폭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핵심적 가치관이기에 당연히 다른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탁월함보다 진정성을 더 가치있게 여긴다. 탁월함이 진정이 아닐 수도 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이 더 중요한 가치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큰 칭찬은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가장 큰 모욕은 가식적이라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서 현실적 만족감을 얻지 못한좌절감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무엇인가?‘ 보다는 '무엇이 아닌가?’에 더 가까운 사상이다. 발상 자체가 무엇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첫째,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서는 일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둘째, 탁월함보다는 진정성을 더 가치있게 여긴다. 날조된 진정성의 어둠에서 하나님 나라는 밝은 빛을 발한다. 셋째, 논리보다는 체험을 중시한다. 모더니즘 교회들이 믿음, 도덕적 생활, 친교 순이었다면, 이제는 친교, 도덕적 생활, 믿음 순이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똑 부러지는 해답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더 매력적으로 여긴다. 새로운 시대의 교회는 신비와 역설과 시()를 담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야 한다. 다섯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적극 수용한다. 문화의 다양성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교회가 매력적이다. 여섯째, 목적지보다는 여정을 중시한다. 구원은 과정이다.

 

PART 2 유기적 교회의 구조적 문제

3장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모으는 교회의 대안은 보내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곳이 아니다 사명을 수행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그 사명에 동참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사명은 교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Missio Dei)에 참여할 뿐이다. 보내는 교회는 교회 성장에서 나온 신조어가 아니다. 보내는 교회는 사회정의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보내는 교회의 신학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기에 모든 제자가 삶의 전 명역에서 그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교회가 예수님에 의해일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일한다. 교인 수나 건물 크기가 아니라, 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임재가 얼마나 드러나는지, 세상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미지고 있는지에 따라 교회를 평가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힐씬 더 강력하고 역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장 교회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교회 배가 운동의 유전자(DNA)란 하나님의 진리(Divine truth), 관계 강화(Nurturing relationships), 전도 사명(Apostolic mission)을 말한다. 이 말은 신학자, , 학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씨앗은 은사와 재능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시작된다. 교회 배가의 추진력은 하나님 나라 자체에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 확장이 우리 각자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방법을 고민할 게 아니라 그 일을 못하게 막는 장애 요소를 치워 버려야 한다.

교회 배가와 증식을 방해하는 세 가지 일관된 장애물이 있다. 건물, 예산, 유명 목사다. 건물은 비용보다도, 사람들이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궁극적으로 건물에 헌신하게 한다는 것이 최대 단점이다. 또 교회 핵심 지도자들이 모든 일을 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배가가 어려워진다. 걸출한 목회자에게 의존하면 평신도는 무력하게 되고, 요직에 있는 소수 지도자만 칭송을 받는다. 배가운동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목표와 비전을 발견하며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돌는 역할만 해야 한다

5장 교회 형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1)

초대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단일문화권의 대형 지역교회를 보여준다. 이 교회가 보여준 능력과 사랑, 부홍은 전설적이었지만, 교회는 정체되다가 쇠퇴했다. 너무 일찍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서. 상하구조의 지도자 계층이 생긴 게 원인이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다문화 회중 교회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선교에 주력하는 교회의 다룬 본보기로 다문화와 선교 중심의 지역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한편 로마교회는 대도시에 세운 유기적 교회의 네트워크이다. 에베소 교회는 신약의 가장 훌륭한 형태의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단기간에 한 지역을 복음화하는 평신도 중심의 배가운동이 이루어졌다. 이 교회는 골로새나 라오디게아와 같은 네트워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이상적 교회는 안디옥 교회이다. 현재 서양 교회들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고회 안에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를 바꾸는 출발점은 구조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유전자를 주입한 건강하고 헌신된 제자들을 세우는 일이다.

6장 교회 형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2)

교회 형태의 두 번째 대안은 중앙집권화 대신 분권화된 교회이다. 유기적 가정교회와 셀 교회는 다르다. 셀 교회는 문어처럼 환경에 민감해서 기독교에 우호적인 환경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반면 유기적 가정교회는 불가사리처럼 적대적인 환경에서 오히려 더 번성한다. 불가사리는 지도자 없는 조직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분권화된 교회 형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통제력 부족으로 일어나는 지도력과 가르침의 상실과 규범의 약화를 우려한다. 그래서 책임의식을 분명히 심어주는 신앙의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 짐을 나눠질 때 더 책임의식이 강화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체계는 한 사람의 감시자 대신 서로가 서로를 점검한다. 철저하고 정직하게 각자의 삶을 나누는 것이 한 사람, 혹은 한 팀이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제제보다 더 효과적이다.

