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스펄전

누룩을 버리라(고전 5:6) -스펄전

은바리라이프 2014. 1. 20. 17:53

누룩을 버리라


(고전 5:6)"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 언제나 성경에서는 은총의 가르침이 거룩함의 교훈과 상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거룩함과 행복함의 근원은 같으며 어떤 점에서는 똑 같은 뜻을 두 개의 다른 단어로 표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거룩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 에서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들은 생명의 깨끗함은 필요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구원은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은총에서 온다고 가르치면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자기들 좋아하는 대로 살면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가장 열렬히 사모하는 자들의 신앙심 깊고, 정직하며 순수한 생활을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율법 폐기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모든 일을 성취하셨기에 구원을 받았으며 공적(功績)으로 행해야 할 일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대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총아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좋은 대로 행동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우리의 대답은 구원 얻는 믿음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신앙이 아니라 항상 선행이 생겨나도록 하며 거룩함으로 충만케 하는 믿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 안에서는 불가능하며, 반드시 죄로부터 구원이어야 합니다. 억압을 당할 때 자유를 생각하며, 질병에 심히 시달릴 때 건강을 뽐내며, 적군이 주위를 막 둘러싸고 있을 때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듯이, 죄인들도 끊임없이 완전히 마귀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태양에서 빛과 열을 분리하지 못하듯 은총과 거룩함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 안에서 진실한 믿음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모든 나쁜 길에서 헤어나오도록 하며 끝날까지 거룩한 길에 있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근친상간하는 자들이 있는데도 성도들이 관용을 베풀고 있음이 얼마나 좋지 못한 짓인가를 설명하면서 깨끗지 못한 정신을 악독한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룩을 유월 절에 대비시켜 잠시 동안 유월절 명절의 의식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훨씬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전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그들에게 순전함을 주장합니다. 또, 유월절 명절을 통해 날카로운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월절을 이용하여 그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합니다. 즉 여러분들 이 성도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것을 어느 성경에서 찾든지 반드시 안전과 함께 거룩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월절에 은혜를 입은 백성이 피 뿌림 아래 안전했으며, 천사가 멸하는 칼을 뽑았던 그 무시무시한 시간에도 안전했던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백성이 그들의 집에서 불결한 누룩을 제거하는데 바쁘게 움직였던 것도 발견합니다. 그들은 피 뿌림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으며 또 그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부패하고 금지된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그 집이 누룩으로부터 청결함이 피로 인한 안전과 함께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첫째로 성도들의 행복의 조건을 살피고, 두 번째로 성도들의 특권과 더불어 주님께서 명하신 거룩한 의무를 찾아보며, 세 번째로 행복과 거룩함, 거특함과 행복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과 반작용을 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Ⅰ.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가 밝혀졌습니다. 성도의 일반적인 상태는 가장 안전하게 명절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들도 허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기쁜 구원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유월절 잔치 자리에 섰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어떻게 표현하였는가를 살핀 후 말씀 하나하나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이 말씀에서 "유월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변하여 죄의 보복을 받아야 하는 우리를 넘어가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진노를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부음으로서 우리로부터는 지나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죽임을 당하시고 생명을 잃으신 까닭은 우리를 위해 몸소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생명과 피를, 실로, 지극히 참되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완전히 바치셨습니다. 우리들 위해 라는 말씀은 대신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또는 대신해서 희생당하셨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의 유익함을 도모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회생했다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그의 노력으로 복음이 전해졌음으로 바로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속의 의미도 일반적으로 바르게 이 희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님 외에 다른 자에게는 결코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그 까닭은 온전한 의미로는 주님만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그분은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시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 자신은 희생되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의 많은 증거대로 대속의 과정에 의해 하나님을 믿는 죄인들은 심판을 면제받고 영원한 정죄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도한 범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 벧전 3: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갈 3:13),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롬 5:19) 

예언자 이사야가 이사야서 53장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아무도 이 가르침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6),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1), "그가… 범죄자중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12)
 
우리가 겪어야 하는 희생이 이미 없어졌기에 우리는 기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생을 바라시거나 요구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희생은 이미 끝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통틀어 희생이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에게 온전한 희생을 드려야 된다고 말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말씀하셨으며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히 10:12) 의 말씀이 있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분명히 거짓말쟁이들입니다. 나의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나는 바울 사도가 하신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갈 1:8) 라는 말씀 외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하나님 율법에 요구되는 모든 것은 이미 바쳐졌습니다. 소위 이 땅에서 사제라 불리는 자들이 바쳐야 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며, 멍청한 자들의 고해성사와 바치는 것으로 만회될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 희생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제사를 드리게 버려 둡시다. 우리에게는 한 번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에 대한 희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희생의 완전함이 성도들이 영원토록 지켜야 하는 명절의 주요 부분입니다. 아직까지 행해야 할 일이 더 있다면 즉, 대속의 희생이 완전치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근심 걱정은 모든 즐거움을 파괴합니다. 
