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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들의 성경 해석 방법

은바리라이프 2017. 7. 3. 16:29

랍비들의 성경 해석 방법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고 따라야 할 성경의 범위를 정하였다. 기원전 4세기경에 모세의 다섯 권의 책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토라의 경우 유대교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 Torah는 창조되기 전에 선재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토라에 근거하여 구약 성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기록된 토라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구전의 토라가 있었다. 이 토라는 "모세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아 여호수아에게 물려주었으며,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 율법을 대 회당의 남자들에게 전하여 주었다 (M. abot I,1)"고 생각되어졌다. 이렇게 구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들의 유전이다. 물론 이 장로들의 유전은 기록된 토라에 의하여 정확하게 검증되었다. 이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사두개인들은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바리새인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70년대 이후에는 그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전은 이렇게 미쉬나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을 통하여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할라카 즉 어떻게 사람들이 처신하여야 하는가를 성경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교훈이 더하여 지게 되었다. 기록된 토라는 일반적인 내용만을 규정하고 있어서 이를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성경해석을 통하여 발전시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할라카이다. 예로 출애굽기 20장 8절에서 십계명의 하나인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 그러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하여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를 구체화 시키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시기 전 20년 전에 살았던 힐렐은 7가지의 성경해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해석의 방법은 힐렐에 의하여 개발되어진 것은 아니다. 이 방법은 힐렐 이전에 부분적으로 시행이 되고 있던 것을 힐렐의 시대에 와서 구체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석 방법은 힐렐에 따른 에피소드와 함께 팔레스타인 탈무드 Pesahim 6.1, 33a에서 매일 매일의 희생을 안식일에 드리는 것이 성경에서 안식일을 멈춤 것에 대한 벌을 명하지 않고 있다면 당연히 유월절의 희생을 안식일에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힐렐의 해석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해석을 하는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에 율법을 적용하기 위하여 성경은 해석되어야만 하였다. 성경의 해석의 일관성을 위하여 힐렐은 7가지 해석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1. Qal wa-homer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혹은 불명확한 것으로부터 명확한 것으로)

 

 

 

물론 이러한 해석의 원리를 힐렐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랍비인 Ishmael에 따르면 이미 창세기 44장 2절에 언급이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한다.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 시험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제들에게 곡식을 넣어 주고 자신의 은잔을 막내인 베냐민에게 넣었다. 요셉은 자신의 청지기들에게 명하여 자신의 형제들을 따라가서 그 잔을 찾아 올 것을 명하게 되었다. 그 잔은 베냐민에게서 나오게 될 때 그 형들의 답변이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 하리이까?" 합니다. 여기에서 주어지는 답변의 방식에서 이 방법론이 왔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신약 성경에서 보면 히브리서 9:13절을 볼 수 있다. 
히 9:13, 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 성경 구절은 구약의 레위기 16:14절에서 인용하여 확대 해석을 하는 것이다. 
레위기 16:14,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옛 언약 안에서 동물의 피가 제의적이고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하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6:25-33절에 보면 이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그의 청중들에게 설교를 하시면서 말씀을 하신다. 세상의 먹고 자고 마실 문제에 대하여 아무 근심하고 걱정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하시면서 논리를 전개하시는데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돌아보시는 분이시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시는 분이시다. 하물며 이러한 분이 그의 자녀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실 것인가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5:15절에 사도 바울의 논지에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그와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게 되었다. 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당시에 랍비들이 쓰고 있던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해석을 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구약에 근거한 전제를 세우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교리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사한 성경 구절이 마태 12:11이하, 누가 3-5장 12:24; 27-28, 요한 10:34 이하 로마서 5:15, 17; 11:12, 24; 고전 6:2이하; 9:9, 고후 3:7-11, 히 2:2이하, 10:28이하 12:24이하 등이 있다.

 

 

 

2. Gezerah shawah (동등한 규칙, 논리적으로 타당한 해석)

 


이 해석의 방법은 참으로 주의하여 사용하였다. 이 해석의 방법은 단지 두 개의 주어진 토라의 언급이 명백한 표현일 때 사용되어 졌다. 물론 이 제한이 후대에 와서는 지켜지지 아니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명백한 표현 속에서 제한적으로 쓰였던 것이 사실이다. Ker 5a에서 "너는 gezerah shawah를 가볍게 적용하지 말라."고 권면을 하고 있으며 p.Pes 6.1, 33a에서는 아무로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논쟁하지 말라고 한다. 오직 모세 오경에 근거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만이 허용되었다.

