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선교사/성지 자료

가이샤라 빌립보

은바리라이프 2018. 3. 21. 08:46

가이샤라 빌립보



https://books.google.co.kr/books?id=iFDTDQAAQBAJ&pg=PA65&lpg=PA65&dq=%EB%84%A4%EB%A1%9C%EB%8B%88%EC%95%84%EC%8A%A4&source=bl&ots=j26ThckXaQ&sig=q4sAcIp7v5CABnzg57ar_MH7lOE&hl=ko&sa=X&ved=0ahUKEwjbhOK4-fvZAhVKmJQKHdooAlUQ6AEIKjAA#v=onepage&q=%EB%84%A4%EB%A1%9C%EB%8B%88%EC%95%84%EC%8A%A4&f=false


갈릴리호수에서 동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진 언덕을 오르면 골란고원이 펼쳐진다.구약시대 바산 골란성으로 불린 이곳은 남쪽의 완만한 구릉지대와 북쪽의 푸른 삼림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과 시리아간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헬몬산에서 갈릴리호수 남단까지 이어진 골란고원은 남북의 길이가 약 71㎞,동서의 최대 폭이 약 43㎞,전체면적이 1천1백50㎢나 된다.갈릴리호수의 북단에서 골란고원으로 올라가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며 고원의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는 일품이다.뜨거운 태양 아래 적색토에 뿌리를 내린 건초가 끝없이 펼쳐진다.

골란고원은 1894년 프랑스의 유대계 금융가인 에드몽 드 로트실 남작이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땅을 사들이면서 서방의 관심이 집중됐다.이후 미국 캐나다 유럽의 여러 단체에서 같은 목적으로 땅을 사들여 갈릴리호수 바로 동쪽 베네예후다에서 식민지화를 시도했으나 오스만 터어키의 방해로 좌절됐다.

1차세계대전후 이 곳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게 됐으며 1941년 시리아로 이양됐다.시리아는 갈릴리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요단강의 발원지 부근인 이곳을 요새화했다.그리고 요새화에 그치지 않고 갈릴리호수의 물을 말리는 수로 변경작업을 시도했다.이 작업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장악하고 있는 한 자신들의 생존은 시리아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1967년 6일전쟁때 골란고원의 상당부분을 점령했다.이스라엘은 1970년대 후반까지 30여군데에 유대인정착촌을 만들었고 1981년 이스라엘영토로 합병했다.

유엔군은 이스라엘_시리아와 국경지대에 비무장지대를 만들어 전쟁을 억제하고 있으나 시리아의 골란고원 반환요구로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다.

취재진이 찾은 골란고원은 뜨거운 태양을 받아 이글거렸다.뜨거운 대지위 곳곳에 이스라엘군 진지가 보였다.젊은 남녀군인들이 총을 메고 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지금은 폐가로 남아 있지만 한때 사람들이 살았던 민가에는 탄흔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6일전쟁 당시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갈릴리호수 동편의 골란고원에서 북으로 1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쿠네트라라 불리는 국경전망대.멀리 헬몬산이 보이는 전망대에는 두르즈족 노인이 잡동사니를 실은 차를 세워놓고 취재진을 유혹했다.그는 종족들이 많이 사는 시리아로 가봤자 별로 나아질 것이 없어 30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한다고 했다.

국경전망대에서 다마스쿠스까지는 70여㎞.전망대옆 산언덕에는 이스라엘의 미사일기지가 있고 시리아쪽으로는 풍력발전소의 풍차가 평화롭게 돌아갔다.두르즈족 노인은 “내가 병들거나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한 이곳에서 장사할 것이며 그것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평화가 존속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두르즈족 노인과 헤어진 뒤 멀리 보이는 헬몬산밑으로 향했다.정상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헬몬산 밑에는 예수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잠시 머물렀던 가이샤라 빌립보가 있다.예수그리스도는 갈릴리에서 기적을 행한 뒤 잠시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피신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묻는다.제자들은 “더러는 세례요한,더러는 엘리야,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고 대답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는다.여기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기독교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믿음의 고백으로 유명하다.예수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반석이라는 뜻)라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다.또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독교성지 중의 성지인 이곳은 그리스의 삼림신인 `판'신을 섬기던 유적이 남아 있다.그리고 기원전 19년 헤롯이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전이 있다.그러나 교회의 기초가 된 베드로의 고백이 기록된 역사적인 성지이면서도 기념교회가 한 곳도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이곳이 성지로서,또 역사적인 장소로서 중요한 것은 요단강의 수원이 되는 샘이 솟아나기 때문이다.요단강은 여기에서 솟아나는 초당 20t의 샘물과 헬몬산에서 흘러오는 물,그리고 단지파가 정착했던 단(흐른다는 뜻)에서 나오는 초당 50t의 샘물이 모여 형성된다.이곳 사람들은 여기를 바니야스로 부른다.그 이름은 알렉산더대왕이 이곳을 점령해 세운 `숲과 목동의 신' 파니아스신전에서 유래됐다.