"다 이루었다" ( 요 19:30).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임한 평화로운 천국잔치를 알리는 기쁨의 종소리입니다. 그 안에서 온전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된다는 사실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기쁨 입니다. 우리의 희생양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연스런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듯이 사도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한 희생 제물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명절이 있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며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이 명절을 지켜야 합니다. 유월절 양은 외면상 보이도록, 저장해두려고, 이야기 주제 거리가 되려고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먹히기 위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여러분이 날마다 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그 피는 참된 음료수가 됩니다. 예수 님은 여러분의 신앙을 자라나게 하는 데 없어선 아니 될 음식입니다. 이분 보다 더 훌륭한 영양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원 무궁토록 복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안에 거하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희생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더 이상 무엇을 바라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거룩한 희생,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한 완전한 인간이신 그 분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확고부동케 되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제 빨리 와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떡을 먹으십시오. 위대한 희생의 무한한 사랑, 놀라운 지혜, 말할 수 없는 공로, 이 희생으로 확실히 보장되는 충만한 축복들을 여러분의 영혼이 깊이 생각되게 합시다. 또한 여러분의 영혼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충만할 때까지 이것들을 섭취하게 합시다. 음식이 조금도 부족 하지 않으며 손님들은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잔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 때에 양의 모든 부분을 먹어야 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전체를 먹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비천하심, 영광, 왕 되심, 제사장직, 하나님이심과 인간이심 중에서 어느 한 쪽도 부인하지 못하며, 그 분은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여러분을 위해 주셔서 이제 여러분은 그 분을 깊이 생각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자양 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명절은 영혼의 자양분공급뿐만 아니라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을 얻기 위한 것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일평생 동안 명절을 지켜야 합니다. 육체가 음식으로 강해지듯이 성도는 자신들의 영혼을 강건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여기에서 기쁨의 포도주와 즐거움의 새로운 포도주를 뽑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 분은 모든 성도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내 죄가 나에게 있지 아니하고 예수의 문전에 있게 되어, 그 분이 이 모든 것을 없애 주셔서,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발견치 못한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 완전히 죄를 사하여 주시어서, 멸망의 천사가 그 성도 중 어느 하나도 건드릴 수 없음을 믿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나 장차 올 세상에서나 우리에 대한 정죄도 없으며 형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에 피가 뿌려져 있다면 우리의 안전함도 이스라엘 백성만큼이나 안전합니다. 더욱 의롭게 된 후에 우리는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택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만약 자녀가 된다면 상속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 이 말씀을 들은 우리의 눈 앞에 얼마나 장엄한 영광이 열려집니까!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기 에 모든 것은 우리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조용히 침잠만 하여서는 안 됩니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 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 시 150:5)의 말씀대로 터질 듯한 기쁨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셀 수 없는 축복과, 그렇게 멋진 사실들로 인하여 생기는 즐거운 흥분이 있음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단지 영혼에 필요한 평범한 양식으로만 여기지 마시고 영혼이 넘치는 기쁨을 얻게 되는 거룩한 잔치자리에 있는 포도주라고 생각하십시오.