 


예로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라는 의미를 시편 32:1에서 죄 용서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두 구절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4:3-8절에서 죄 용서의 문제를 언급한다. 이 문제를 언급하게 되는 배경에는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인 문제로 인한 것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실정 속에서 그들을 설득시키고 또한 성도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바울은 당시 대적자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의 뿌리가 될 수 있는 유대주의의 신학을 그들의 방법론을 동원하여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두 구절을 연계하여 생각하면 아브람이 의로 여김을 받은 것은 허물의 사함을 받았고, 죄의 가리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두 구절을 연결하여 사도 바울은 롬 4:3-8절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참조 누가복음 6:1-5, 히브리서 7:15-17 야고보서 2:21-24

 

 

 

3. Binyan ab mi-katub ehad. 문자적으로 "가족을 세우는" "유일한 성경 본문으로부터"

 


이 방법론은 성경 구절에서 발견된 그룹 중의 발견된 하나의 구절을 다른 모든 곳에 적용하는 것이다. 예로 출애굽기 3:14절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부활에 대하여 사두개인들에게 변증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출 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약속은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약속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또한 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 있으므로 이 약속은 유효하고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죽은 자들은 모두 살아 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4. Binyan ab mi-shne ketubim.

 


이 방법론은 두 개의 성경 구절에 기초한 같은 근원를 가진 곳에 적용한다. 예로 출애굽기 21장 26절과 27절에서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 지니라. 이 두 성경 구절은 같은 근원에 기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여 확대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Mek Neziqin 9, L. 3.72f에서 종의 신체의 어느 부위에 손상을 입히게 되면 그로 인하여 풀어 줄 것을 명하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9:9-13절에서 신명기 25:4절과 18:1-8절을 알레고리컬하게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명기 25: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신 명기 18:1-8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 . . 그 사람의 응식은 그들과 같을 것이요 그 상속 산업을 판 돈은 이 외에 그에게 속한 것이니라. 
고 전 9:9-13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 .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본문도 당시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하고 나아가서 사도 바울을 거짓 교사로 몰아가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대변을 하는데 당시 자신의 대적자들의 논리를 그들의 방법론을 동원하여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로마서 4:1-25, 야고보서 2:22-26.

 

 

 

5.Kelal u-ferat u-ferat u-kelal: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 특별한 것과 일반적인 것. 이 말은 일반적인 것을 특별화 시키고 특별한 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로 레위기 1:2절에 생축 중에서 하고 있는데 이는 가정에서 키우는 동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대비하여 출애굽기 22장 10절에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물려 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짐승들은 생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축은 구체적으로 출 20:10절에 언급된 동물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출애굽기 22:10절은 생축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특별한 것을 일반화 하고 일반적인 것을 특별화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다른 예는 구약 성경 안에서 출애굽기 20:13-17의 십계명의 각각의 명령을 레위기서 19:18절에서 일반적인 명령으로 요약이 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또다시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을 로마서 13:9-10절에서 볼 수 있다.

 


출애굽기 20:13-17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로 마서 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 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6.Ke-yose bo be-maqom aher. "다른 구절에서 있는 유사한 내용들"

 


이 규칙은 제 2의 규칙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 예는 같은 성경 구절에 있어서 유사한 내용이 다르게 언급되어 있으면 먼저 성경이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로 출애굽기 3:6절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하고 있는데 레위기 26:42절에서는 나는 야곱의 나의 언약, 이삭과의 언약 그리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한다. 이러한 경우에 출애굽기가 우선권을 가져 그 순서가 출애굽기가 맞다는 것이다.

 


예로 여호수아서 1:13-15, 22:4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이 성취되어진 것으로 언급을 하고 있는데 시편 기자는 95:7-11절에서 참된 안식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대칭이 되는 구절을 인용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4:4-9절에서 참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 1:13-15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 . .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 찌니라.

 


수 22:4 이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시편 95:7-11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 . .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히 브리서 4:7-9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우리는 구약의 성경 말씀이 이렇게 대조를 이루는 것을 언급하면서 참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참고 갈 3:8, 16; 히브리 8:7-13.