7장 대규모 집회도 여는가?

집단의 크기에 따라 참여도의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도 집단의 크기를 언급했다.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집단의 종류를 알아본다.

1. 생명의 기본단위 2~3: 성경에서는 둘이나 셋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효과적인 친교와 사역을 위한 숫자는 2~3명으로 융통성이 좋고 의사소통이 잘 된다.

2. 지도자팀 4~7: 이 집단은 다른 집단을 도와주는 보조기능에 적합하다.

3. 가족집단 12~15: 이 정도의 집단은 여러 가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성을 갖추었다는 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는 장점이 있다.

4. 훈련집단 25~80: 크리스토퍼 앨런은 구성원들이 독창적이고 전문적으로 과업을 해낼 수 있는 최적의 크기는 25 80명이라고 본다.

5. 관계네트워크 100~150: 집단이 무언가를 하는 데 필요한 최대 단위는 1.50으로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150이라는 숫자를 한 인간이 진정한 인간관계, 즉 상대가 누구이며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 정도보다 더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의 숫자로 본다.

6. 일시적 대중집회 200-500: 150명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두세 개가 모이면 되는 집단 크기다. 이런 집단은 소수의 적극적인 사람들이 다수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들을 지휘하고 일방 적 의사 전달만 이뤄진다. 간혈적인 대규모 모임은 매우 신나고 도움이 되지만 대규모 집단이 사회를 바꾼 전례가 없다. 진정한 사회 변혁은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소규모 집단에서 이루어진다.

7. 수많은 군중 : 집단 크기가 500명 이상이면 군중이 된다. 소규모 집단이 각종 모임이나 행사를 할 떼 이 규모의 집단이 형성된다.

 

PART 3 유기적 교회의 실제적 문제

8장 전도는 어떻게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수는 100년경 25000명 정도였고, 310년경에는 2000만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강력했던 배가운동은 단순한 개종의 차원이 아니라 삶을 바꾸어 헌신적인 제자, 복음의 사도로 거듭나게 했다.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도에 천재적이므로 얼마든지 복음화 운동을 타오르게 할 수 있다. 전도의 천재성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사도는 복음화 운동의 촉매다. 유능한 사도의 영향력은 사도가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그 영향력이 증가하는 일에 힘쓸 때 복음화 운동은 더 뜨겁게 타오른다.

전도 운동, 복음화 운동을 촉진하는 좋은 촉매는 단순하다. 그러므로 전도사명은 단순하고 의미심장할수록 좋다. 좋은 촉매는 작고 소박하다. 그러므로 전도는 소그룹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좋은 촉매는 놀랍고 신기하며, 의미심장하다. 그 기반은 단 하나,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좋은 촉매는 '달라붙는 특징이 있다. 전도는 전염력이 있고 확산되는 특장이 있다. 좋은 촉매는 관계로 퍼져 나간다. 그러므로 관계를 중심으로 전도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9장 세례와 성찬식은 어떻게 하는가?

세례는 예수님의 전도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단순한 과정, 소박한 형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와 죽음과 부활이라는 놀라움과 의미있는 기반, 세례자의 기억과 인생에 달라붙는 힘, 퍼지는 능력까지 잘 보여준다. 저자는 신앙을 고백하는 즉시 세레를 베풀 것과 평신도의 세례권을 인정한다. 성찬은 복음의 핵심을 상징하는 의식이며 날마다 대하는 평범한 식사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찬 의식을 자주 행하도록 할 것을 권하고 역시 평신도

에 의한 성찬 집행을 적극 긍정한다.

10장 주일학교는 어떻게 하는가?