 
유태인들이 유월절 명절에 함께 모일 때에는 찬양노래를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시편의 맨 끝에 나오는 위대한 송가 "할텔" (Hallel:유월절에 불려진 찬양시) 을 부르지 않고서는 이들은 결코 유월절 만찬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유월절 명절을 지 켜봅시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읍시다. 이로 인해 우리에게 생긴 축복을 생각하며 마음 속 깊이 기쁨을 누립시다. 아버지이시며, 그리스도를 주신 분, 율법의 계약을 만드신 자이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을 잊지 맙시다. 찬양이 그쳐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은 내가 무슨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했는지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월절 양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한 권고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라고 말할 때 그의 의도는 "우리가 때때로 명절을 지키자"가 아니고 명절을 항상 지키자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은 영원합니다. 일정한 시간이나 계절에 따르지 않고 평생 동안 지켜야 합니다. 속량받은 자들이여, 매일 아침 찬양의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십시오. 감사의 찬양 없이 하루 해를 넘겨서는 안 됩니다. 찬양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끊임없듯이 그 분께 드리는 찬양도 끊이지 않게 하십시오. 땅에서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유월절 양이 희생을 당하셨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릴 분노를 자비로서 지나가게 하셔셔 매일 찬양과 매시 감사함의 명절을 지켜야만 합니다.
 
유월절 때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가족에게 명절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이 명절 순서에 어떤 뜻이 들어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그 아버지가 어떻게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찾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높이 쳐든 여호와의 손과 널리 편 팔로 우리를 건져내시고, 밤에 애굽의 장자를 치실 때 어린양을 죽여 그 피가 문설주에 발린 것을 주님이 보시고 지나쳤기에 그분은 우리를 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다른 자들에게 구세주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명절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나 역시 이보다 더 기쁜 책임을 알지 못합니다. 분명히 여러분 가운데 대 부분이 이 즐거운 책임을 다해야 하는 필요성올 느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을 막아 예수님께 찬양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악하고도 비겁한 버릇들~여러분 중에도 이런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을 일단 깨뜨려 버리기만 한다면 구속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를 자녀나 친척에게 들려 주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들을 복되게 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은 두 배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가르쳐 줌으로서, 축복해 주시는 성령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정말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하게 되는 그 명절을 지키라고 제가 권고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코 그런 상징적인 명절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평생 동안 예수를 따를 것을 말할 뿐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이 말씀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한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언제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이 시간에도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그분의 희생은 갈보리산 피로 물든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항상 명절을 지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죽임을 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명절을 지키는 데에는 시간과 계절에 구애되지 않으며, 축제나 휴일과도 상관없습니다. 항상 이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오, 주님의 진실한 백성이지만 꺾어진 갈대처럼 희망을 잃은 여러분들에게 내 손을 어깨에 얹고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 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라는 말씀을 들려 주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어디에 속박이 있겠습니까? 절망에 빠져 있는 자는 "아, 나는 너무나 심히 타락해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여, 저는 당신이 그런 줄 압니다. 우리는 그 것에 대해 즉시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자" "그러나 나는 너무나 많은 근심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너무나 불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 양을 죽였을 때 그들은 명절을 지켰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들을 슬프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월절 양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나에게 염려스러운 일이 많구나"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도에게 염려란 무슨 일입니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다" ( 시 55:22)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식탁 위에 떠돌며 주저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런 하피(harpy), 곧 여자의 얼굴과 몸에 새의 날개를 가진 탐욕스러운 괴물처럼 염려로 가득 차 있다면 여분은 명절을 지킬 수 없습니다. 먹이의 새들을 멀리 몰아내고, 아브람처럼 탐욕을 버리고 명절을 지키십시오. "아! 