 

 

 

7. Dabar ha-lamed me-inyano. 성경 구절의 상황으로부터 논증.

 


이 해석 방법은 일반화 되었다. 예로 출애굽기 20장 16절에 도덕질 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뒤의 구절이 사람과 연계가 되어 있는 명령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또한 이 구절은 레위기 19장 11절의 도적질하지 말라는 돈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 뒤의 구절을 살펴보면 물질과 연계된 구절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또한 이러한 것이 있다. 민수기 22-24잘에서 발람이 그 중심 인물인데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도록 발락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발락의 유혹을 받아 들려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기 위하여 발락의 진영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25장 1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제 랍비들에게 이 음행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할 때 그들은 이 원칙을 적용하여 앞에서 일을 저질른게 발람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발람으로 보는 것이다.

 

 

 

예로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창 22:18)이 430년 후에 모세의 율법 안에서 (출 12:40)에 유용하였다면 또한 그 율법과 관계없이 오늘날도 계속 유효함을 (갈 3: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한지 430년이라.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 백 삽 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참고 마태복음 19:4-8, 로마서 4:10이하, 히브리서 4:9이하

 

 

 

이렇게 힐렐은 7개로 해석 규칙을 세웠지만 후대에 더욱 발달하여서 Bar Kokkba 이후의 위대한 랍비였던 R. Ishmael은 13개의 규칙을 정리하였으며 Eliezer ben Yose ha-Gelili는 32개의 규칙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 시대는 힐렐과 깊은 연계성이 있기 때문에 힐렐을 제외한 다른 규칙들이 신약 저자들과 연계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힐렐의 방법론이 신약 성경에 어떻게 적용이 되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이 시간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랍비들의 성경 해석 방법이 신약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성경 구절 하나를 깊이 연구하고자 한다.

 

유대인의 해석 방법을 통한 갈라디아서 3:10-14 의 해석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구약 성경 두 구절을 사도 바울이 인용을 하고 있다. 신명기 27:26절과 신명기 21:22-23절이다. 
신명기 27:26, 이 율법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 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데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는 행하는 자는 그 가운에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이 본문을 언뜻 보면 아주 잘 구약을 인용한 듯하여 보이지만 구약의 내용을 잘못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Longenecker은 "The text of the citation, however, does not agree fully with any extant MT or LXX version, thought it comes close to LXX--departing only in the ommission of ('man') after ('every'), the dropping of ('in') before ('all the things'), and the change of (the words of God's law') to ('written in the book of the law)."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아마 당시에 회람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분실된 구약의 사본을 인용하였거나 혹은 자신의 기억에서 자유롭게 인용을 하였거나 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문장을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본문이 성령의 역사로 기록되었다면 어떻게 구약에 맞지 아니한 인용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금 점검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구약에 나와 있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내용을 뒤틀어서 크리스챤의 신앙을 변호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문장을 바꾼 부분을 생각하여 보면 첫째 사도 바울은 율법의 양면 즉 율법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중에서 어두운 면을 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Midrash Rabbah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The Rabbis say: The Torah is compared to five things, water, wine, honey, milk, and oil. . . Just as oil at first bitter but in the end sweet, so too are the words of the Torah; at first a man has to labour in them, but in the end he benefits by them, as it is said, And though thy beginning was small, yet thy end should greatly increase (Job VIII, 7)(Deuternomy (Ki Thabo) 7:3)."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결코 짐이 아님을 강조하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율법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일부에서는 율법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되는 글 Deuternomy 7:4에서 Deuternomy 27:26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R. Simeon B. Halafta said: If one learns the words of the Torah and does not fulfill them, his punishment is more severe than that of him who has not learnt at all. It is like the case of a king who had a garden which he let out to two tenants, one of whom planted trees and cut them down, while the other neither planted any [trees] nor cut any down. Likewise, whosoever learns the words of the Torah and does not fulfill them, his punishment is more severe than that of him who has never learnt at all.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율법을 배우고 행하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는 이방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저주보다 심하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여기 갈라디아서 3:11절에서 사도 바울은 Hillel의 7가지 성경 해석방법중의 하나인 일곱 번째의 방법을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은 주변의 상황속에서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랍비들은 먼저 본문을 언급하고 나서 이 본문을 지니고 있는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은 본문을 인용하면서 부정적인 면에서 율법을 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율법을 배운 사람이 다만 배우지 아니한 이방인 보다 그 진노가 심하지 아니하다는 의미에서 이 논리를 이끌어 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음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논리적으로 내리는 결론이 아무도 하나님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면에서 접근을 하였던 율법의 문제에서 이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긍정적인 면에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접근 방법은 사도 바울은 힐렐의 6번째 방법론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대칭이 되고 있는 문장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두 개의 문장이 상호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레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라.

