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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18) 아시리아제국의 수도 앗수르

은바리라이프 2008. 4. 23. 23:36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18) 아시리아제국의 수도 앗수르
2008/01/10 오후 7:06 | 성서의 고향을 찾아서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18) 아시리아제국의 수도 앗수르

 
앗수르(아수르·Asshur)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아시리아 제국의 첫번째 수도이다. 이곳은 현재 이라크의 모술(니느웨)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 떨어진 칼라트 세르가트(Qalaat Shergat)라는 유적지이다. 오늘날 이라크 에 있는 성경의 도시들은 대부분 구약시대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앗수르는 바벨론(바빌론) 다음으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에 앗수르에 대한 나의 기대 역시 컸다.

그곳에 가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니느웨로 가는 1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자 동쪽으로 계속 티그리스 강이 보였다. 1시간쯤 지나 중간에 사마라라는 곳에 들러 그레이트 모스크 알무타와킬 사원의 첨탑을 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이라서 회교 사원의 탑이 햇살과에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마치 파괴된 바벨탑을 연상케 했다. 본래 이 탑은 847년 벽돌로 축조된 나선형 첨탑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고대의 탑 형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탑이다. 원래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란 뜻) 지역은 흙문화이고 또 평지이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야 하는 신전은 인위적으로 탑을 쌓았다.

사마라를 떠나 120㎞쯤 강변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자 드디어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앗수르 유적지가 나타났다. 구약 성경에서 앗수르는 도시와 나라 이름 외에 사람 이름(창 10:22)과 왕의 이름(창 10:11)으로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 요충에 자리잡고 있는 앗수르는 길이 약 1.5㎞,너비 1㎞ 정도의 큰 도시로 티그리스 강변에 지정학적으로 좋은 위치에 세워졌다. 북쪽과 동쪽은 강이 자연적인 방어를 해주고 있으며 남쪽과 서쪽에는 방어벽을 건립,도시를 방어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 대한 기사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4개의 강 중 힛데겔 강은 앗수르 동편을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창 2:14) 유적지에 도착해보니 바로 옆에 티그리스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의 세번째 강인 힛데겔은 오늘날 티그리스 강을 가리킨다.

유적지 입구로 들어서면 작은 아치 모양의 문이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조금 들어가면 지구라트가 남아있는데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지구라트도 신전탑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탑은 이런 지구라트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앗수르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BC 2400년쯤 아시리아라는 이름으로 도시국가가 형성되었음을 고대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샴시 아다드 1세(BC 1813∼1781년)가 도시국가를 지배하던 왕조를 무너뜨린 후 이곳을 메소포타미아 중심도시로 발전시켰다. 이어 BC 14세기쯤에는 아시리아 제국이 형성되면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BC 9세기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는 기존의 방어 성벽을 배로 크게 확충했다. 그러나 산헤립(BC 704∼681) 때에는 수도가 100㎞쯤 북쪽에 있는 니느웨로 옮겨갔다. 이후 아시리아 제국은 BC 7세기쯤부터 쇠약해지기 시작하여 BC 614년에 메대(메디아)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BC 612년에는 아시리아의 니느웨도 함락됐다. 당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은 최후의 보루인 하란의 탈환을 위해 이집트의 바로 느고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유다의 요시아왕은 이시리아를 도우러 가려는 바로 느고를 므깃도에서 저지하다가 전사했다(왕하 23:29∼30). 결국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시리아의 여러 곳에 강제로 이주되어 훗날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는 잃어버린 12지파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앗수르도 BC 610년 메대와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시리아에 대한 발굴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어 내가 방문했던 2001년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었다. 발굴 결과 BC 2500년 전후에 세워진 이슈타르 여신전은 앗수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었음이 드러났고 이후에 여러 왕들이 왕궁과 신전들을 건축했다. 앗수르 남쪽 지역에서는 앗수르 니라리 1세가 BC 16세기쯤 건설한 2개의 신전,곧 달의 신으로 여겨졌던 신(Sin)을 섬기던 신전과 해의 신이었던 샤마슈(Shamash)를 섬기던 신전이 있었다. 북쪽 지역에는 아다드 니라리 1세,디글랏빌레셋 1세,아슈르나시팔 2세,산헤립 등 역대 왕들의 왕궁들이 있었고 근처에는 왕들의 무덤들이 있었으나 발굴전에 이미 도굴되어 돌로 만든 몇 개의 관들만 남아 있어 귀중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바벨론 제국에 앞서 당대에 메소포타미아와 그 주위의 세계를 지배했던 아시리아 제국과 그 수도인 앗수르. 그러나 오늘날 그 모든 영광은 사라지고 유적마저 상당히 도굴되어 그 흔적과 기록마저도 다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티그리스 강만이 앗수르의 흘러간 역사의 증인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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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19) 앗수르의 두 도시


갈라(Calah·창 10:11)는 니므롯 또는 그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건설한 아시리아(앗수르)의 고대 성읍이다(창 10:11). 수메르어로 ‘거룩한 문’이란 뜻의 갈라는 앗수르 북쪽의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오늘날 님루드(Nimrud)이다.