그러나 내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옛날에 지은 죄들이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구요. 여러분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신 후에도 남아있습니까? 확실히 과거는 지워지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은 무겁고 슬픔에 차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갈보리산 십자가가 여러분의 슬픔을 없애 주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셔서 더 이상 저주가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감사의 찬송을 드리지 않으시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명절이 있어야만 하는 까닭은 그들의 유월절 양인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 외에는 즐거운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유월절 만찬에 유월절 양 외에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만찬상에는 이외에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쓴 나물입니다. 분명히 이 나물이 기쁨을 더하여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매운 양념이 아니라 쓰고 얼얼한 나물이었습니다. 이 나물이 입맛을 돋구어 줄 수는 없었지만, 명절에 양과 함께 반드시 있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도 깊은 회개의 뜻으로 쓴 나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죄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쁨은 그분 에 있습니다. 세상은 쓴 나물 외에 어떤 것도 명절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물을 소유하여 잠시 동안 그것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여도 결국에는 고통의 쓴 나물일 뿐입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분명히 쓴 나물이며 예수님만 이 진실한 기쁨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쁨을 누리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셨기에 여러분들이 항상 승리의 찬양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Ⅱ. 일 평생 동안 지켜야 할 명절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살피면 우리에게 명해진 거룩한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성경에는 누룩이란 용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단 한 가지 문제가 될 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죄의 상징이라고 생각됩니다. 누룩은 약간 신맛을 냅니다. 우리 몸에 악의 누룩이 퍼진다면 처음에는 다소 누룩의 맛이 좋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악한 것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누룩이 어떤 진행과정에 있든지 싹 없애버리십니다. 잠시 동안 기쁨을 주는 듯한 죄는 심지어 죄인에게 조차 곧 싫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매우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죄를 미워하시는 지는 우리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무한하신 힘을 다하여 죄를 질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허물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죄를 매우 싫어하시며 진노의 불로 죄를 영원히 불살라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그분의 순수함과 거룩한 본질에 무한한 혐오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를 누룩이라 했습니다. 그 까닭은 죄의 쓴맛 때문입니다. 더욱이 누룩은 부패의 원인일 뿐 아니라 더욱더 부패하게 합니다. 죄는 일종의 부패 입니다. 죄는 사회의 모든 구조를 와해시키며, 인간의 조직을 해체시키기도 합니다. 죄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는 곳마다 혼란과 분열을 가져와서 우수성을 파괴하고 순전함에 해독을 끼칩니다. 누룩 역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갑니다. 아무리 큰 밀가루 덩어리라 하여도 누룩은 발효되어 퍼져나갑니다.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욥 38:11) 라는 것이 없습니다. 적은 누룩이라도 온 덩어리에 퍼져나갑니다. 따라서 누룩은 죄와 같습니다. 누룩이 천사들 사이에 침투해 자리를 잡았을 때 많은 천사들이 지옥에 떨어져야 했습니다. 한 여인이 죄를 범함으로, 그 잘 못으로 모든 인류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한 죄가 인간의 본성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점점 퍼져 나아감으로써 완전하고 철저하게 본성을 박탈하고 타락해 버립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말씀에 따르면, 만약 교회가 악독한 누룩이 들어옴을 허락하게 된다면 누룩은 교회 전체를 통해 퍼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자들 안에 작지만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온다면, 틀림없이 진리에서 훨씬 멀 어지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최초의 잘못된 가르침의 최후의 결과를 점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결코 그런 이교도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여러분이 네덜란드의 제방을 무너뜨리는 바다에게 침식을 그치라고 명하는 것이 나을 것 입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하나의 사슬을 끊으면 전 쇠사슬이 다 부서지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에 관해 기록된 진리의 체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약 2:10) 하나의 진리를 부인하면 거의 반드시 또 다른 진리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조금이라도 어설프게 안다면 복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미래의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것은 밀려오는 불신이란 바다의 한 점 파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로 오는 무서운 모습을 거부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다음 차례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입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는 이것에 대 한 산 증거를 봅니다. 