바니아스에서 단지파가 살았던 텔단을 우측에 끼고 남으로 내려오면 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다.풀라평야라고 부르는 이 곳은 목화재배지로 유명하며 풍요로운 풍경이었다.

가이샤라 빌립보를 뒤로 하고 티베리아로 향하면서 기자는 베드로의 고백과 골란고원에서 만난 두르즈족 노인을 떠올리며 이 지역의 평화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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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샤라 빌립보’

icp.jpg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위대한 신앙고백의 장소 가이샤라 빌립보는 이스라엘의 최북단, 요단강의 주요 원류중 하나 근처인 헐몬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 요단계곡의 상부 북쪽 끝을 감싸고 있다. 이곳은 구약성서에 나온 바알 갓, 혹은 바알 헤르몬(수11:17, 삿3:3)으로 추정된다. 헬라인들은 그들의 신 판(Pan)의 이름을 따라 이곳을 파네아스(Paneas)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바니아스(Banias)라고 부르고 있다(이는 헬라어가 아랍어로 잘못 굳어진 것). 이곳은 안티오커스 3세가 이집트 군대를 물리치고(기원전 198년)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수 있게 해준 곳이다. 파네아스의 이름은 헤롯에 의해 가이샤라로 바뀌었고(눅2:1), 헤롯의 아들 빌립에 의해 가이샤라 빌립보로 바뀌었다.

지금의 가이샤라 빌립보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이곳의 옛 영광을 가늠해 볼 뿐 여느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물이 풍부한 것이 이곳의 특징이었다. 헐몬산에서 눈 녹은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이곳 바위틈에서 솟는다고 한다. 인근 협동농장(키부츠)에서 재배한 사과를 노점에서 구입하여 이곳의 시원하고 맑은 물에 씻어 먹으니 더욱 사과 맛이 좋았다(사실 그 사과 내가 일행에게 기부함 것임). 제자들의 위대한 신앙고백(마16:13-16)의 장소였던 이곳을 방문해보니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신앙고백에 그토록 놀라운 반응을 보이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웅장한 이방 신전들이 세워진 한 마디로 ‘신들의 도시’였다. 구약시대에는 바알 갓 곧 행운의 신을 믿는 장소였고, 헬라시대에는 판 신전, 이외에도 제우스 신전, 네메시스의 뜰, 판의 뜰, 거룩한 염소의 무덤 신전 등 다양한 신전들이 있었다. 그리고 로마시대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이처럼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방인이 위대한 신이라고 믿는 신전이 가득한 곳이다. 거기에 비해 주님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 제자들이 ‘선생님, 계신 곳이 어딥니까? 함께 하고 싶습니다.’고 했을 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실 만큼 신전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 거둘 수 있는 집도 없었다. 그런 주님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과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셨고, 주님을 향해 그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한 것이다. 주님이 온갖 세상의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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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단 석비

가이샤라 빌립보는 텔단, 바니아스와

같은 지역을 표현하는 다른 명칭이다.

텔단은 이스라엘 북단 경계 지점으로

여로보암이 세웠던 금송아지 신전이

있었던 장소라는 것 때문에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지역은 가이샤라 빌립보라고도

불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 있는 것은 1993년 7월 21일에

발견된 ‘텔단 석비’ 때문이다.

이 석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성서학계에서

다윗의 역사성이 문제시 되었었다.

왜냐하면 다윗이 성서에 나오는 대로

탁월한 왕이었다면, 동시대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다윗의 이름이 거론됐어야 하는데

단 한 번도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 텔단 석비가 발견되었다.

아람어로 기록된 길이 32cm 폭 22cm의

이 석비 조각에는 당시 다마스커스의 왕

하자 엘(왕상 19,15-18)의 비문이

13줄로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 여덟째 줄에 ‘다윗왕조’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어 다윗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었다.

이 비문은 성서 밖에서 다윗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번째 문헌이며,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견될 당시의 텔단 석비

글자를 알아보기 쉽게 보정 처리한 텔단 석비

이스라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텔단 석비를 직접 촬영한 사진

"물은 생명이다"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텔단'(Tel Dan)은 마치 에덴동산을 연상케

하는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마치

이곳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들이 풍요로워 보인다.

헐몬산의 눈과 물이 모여 터져 나오는

풍부한 샘물 때문에 정글 숲을 연상하게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이로 인해 숲 속은 뜨거운 한 여름에도

14.5도를 유지할 만큼 시원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은 생명이다"

(Water is Life)라고 말하면서

물의 중요성을 모두 인식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갈릴리 호수의

수면 높이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갈수기에 갈릴리 호수의 수면 높이는

주요 뉴스로 방송된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의 수면이 낮아질수록

수도요금이 누진되는 체제로 운영되어 있다.