 


이 러한 대칭이 되는 두 구절--율법으로 말미암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에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대칭되는 구절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이미 3장 9절에서 조화를 이루는 문장 (창 15:6)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6-14절에서 계속해서 조화를 이루면서 풀어가는 내용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축복이었는데 율법은 저주와 함께 왔기 때문에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즉 아브라함과의 약속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잇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되는 논지가 아브라함의 복의 회복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 3:13절에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구원하였다는 것이다. 나무에 달린 자들이라는 개념은 초기에는 언약을 어긴 자들에 대한 벌이었다. 더욱이 다윗은 자신을 모반하였던 아들 압살롬이 나무에 달려 죽자 이를 위하여 소리내어 울었는데 이는 그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상수리 나무에 달려 죽었기 때문이라고 삼하 18:9과 32-33절에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사무엘하의 저자는 압살롬의 죽음을 모반에 대한 벌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 역시 나무에 산채로 메달려 죽는 죽음을 모반에 대한 형벌로 여기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은 저주를 받은 것이요 또한 국가에 대한 모반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되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랍비들의 모형론적 해석방법으로 해결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Cohn-Sherbok에 따르면 랍비들은 두 가지 카테고리안에서 모형론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i) the action of a biblical personage is presented as an archetypal model which if emulated, will result in reward; (ii) biblical incidents prefigure future events."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이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깨닫고 나서 구약의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론의 렌즈로 구약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보았고 구약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의 그에게 구약의 눈으로 볼 때는 방해가 되었던 것이 이제 신약의 눈으로 보게 될 때 이것이 신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사건안에서 나무의 저주의 동기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저주받은 자가 "저주를 담당하는 자(the bearer of curse)로 이해되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의 어두운 면을 밝은 면으로 변화를 시켜서 이해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배경에는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22:13절에 나와 있는 나무에 걸린 양을 생각하게 되고 이 양은 이삭을 대신하여 죽었던 것을 연상하여 나무에 달린 자의 동기를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의 모형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서 최종적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들에게 가져왔음을 선언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하여 복을 낳은 자로 인식되어졌었다. Midrash Rabbah안에 Exodus (Ki Thissa) 44:4는 이러한 논리에서 모세의 간구(출 32:11-13)를 해석한다.

 


R. Abin said in the name of R. Aha: It can be compared to a king whose friend deposited with him ten precious pearls. After a time, this friend died, leaving one only daughter behind, whom the king subsequently married and made the chief lay of the land, also giving her a necklace of ten pearls which she placed round her neck. In course of time, she lost that necklace and the king sought to divorce her, saying: 'I will drive her out of my house, I will banish her from my presence.' Her best friend than appeared before the king and tried to appease him, but the king would not hearken to him. . . he then said to him: 'Thou dost seek to drive her out because of the ten pearls she lost? Dost thou not know that I am aware that her father had deposited ten pearls with thee? Well, let these ten pearls [she lost] be in exchange for those [her father had deposited with thee].

 

 

 

이 이야기 후에 Midrash는 모세의 간구에 이 이야기를 적용하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보상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을 기억할 것을 말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을 아브라함에게 준 10개의 시련을 이긴 것이 십계명을 위한 보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복을 위한 배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바울의 견해를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 많은 사람은 신학적 견지에서 또한 문자적 견지에서 해석할 때 그 이해가 한계가 올 수 있다. 또한 바울의 해석방법을 당시에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를 하려 할 때 오늘의 우리는 이해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성도들은 아주 분명히 이해를 하고 있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대적자들을 물리치고 또한 성도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당시에 쓰이던 힐렐이 정리한 해석의 방법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면서 너무 경직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1세기의 눈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에서 원리를 발견하여야 하고 이를 오늘 현대적 감각에서 적용시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들이 이해하고 있는 용어로 또한 방법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종종 랍비들은 알레고리를 이용하고 있는데 신약 성경에서도 알레고리를 쓰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 고린도 전서 5:6-8절

 

참조문헌

 


E. Earle Ellis, The Old Testament in Early Christianity Tubingen: J. C. B. Mohr, 1991. 
H. L. Strack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