오래지 않아 더욱더 많은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가르침은 암이 퍼지듯이 우리를 침식해 들어옵니다. 말이 아름다운 듯 하나 그 중심에는 복음 그 자체에 대한 심한 악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빨리 발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훨씬 좋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악한 누룩 역시 꼭 같이 교회에 해독이 됩니다. 나쁜 누룩 하나에 관용을 베풀면 곧 다른 누룩도 용서를 받게 됩니다. 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함으로 이 누룩이 교회를 다스리게 됩니다. 교회에서 죄를 용인 한다면 죄를 용서해 주게 되며 곧 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더욱더 나쁜 다른 죄가 교회에 나타나게 됩니다. 죄란 옛날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을 묻혀온 작은 화물꾸러미와 같습니다. 아마 이것은 매우 작은 꾸러 미인듯하지만 그 속에는 런던시민 수 천 명의 죽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낡은 천 한 조각이 병균을 전 시가지에 옮겨왔습니다. 이처럼 여러 분도 만약 죄나 잘못된 가르침을 고의로 교회에 들어오기를 허락한다면, 이 약속이 어디까지 퍼질 것인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될 수 있는 한 부지런히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나쁜 가르침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이 더럽고 부패한 누룩을 교회에서 깨끗이 내보내야 하며, 성직자의 임무가 바로 이런 일을 행하는데 있으며, 그를 돕는 모든 자들도 교회가 이 누룩에서 벗어나도록 지켜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과 관련을 시켜 본문을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이 마음 속 깊이 유월절 때 유대인의 관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목해 보기로 합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누룩을 내어버려야 하는 명령 때문에 옛날에는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家長)되는 자, 특별히 제사에 대해 매우 엄격했던 자들은 일정한 날에 모든 유교병 조각을 찾기 위해 집안 전체를 샅샅이 뒤지곤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일은 저녁에 촛불을 켜서 행해졌는데, 종과 다른 이들이 모든 유교병 부스러기를 찾기 위해 주인과 함께 일에 참가했습니다. 옷을 털었고, 잔을 깨끗이 비웠으며, 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만약 생쥐가 방안을 지나가며 유교병 부스러기를 구멍 안으로 운반한다고 생각나면, 그들은 혹시나 집 안에 액운이 있을까 하여 두려워했습니다. 이들이 이 일에 대해 너무나 엄격하여 주님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꾸짖으신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제거할 때 과도한 규율을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집에서 누룩을 내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 행위, 대화에서 모든 죄를 내버려야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여러분 앞에 놓인 과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죄를 내어버리려고는 애쓰지 않아도 됨에 유의하십시오.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시어 우리의 구원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행하는 데서 우리가 명절을 지키며, 끊임없이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내어 버려야만 합니다. 유대인 가장이 집안에 남아있는 커다란 유교병 덩어리를 즉시 내다 버리던 사실을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제가 죄로 슬픔에 쌓여 있을 때, 이전에 빠져 들었던 명백한 죄들을 완전히 즉시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죄들도 다시는 우리를 유혹하지 못합니다. 음주, 불경함, 부정함 등의 죄를 즉시 한 순간에 버린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후 영원토록 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남겨둔 유교병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들 역시 완전히 내어버려야 합니다. 세상 심판 때, 성도가 개심할 때 바로 내버릴 수 없었던 자그마한 죄들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성도가 이 사실을 알 때 "나는 이 일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됨으로 나는 이 악한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제게 더 많은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큰 고통은 작은 누룩 부스러기로 인해 일어날수 있습니다. 작은 누룩들이 작은 잔에 숨겨져 있을 수 있었습니다. 집 주인이 찾기를 시작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발견했을 때 그는 "이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내다 버리자"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성도들이 마음을 바꾼 후 몇 년이 지나도 자신의 행동에 죄가 있음을 발견치 못합니다. 몇 년 전에는 매우 가볍게 생각했던 몇 가지 문제들 이 지금은 내 양심을 크게 괴롭히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어떤 죄들을 깨달았을 때는 주님의 은총을 통해 내버렸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좀 더 밝은 시야와 높은 관점에서 죄악된 것을 발견해 보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를 이루어 줄 은총을 갈망합니다.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악독한 누룩 부스러기를 조금도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온 힘을 다하여 이 누룩을 모두 없애도록 해야만 합니다. 