교실보다는 가정으로 교육의 장을 옮겨야 한다. 전통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은 체험보다는 지식을 얻는 것에 조점에 맞춰져 있다. 좋은 성품과 실제적 그리스도인의 삶은 머리로도 배우지만, 대개는 생활에서 체험으로 배운다. 저자는 아이들을 기독교의 안전지대에 살도록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험과 희생을 각오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진리대로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진국을 맛보게 했다. 그때 아이들은 복음의 능력을 머리로 믿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확신했다.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변화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11장 이단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현대사회에서 이단은 암처럼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이단을 100% 제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예수님도 항상 거짓교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단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대상에 교육을 많이 받은 지도자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교인석에 교육을 많이 받은 교인들을 앉히는 것이다. 어떤 시대든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공격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자유롭게 믿는 것이 옳은 것을 억지로 믿는 것보다 낫다. 물론 옳은 교리를 자유롭게 믿는 것이 최상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단이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남긴다는 점이다. 거짓 교리는 참된 교리에 도움이 된다. 예방주사처럼 거짓 교리는 오히려. 진리를 더 명확하게 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혹독한 비난이나 따돌림을 당할 걱정 없이 자유롭게 교리를 토론할 수 있는 건전한 분위기다.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은 올바른 교리, 바른 교훈을 따르라고 충고했다.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열정적인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이 해석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감시할 필요도 없다. 성경을 성도의 손에 맡기고 유식한 성도를 만드는 것이 이단을 막는 최선책이다. 성령께서 평생토록 충실한 안내인이 돼 주실 것이다.

12장 재정은 어떻게 하는가?

목사들은 헌금을 강요하는 사람으로 악명 높으며,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교회는 아브라함 사례를 근거로 이야기한다. 말라기서를 읽어 주면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좋게 말하면 한심한 해석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해석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오해하게 한다.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한 이유는 한 가지다. 목사와 교육자를 고용하고 교회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교회는 십일조 헌금 없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교회 3.0은 초대교회와 비슷해서 건물이나 전임사역자 의존하지 않는다. 필요한 재정이 많지 않으니 살아남는데도 문제가 없고 성장하기도 쉽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헌금 하라고 하지 않았고 교회가 성도를 위해 헌금을 거두라고 말했다. 헌금을 받은 곳은 교회가 아니라 기근으로 고생하던 예루살렘의 성도들이었다. 신약에서 십일조가 거론되지 않은 이유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수입이 10분의 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 생애를 원하신다.

 

맺음말

그럼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주일학교 교리의 순수성, 십일조와 헌금, 성찬과 세례 등을 바라보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성경에서 들려오는 참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라. 신약을 읽고 나서 2.0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면 분명 일치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예배하고, 듣고, 상기하면서 씨름해 보라.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세대다. 어떤 정보든 거의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는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사실상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자를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능력을 전해 주어야 한다. 결국 해결책은 제자 삼는 일에서 시작한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게 하신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옮겨 가는 과정, 즉 회개가 필요하다. 아직도 당신이 2.0 교회에 다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것을 하든지 다. 기도하면서 여러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겸허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다.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해 보라. 결정에 대한 결과를 예상하고 최대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보내라. 획기적인 변화를 주기에 불가능한 위치에 처해있다면, 먼저 작은 변화부터 모색해 보라. 우리는 좋은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가장 좋은 것을 놓치고 있다. 예전 것을 계속해도 좋겠지만, 이제는 새로운 시스템을 내려받아서 가장 좋은 것을 누려보라. 당신이 만일 얼리 어답터라면 예전 교회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교회 3.0 시대가 도래했다. 이미 교회 3.0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당신은 어딘가에 들어가 숨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위력적인 역사에 동참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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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들

이제까지 이 책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닌 장점들은 무엇일까?

첫째, 포스트 모더 니즘 시대가 교회에 던져주는 도전을 잘 읽어내고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위에서 책 내용 요약 부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지자 나름대로 분석한 부분을 길게 언급한 까닭은 이 책에서 저자의 탁월함을 가장 강하게 느낀 부분이기 때문이나. 지금까시 포스트 모더니즘을 언급했던 신앙 서적 혹은 신학서적들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매우 부정적인 입장에서 본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데이비드 웰스의 일련의 실종 시리즈에서 웰스는 기독교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웰스의 말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성경을 통해 접한 일세기 교회의 상황과 현재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상황과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나면 현재의 상황이 반드시 선교에 부정적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나의 느낌과 생각과 공감대를 이루는 닐 콜의 견해를 접하고 나니 참 반갑다. 더구나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안티 테제로서만 존재한다는 설명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렌즈를 제공해 주었다. 포스트 모더 니즘에 저항하려고 하기보다늘 오혜려 포스트 모더니즘 현상을 선교의 기회이자 장으로 흡수하려고 하는 저자의 방향성은 신선하면서도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여겨졌다.