골란고원의 중요성

텔단의 물의 공급원은 골란고원이다.

그곳에 있는 헐몬산 내부의 수맥이

텔단의 샘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헐몬산, 더 나아가서는

골란고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골란고원은 물의 공급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절대로 골란고원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단강

텔단은 요단 강의 발원지이며 시발점이다.

텔단의 물은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260km의 요단강을 흘러 사해로 들어간다.

‘요르단’이란 말은 ‘단에서 흐르다’,

즉 ‘단 지방에서 흘러내린다’는 뜻이다.

텔단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223km,

티베리아로부터는 약 65km 북쪽에 있으며

헐몬산의 남쪽 아래 지역으로

레바논 국경 가까이에 있다.

단 지파

단 지파의 위대한 영웅은 삼손이다.

삼손과 같은 위대한 사사가(판관) 있을 때는

블레셋과의 경쟁이 가능했지만,

삼손 사후에는 월등히 앞선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던 블레셋에게 밀려

분배 받은 땅을 빼앗기고

북쪽 ‘라이스’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당시 북쪽 지역은 이스라엘 영토로

확정되지 않았고,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많은 장소들이 있었는데

단 지파 사람들은 이들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라이스를 정복하고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서 단이라 하였다.

단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최북단의

경계도시였는데,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표시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표현하였다.

텔단 유적지

텔단 유적지 표지판

희생제사 드리는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왕과 방문한 사신들

옛 신전 자리

제단

여로보암이 만든 제단 자리에 네 뿔이 달린 모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가이샤라 빌립보

바니아스

텔단

이 세 가지 명칭은 한 장소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져 있다.

가이샤라 빌립보의 처음 이름은

파네온(Panaeon) 이었으며,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후

'판(Pan) 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아랍인들은 'P' 발음을 잘 하지 못해서

'단'으로 발음하였고, 신전이 지어진 곳은

언덕이라서 '텔 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판 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숲과 양치기들의 신, 즉 목양신이다

바니아스라는 이 장소의 이름은

판 신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처음의 이름은 파네온(Panaeon)이었고

다음에는 파니아스(Paneas or pameas)였다.

아랍인들은 "P" 발음을 잘 하지 못하므로

현재 이름은 바니아스(Banias)라고 불린다.

BC 1세기 말에 로마는 헤롯 대왕에게

파니아스를 주었고,

헤롯은 샘물 가까이 신전을 지어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쳤다.

헤롯이 죽은 후에 파니아스는 BC 2년에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통치하였고,

도시를 더 크게 정비하고 수도로 삼았다.

헤롯 빌립은 이 도시 이름을 바꾸었는데,

자신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지중해에 건설한 해변도시 가이샤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후에 헤롯 아그립바가 이 도시를 매우

사치스럽게 만들고 큰 왕궁을 지었으며,

로마의 네로 황제를 위하여 이 도시 이름을

네로아니스(Neroanis)라고 고쳤다.

비잔틴 시대(AD 4세기) 초기에 신전은 버려졌고,

많은 거리들이 만들어졌으며

아그립바 2세의 궁궐과 목욕탕이 되었다.

AD 7세기 무슬림이 정복한 후에

이 도시는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AD 10세기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정복했었으며,

AD 1132년 무슬림이 이곳을 다시 정복하였다.

[출처] 성지순례 2013, 가이샤라 빌립보|작성자 무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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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샤라 빌립보 - 바니야스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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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 단에서 약 4Km를 골란 고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헬몬산 남쪽 경사면 암벽 틈에서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물이 솟구치는 곳이 있다. 이 물줄기는 단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함께 요단강의 중요한 수원이 되고 있다.

바니야스에는 가나안 시대부터 바알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왔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판신(Pan God)을 섬겼기에 파니야스라고 불렀다. 오늘날 바니야스는 파니야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파의 “P”발음을 못하는 아랍인들이 B로 잘못 발음하여 바니야스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현재도 연못 뒤쪽의 절벽에는 많은 동굴이 있고 동굴 안에 신전터를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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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200년에 시리아의 셀류시드 왕조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를 패배시킴으로서 이 지역을 포함한 팔레스틴 전역을 장악하였다. 주전 20년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 는 이 지역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은 가이사 아구스도를 기념해 흰 대리석 신전을 세웠다.

주전 4년에 헤롯 대왕이 죽자 이곳은 아들인 분봉왕 헤롯 빌립에게 주어졌다. 분봉왕 빌립은 이곳을 아름답게 재건하여 북부 지역의 수도로 삼고 이름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였다. 로마황제인 디베료 가이사와 자신의 이름 빌립을 따서 당시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의 구별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던 것이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를 방문하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마 16:13-19). 바로 이곳이 가이사랴빌립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