온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저는 어떤 그림을 본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종은 부엌에서 식기를 깨끗이 하고 있고 부인은 식당에 있는 옷가지와 잔들을 살펴보고 있고, 주인과 그 아들은 찬장과 상자를 열어보며 부지런히 누룩 부스러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의 가게에 있는 모든 누룩을 제거해서 자신은 청렴하고, 정직하며 그의 사업체는 정당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집에 누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올바르지 않아 안식일을 엄수하지 않으며, 종들의 마음이 태연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집안이 깨끗 하다 하여도 침실에 누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부족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위선의 누룩을 제 거하여 정직한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또한 성냄의 누룩에서 자유롭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전히 다른 자들을 용서해 주기에 지체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교만과 시기의 누룩을 깨끗이 치웠습니까?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을 샅샅이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마음씨, 남을 판단하는 일등 모든 것을 깨끗이 해야겠습니다. 묵은 누룩이 쓰며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 버리십시오. 우리가 속죄의 피로 안전할지라도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안전함을 알지도 못할 것이며 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묵은 누룩이 남아 있는 한 명절을 지킬 수 없습니다.
 
흔히 집안의 가장(家長)이 누룩 찾는 일을 했다고 여러분께 말씀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지극히 좋은 판단력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남을 비판하는데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면서 자신을 비판 하는 데는 이렇게 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여러분은 죄를 없애는데 지성을 다하시고 이 묵은 누룩을 없애는 일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시며 주님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분은 레위자손을 깨끗이 하는 자로서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오 주님이시여, 나를 찾아 시험하시고 나의 길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당신은 볼 수 있사옵나이다. 죄를 깨끗게 하시는 위대한 주님이시여, 우리의 육체적 타락을 가져오는 모든 누룩을 없애 주시옵소서. 촛불은 집안의 구석 구석을 비추어 주는 데 사용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따라서 누룩은 이 빛을 피해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촛불이자 성령의 촛불을 지니십시오. "내 친구와 비교해 나를 판단해 보니 잘못 된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기껏해야 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성도에겐 좋지 못한 기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을 비난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비난했습니까? 동료에게 자신을 재어보고 "그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불쌍한 이들에게 부드럽게 대했고 부지런히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난장이나 작은 흑인보다 크므로 그것은 교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사도 바울, 요한, 브레이너드, 러더포드 등과 비교해 보십시오. 심지어 이것이 좋지 못한 충고라 해도 가장 뛰어난 제자와 스승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 의 완전함보다 더 낮은 기준이 있어선 안 됩니다. 우리가 많은 형제들 중 장자가 되는 그분의 모습을 닮기 전까지는 어떤 성취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높은 기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위대한 조력자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잠시 동안 이 일에 대해 여러분이 얼마나 크게 기뻐할 것인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집을 몇 번이나 쓸어내어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한 번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찾고, 또 찾고, 계속해 서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표어는 "살피고, 살피고, 또 살피자"이어야 합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약간의 누룩이 남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있게 된다면 누룩이 발효하여 넓게 퍼져 나아갈 것입니다. 죄는 늘 부푸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죄의 마지막 뿌리를 뽑아버릴 때까지 악은 마음속에 다시 자라나며, 물 냄새를 맡으면 이 악은 다시 싹이 돋고 계속해서 잎이 솟아나게 됩니다. 평생 동안 행해야 할 일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특히 조심해야만 하는 악독한 모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괴악한 것입니다. 성도가 괴악한 자처럼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괴악한 것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에 대해 강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는 매우 예리한 분별력을 가졌고, 그로 인해 칭찬할 만한 신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자기들은 비난 받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다른 자들이 완전하지 않다 하여 그들에게 매우 사납게 나무라며 화를 내는 자들입니다. 비록 자신들이 완전치 않을지라도, 또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 그렇게 했음에 불구하고 이들은 성도의 불완전에 대해서는 좋지 못한 감정을 품습니다. 이들은 편견, 의심, 악의를 품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나타내고 남을 정죄하려 합니다. 이들은 성실하지만 잘못이 있는 자들을 못살게 굴어 나무라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들은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어떤 성도들에게는 불쾌한 말을 하는 큰 누룩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형제간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소문을 퍼뜨리는 데서 다른 이들의 인격에 손상을 주고, 명예를 훼손시키기도 합니다. 이제 옳지 못한 판단과 악담을 썩은 누룩으로 알고 우리들부터 내버려야겠습니다.