둘째는 30 교회의 모델을 구제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새로운 교회 운동에 관한 주장들을 적지 않게 접해 보았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1 세기 교회의 모습에 집중하였다. 기독교가 공인 받기 이전 교회가 어떻게 로마 그리스 세계 가운데서 폭발적인 선교를 경험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면서 이 같은 1세기 교회 모습을 현대에 다시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내가 몇 번 접한 적이 있는 프랭크 바이올라의 책이 그러했고, 로버트 뱅크스와 같은 신약학사의 책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가지는 한계는 여기까지였

. 분명 1세기와 21세기의 상황은 유사성이 있으면서 다른 점도 많이 있다. 시간의 흐름을 과거로 돌릴 수는 없다.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방향과 천략이 나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새로운 교회 모델을 제시하는 주장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체성을 상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정 교회, 유기적 교회 등등 다 좋은데 구체적으로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스케치 수준으로 넘어가기 일수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구체적이다. 이런 부부분은 특히 part 3에서 두드러진다 거기에서 저자는 교회 교육, 성례, 전도, 헌금 등 매우 실제적인 분야에 있어서 3.0 교회의 구체적인 사례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저자가 지금까지 교회 배가 협회나 본인이 세운 어웨이크닝 교회의 목화 경험을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와 같은 주창들이 검증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만약 저자의 교회 3.0프로젝트에 공감하고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고자 하는 교회 개척자가 있다면 이 책은 여러 모로 실전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셋째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자세로 변화를 주문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기성 교회, 조직화된 교회와는 다른 교회 모델을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들 가운데는 스스로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셀 교회 운동이 대표적이 아닐까 한다. 지구촌 교회를 비롯하여 이름은 달리하지만 순 모임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등등이 있었다. 이런 교회들에서 나름대로 기성 교회와는 다른 변화된 모습을 시도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은 변화를 하되 기성 교회의 틀을 전면적으로 쇄신하려는 지점에까지 나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기성' 교회의 틀 안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게 되는 때가 많았다. 사랑의 교회 순장들이 결국 새 담임 목사의 전횡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요즘 특히 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니 저자 닐 콜은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222.5, 심지어 2.9에도 만족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닐 콜은 3.0 교회를 열기를 원한다. 교회의 목적과 형태와 사역 모든 면에서 일관된 원리를 가지 고 갱신된 교회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쳐 나가길 원한다. 이런 점에서 2.0 교회를 적당히 보수하려고 했던 다른 운동과 차별성을 보인타. 그런 운동들이 결국에는 2.0 교회 조직 내로 흡수되어 존재감이 미미해지면서 사라졌던 것과는 달리 닐 콜의 유기적 교회 운동은 실제 현상 속에서도 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 때문에 기성 교회 관계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써야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평판에 개의치 않고 똑심 있게 자신의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그 원동력은 저자가 가진 만만치 않은 성경 이해와 신학적 사고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아쉬운 점들

그러나 동시에 저자의 견해에 아쉬운 부분,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첫째는 지나치게 과격하게 나간 점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의 견해들에는 공감 가는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에서는 오버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자면 세례 부분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그 즉시 세례를 베풀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세례 사건이 주로 이렇게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사도 행전에서 세례를 베푼 사건들은 한 사람이 거듭남의 표지가 분명할 때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상황에서 즉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

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질하지 않고 기듭남의 표지도 없이 세례를 베풀게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이미 군대에서 받는 세례가 이를 잘 증병하고 있다. 내 동생은 전혀 내적 신앙 고백이 없이 다만 세레 후 얻어 먹을 식사를 위해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런 종류의 세례를 남발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엄정한 검증 과정을 거쳐 세례를 시행했을 것이다. 알렌 크라이디의 회심의 변질이라는 책에 보면 이 내용이 잘 나와 있다. 크라이더 역시 유기적 교회를 지향하는 인물이지만 아마 그라면 세례의 즉각적인 시행에는 반대를 했을 것이다. 세례자

교육을 단지 교역자의 권위를 세우기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라고 본다. 세례에 앞서 믿음의 본질과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교리 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오히려 유기적 교회를 지항하는 사람들은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야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식이 바르게 구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의 문제 외에도 교회 교육의 장을 주일 학교에서 가정으로 이동시키자는 주장 역시 무조건 오케이 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상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가정에서 자녀 신앙