나는 바그다드에서 니느웨(니네베)로 가는 도중 사마라를 거쳐 니느웨 남쪽 35㎞ 지점에 있는 니므롯을 찾았다. 창세기 10장 12절에 갈라로 나오는 이곳은 BC 2500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BC 1250년쯤 앗수르의 살만에셀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후 BC 884∼859년 아슈르나시르팔 2세에 의해 확장되었고 BC 879∼706년 앗수르의 수도가 다른 곳으로 이전될 때까지 행정수도가 되었다.

BC 672년께에는 도시의 외벽과 관련해 이름을 남긴 사람이 에사르하돈(Esarhaddon BC 680∼669년)임이 밝혀졌는데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유다 침공에 실패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하다가 암살 당한 부왕 산헤립(센나케리브)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이 된 사람(왕하 19:37,스 4:2,사 37:38)이다.

그는 왕이 된 후 도시의 동남쪽 성벽을 재정비하고 문을 아치형으로 개조하고 입구 좌우에 자신의 업적을 새겼다. BC 614∼612년 메대(메디아)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BC 401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도시가 되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2001년에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발굴 작업을 통해 벽돌로 만들어진 약 8㎞나 되는 성곽과 10㎞쯤 떨어진 티그리스 강의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많은 조각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궁전이 있었으며 약 43m의 높은 지구라트도 있었다. 특히 60만평이나 되는 대규모의 성채에서 가장 주된 건물인 아슈르바니팔 궁전과 궁전 뜰에서 발견된 토판들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줬다. 이 토판들은 앗수르 정복 지역에 파견된 관료들이 보내온 공문서들이 포함돼 있으며 BC 707년쯤 사르곤이 수도를 코르사바드(Khorsabad)로 옮기면서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에사르하돈은 수도를 코르사바드에서 다시 이곳 니므롯(갈라)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다만 기념비적인 건축물만 유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외에 이곳에는 니누르타와 나부 신전이 발굴되었다. 성채의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나부 신전(Nabu Temple)은 아다드니라리 3세에 의해 기초가 놓여졌다. 2개의 쌍둥이 성소가 딸려 있으며 BC 7세기 후반에는 중요한 종교건물로 발전하였다. 성경의 노아홍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내용이 담긴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로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살만에셀 3세(BC 858∼824년)의 검은 색 방첨 석탑(Black Obelisk)이 발견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석탑에는 북이스라엘의 예후왕(왕하9:14)이 앗수르 왕에게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구다(Guthah·왕하 17:24)로 알려진 곳은 오늘날 텔 보르십파이다. 오늘날 이곳은 아랍명으로 텔 이브라힘(Tell Ibrahim?아브라함)이며 보르십파는 학술 용어이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있는 고대 바벨론시에서 남쪽으로 30㎞ 지점에 있다. 비포장길을 따라 이곳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신전탑 기둥이 보였다. 일부 학자는 고대 바벨론 유적지와 이곳에 있는 신전탑 두 곳을 바벨탑을 쌓았던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전탑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텔 이브라힘 분묘가 있다. 분묘가 있는 주위는 1881∼82년 홀무스 랏삼의 발굴로 상당히 큰 도시임이 밝혀졌고 지금은 그 위에 이브라힘(아브라함의 아랍어 호칭) 사원이 세워져 있다. 사원의 지하에는 회교 전승에 의해 아브라함의 모친이 도망하여 이곳에 와서 젖을 먹일 때 젖 몇 방울이 떨어지자 기적이 일어났다는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서 지하 세계의 왕인 네르살에게 바쳐진 에 쉬드 람 사원이 발굴되었다.

구다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된 후 바벨론 하맛 등지에서 살던 사람과 함께 이곳에 있던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마리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왕하 17:24).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죄악을 저지른 이스라엘을 다시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시고 그곳에 있는 자들을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강제 이주시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