 
어떤 자가 나에게 못된 짓을 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그를 용서해야 하며, 그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가 고칠 때까지 나는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랑으로는 그의 마음을 고칠 수 없다면,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희생하신 것과 꼭 같이 더욱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 엡 15:27). 교회가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티나 주름이 있었기에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은 교회를 사랑하여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위선을 지닌 모습은 내어 버려야 한다는데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유월절에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을 먹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경험에 벗어난 이야기도 말며 생각을 벗어난 기도를 하지도 맙시다. 형제들이여! 모든 비실제적인 것에서 우리를 깨끗게 해 달라고 주님께 애원합시다. 그리하면 우리 안에는 참된 모습만 있게 될 것입니다. 성직자든 성도이든 간에 현재보다 좀더 나아지려는 강한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성도라면 조그마한 위선도 미워해야 합니다. 성도가 모든 악의와 외식을 싫어해야 하는 까닭은 이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예수님 과의 대화가 완전히 막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지옥의 누룩이 있는 곳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Ⅲ.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의 행복은 거룩함에 영향을 끼치며 거룩함은 행복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행복이 거룩하게 되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유월절 축제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은 그 모습을 새겨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약 나를 위해 희생당하신 그리스도를 매일 먹는다 고 생각한다면, 행복감에 넘쳐 "하지만 이 행복에 대해 너무나 큰 댓가를 치렀구나. 내 죄가 주님을 죽였으니 나는 내 죄를 죽일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이 주신 구속의 사랑을 맛볼 때마다 죄는 무섭고 진절머리 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음으로 그 죄를 없앨 수 있게 됩니다. 집안에 있을 때와 꼭 같이 앉아 대속의 피가 밖 문설주에 뿌려져 있기 때문에 안전함을 아십시오. 그런데 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애굽의 장자는 죽임을 당하여도 나는 괜찮은데 이제 무엇이 필요한가? 과연 나는 하나님의 장자가 틀림없고 그에게 속해 있구나"라고 틀림없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 고전 6:19~20) 라는 말씀은 천사가 멸망치 않게 하려고 집을 지나칠 때 말한 음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를 위해 죽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나는 그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분의 소유라면 죄 중에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어찌하여 죄의 종으로 계속 있겠습니까? 내가 만약 예수의 것이라면 나는 마귀를 섬길 수 없습니다. 나는 죄를 내버려야만 합니다. 이제 더 나아가 내가 온전히 평안을 느낀다면 내 마음은 평화로워 내 양심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안에서 안심했습니다. 그들은 바깥을 끊임없이 경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설주에 뿌려진 피로 안전하게 되어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안쪽을 살펴볼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선 상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은 이루어 졌으며 나는 은총 속에 자라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성도들도 더러 있습니다. 바깥일을 마친 자는 당연히 집안 일을 살펴야 하며 열심히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는 데에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 두려움에서 얻은 자유는 죄를 철저히 찾는데 꼭 필요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성도들은 교환의 유익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죄의 누룩을 없애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교병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이것 대신에 천사들이 가져다 준 음식을 취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나는 이 죄를 버리겠다. 한때는 이것들이 나에게 달콤했으나 이제는 시고 냄새 나며 부패한 누룩에 불과하다. 나는 좀더 고상한 기쁨을 누릴 것이며 하늘로 가는 자격을 내 몫으로 받으리라"고 말하게 됩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사실을 아는 성도는 역시 죄의 짐을 벗겨주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의 부패함을 이겨내게 도와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갈보리 십자가를 볼 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죄를 없앨 수 있다면 성령은 이 죄를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살아감으로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진 거룩한 평화는 번식해나 가는 죄와 싸울 수 있는 마음의 용기를 심어 줍니다. 우리는 이 죄를 정복해야 하며 우리의 심령을 더럽히는 가나안인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순전하며 완전해야 합니다. 