교육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부모가 비신자인 경우에 전도 받아 온 청소년이 있다면 그는 누구에게서 양육을 받아야 하는가? 물론 현재보다 부모의 역할을 강조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에게 모든 책임을 맡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체적으로 구체적인 적용 부분에 들어가서는 약간은 이상주의로 흘러간 느낌이 든다. 또는 기존 20 교회와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기존 교회 모델에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다가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물론 저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앞으로 유기적 교회 운농의 결과를 좀 더 두고 보면서 검증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둘째는 다른 유사한 흐름과 운동과의 연계성을 밝히지 않았다는 잠이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유기적 교회 운동은 저자 혼자만 펼치고 있는 운동이 이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프랭크 바이올라 로버트 뱅크스 등도 있고 그외에도 여기 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제기되고 있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서는 한스 큉의 교회론까지도 내용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도 가정 교회 운동이 활발하게 펼처지고 있으며 신대원장이시자 신약학자이신 홍인규 교수님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고 계시다.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동세 다발적으로 펼쳐 지고 있는 다양한 흐름

들 속에는 분명 저자 닐 콜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 3.0 모델과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흐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거의 이런 흐름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프램크 바이올라를 잠시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마치 닐 콜 자신의 독보적인 운동인양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이다. 책 뒤에 있는 미주에 나타난 참고 문헌들을 보면 다른 신학자 혹은 목회자들의 책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기적 교회 운동의 흐름을 함께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소개하면서 자신과의 일치점 혹은 상이점을 들려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차피 운동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함께 하고 연합할 수 있는 사랑들과 함께 이 운동을 펼쳐 나간다면 더 큰 힘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적용점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앞으로 섬기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첫째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면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동력으로 삼은 교회의 모습이다. 모더니즘 그 자체가 기독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모더 니즘과 기독교를 혼돈한다.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면 큰일날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일전에 박찬호 교수님의 수업 시간에도 유사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포스트 모더니즘 속에 나타난 이 시대 사람들의 깊은 갈망을 성경적 교회의 모습과 접목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새로운 목회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예배의 모

습에서도, 설교의 내용에서도, 교회의 형태와 운영에 있어서도, 시대와 변화의 흐름을 수용한 새로운 모습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교회의 본질을 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이다.

둘째는 교회 사이즈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퀴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그 동안 무조건 많이 오면 좋다. 다 오면 좋다는 식의 단순한 샘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최적의 사이즈가 있다는 말이 깨우침을 주었다. 특히 저자 날 콜은 두 세 명으로 된 그룹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모든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정 교회 운동에서는 12명 정도로 된 가족 같은 공동제를 중요시한다. 물론 이 같은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일 대 일 확은 일 대 이 정도로 되면 아주 작은 그룹이야말로 제자 훈련을 하기에 최적의 숫자가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까지 신대원에 재학하면서 이런 그룹을 매 학기마다 6~ 7 개 정도 이끌어 왔다. 매주 한 번씩 만나서 성경을 공부하고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몸과 마음이 고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니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제대로 목회 경험을 쌓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삼년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서 변화하는 삶의 모습을 직접 확힌할 수 있었다. 교만하기 인은 많이 낮아지고 겸손해 졌다. 약속을 자주 어겨 힘들게 했던 샤람은 이제 좀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12명의 가족 같은 공동체 혹은 70-30명 되는 공동제를 섬겨 본 적은 없다. 이 책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해서 각각 크기가 다른 공동체를 어떻게 섬겨야 할 지 힌트를 얻고 졸업 후 실제 목회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셋째, 조금은 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자극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꿈꾸던 교회가 그렇게 큰 방향에서 볼 때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기성 교회와 공동체와는 좀 다른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방향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날 콜의 책을 통해 이미 나보다 앞서 이런 고민을 했고 같은 꿈을 꾸었고 그것을 또한 실천에 옮겨 본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2.0 교회의 위기 징후들은 곳곳에서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위기 징후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한게 하신 까닭은 그런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교회를 만들이 보라는 소명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분권화된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교회 그런 성도들을 낳고 키우는 목회자 건물에 매이지 않는 교회, 고비용 구조를 탈피한 교회, 모든 성도 간에 친 실된 관계가 살아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내가 꿈꾸는 교회이다. 그런 교회를 꿈꾸며 나아가는 과정 속에 이 책 한 권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