우리를 대항하고 있는 모든 이들보다 그리스도는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룩함을 더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룩함이 행복을 가져온다는데 대해 더 이상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됨을 나는 확신합니다. 사람이 "나쁜 일은 모두 버리고 옳은 일만 했다"고 느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평온하겠습니까! 성도의 깊은 평화는 흘리신 피에서 온다고 여러분께 말씀 드렸지만 그 기쁨은 누룩을 없앰으로 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고 "내가 죄 중에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까? "라고 합니다. 성령으로서 과거의 죄를 버렸다고 진실히 느낄 때 여러분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누룩을 내어 버리고 징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깨끗이 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명절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피로 인해 여러분은 매우 안전했습니다만 이제는 이 안전함으로 인해 행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행복을 잃게 된다면 죄 중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죄에 물들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기쁨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주님 전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나는 때때로 러더포드목사의 훌륭한 편지를 읽고 나서 "나도 이렇게 살면 좋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잘못이거나 나의 잘못일 것입니다. 내가 감히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저지른 잘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종들에게 계시하셨듯이 나에게도 기꺼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이제 이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예수님이 빛 가운데 걸으신 것처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빛 가운데 걸을 수 없도록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흑암 속에 걷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종이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띤 것은 가난 때문에 그렇다고 믿습니까? 성도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병환으로 인해 그런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0년 동안 계속하여 병상에만 누워있으면서 이 고통의 병상에서도 바로 하늘 나라를 발견하는 자들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묵은 누룩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명절을 지키되"라고 하셨지만, 우리에게 누룩이 있는 한 그렇게 하기를 기대해 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의무인 줄 알면서도 정성껏 행하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행하지 않는 자는 우리의 명절을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 눅 12:47). 이 채찍은 저 세상에서 맞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죄를 범하는 신자들이 채찍을 맞는 것은 이 땅에서 입니다. 또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죄를 허용함으로 의도적으로 양심을 범하는 성도에게는 때때로 의기 소침함이나, 패배, 죽음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의 뜻을 게을리한 자와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서는 어디든지 누룩이 있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에 마음을 너그럽게 한다면 그분이 주는 위안의 말씀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길과 반대로 걷는다면 그분도 꼭 그렇게 하실 것 입니다. 여러분과 그분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없다면 어떻게 동행하여 걸을 수 있겠습니까? 죄를 조심하지 않아 심령의 유익함이 없어진 자가 우리 중에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시여, 양심을 잘 지키십시오! 양심이 마비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겨울 연못과 같습니다. 초겨울에는 얼음이 매우 얇게 얼지만 얼마 후면 도시의 절반 무게도 지탱할 만큼 단단해 지게 됩니다. 얇은 것이 여러분의 양심을 덮지 못하도록 조심하십시오. 성령의 조그마한 호흡에도 움직일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조용히 풀어놓으십시오. 매우 민감한 식물처럼 되어 죄가 건드리면 잎을 완전히 닫고 하나님이시자 주님께서 계시면 활짝 벌릴 수 있도록 구하십시오. 틀림없이 하나님은 허락하여 주십니다.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기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곰곰히 생각하십시오. 누룩을 내버린다 해서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후에 행해져야만 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회생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그분의 피가 문설주에 뿌려지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이후에 죄를 내어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을 얻고 싶으시면 나쁜 목적으로 시작하지 마시고 구세주의 속죄의 피로 시작하시며 갈보리 십자가로 시작하십시오. 불쌍한 죄인이기에 그 곳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명절을 지키자"라고 하며 누룩을 없애 주시는 그 분의 강하신 능력을 확실히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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