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교회론

교회(V) 교회의 본무(本務)(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27

교회(V) 교회의 본무(本務)(2)

 

교회,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

 

( 10:4)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교회의 본무(本務)가 거룩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교회의 본무(本務)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 일주일 동안 거룩을 열심히 연습하셨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목록을 적어가며 연습하셨습니까? 어떠셨습니까? 잘 되던 가요? 시도도 안 해 보셨나요? 제가 설교하고 저 만 하고 있나요?

머리로만 알고 있고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시던데.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영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증으로, 즉 계약금으로 와 계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고 그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나라, 국가라는 것은 그 요소를 국민 주권 영토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 국민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통치가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리학에서도 작용 반작용이라는 뉴턴의 법칙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통치가 있으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 통치에 굴복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이미 그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자리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잘 믿고 그 분이 살아내신 그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주까지 우리가 내린 결론이지요?

 

오늘은 교회의 본무 두 번째 시간으로 참 교회들은 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 수 밖에 없고 그 삶을 소원하는가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합니다.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강도, 도둑놈, 사기꾼 등 악당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면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 잡을 곳이 없는 사람도 정작 예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그가 정말 알곡이라면 그 사람은 매일 매일 조금씩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안간힘을 쓰며 거룩을 향해 일어섭니다. 참 교회들은 범죄 했을 때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고민 하게 되며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켜라 하신 것을 지키고 싶어 하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을 금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2장에 천국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왕이 종들에게 길거리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불러 모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잔치에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묶어서 어두움에 내 던져 버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진짜들은 예복을 갖추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인 거룩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다 어두움에 내치게 되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까?

주인이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려 두었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종들이 와서 주인님 밭에 가라지가 많습니다. 뽑아버릴까요? 합니다. 주인이 보더니 “음 원수가 와서 뿌리고 갔구나.” 합니다. 그리고는 알곡까지 뽑히지 않도록 놔두라고 하지요?

언제까지 그냥 두라고 하십니까? 추수할 때까지, 그리고 “추수할 때 다 태워 버리자” 하십니다. 이 땅에 종말이 올 때까지 교회 안에 가라지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13:47-50)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렇게 교회 안에는 가짜들이 늘 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열심히 앉아있기도 합니다.

(벧전4:16-17)

16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17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9:5-6)

5  또 그는,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성읍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쳐서 죽여라.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가엾게 여기지도 말아라.

6  노인과 젊은이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들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라.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가라지 들을 다 죽여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어디서부터 죽이면서 갑니까? 성소에서부터 성전 앞에 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가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짜들이 저마다 자기는 진짜인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심판 때 그들이 어떻게 한다고요? “주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맞는 것인 줄 알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심판에서도 “주님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하고 따지고 듭니다. 불쌍한 거지요. 평생 동안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하고 그게 옳게 믿는 것인 줄 알고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잘 못 간 거예요. 왜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가짜들을 그냥 놔두실까요? 그 가짜들이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요?

구속사를 잘 보세요.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면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야 말로 참 승리였습니다. 사탄은 이스라엘을 실패시키면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그를 애굽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민족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쓰셨습니다. 가라지 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우리 교회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교회를 더욱 든든히 하고 훈련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진짜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 순종의 자리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 삶을 사모하게 되는지 제가 오늘 그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간혹 교회 안의 사람들이 구약의 율법을 들고 와서 “이거 우리가 지켜야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돼지고기 안 먹어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십일조를 내야한다고 합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어떤 것은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되는지 알 것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딱 아홉 개밖에 안 되는 단어로 된 굉장히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복음에 관한 성경 교리가 다 들어있어요. 참 놀라운 것입니다. 교리 적인 측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복음의 핵심을 농축시켜놓은 것이 로마서 10 4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복음의 대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살핌으로써 복음의 요체를 다시 한 번 명쾌하게 정리하고 우리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심 되는 두 단어는 ‘율법’이라는 단어와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율법의 마침이 됐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 두 가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선 ‘마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텔로스’라는 단어인데요, 원래 ‘텔로’라는 말은

멀리 있는 목표를 말하죠. 그래서 우리가 망원경을 텔레스코프(telescope)라고 말하죠. 텔레폰(telephone)이라는 말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리가 가 닿도록 한다는 이런 뜻이 있어요. 그래서 ‘텔로스’라는 말은 멀리 있는 목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라는 의미와 함께 ‘성취 혹은 완성’이라는 뜻이 있고‘종결 혹은 마지막’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율법은 뭔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목표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율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토라” 하면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구약이 완성된 이후에 구약을 기술적으로 나눌 때 “토라” “느비임” “게투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모세 오경 부분을 “토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토라”라고 쓸 때는 “율법” “하나님의 법” 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토라”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무엇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지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하나님의 법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3400년 전에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푸셨습니다. 해방되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들에게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온 인류의 대표로서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고, 원래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시내 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디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절대 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라는 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과일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벌거벗은 몸에다가 거룩이라는 흰옷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을 했고 그 벌거벗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의의 흰옷을 입히시는 전 과정이 기록된 것이 성경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까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을 어떻게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가시는 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던 의도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 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바, 너희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라!”라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에요.

워낙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에서 법()이라는 개념을 일단 다 떨쳐버리세요. 율법에 대해서 여러분이 법칙, 규칙이라는 말을 일단은 버리세요. 율법 안에 뭐가 있냐하면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말은 또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워낙 지녔어야할 성품이라는 말과 같죠. 그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온전한 성품이 율법에 그려져 있어요.

십계명은 매우 간단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부모를 공경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계명이라기보다 원래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지어진 인간의 원래 적인 성품, 삶의 모습이 거기 묘사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말하자면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의 성품이 있는데 타락하게 되어 많이 망가져 있잖아요? 그래서 완전한 성품인 그 율법을 보면 내가 얼마나 일그러졌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거 지키면 구원해 줄께”가 아니라 “너희는 못 지킨다. 그러니까 ‘난 이런 불가능한 자입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라, 그 때 내가 해결책을 제시 하마“ 이런 의도로 주신 것입니다.

(7: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렇게 율법을 통해서 내가 저지르는 것들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기의 허물을 잘 보지 못해요. 그리고

로마서 7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7:9)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내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율법이라는 거울을 보니까 내가 너무너무 흉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나는 너무너무 망가진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망가진 것을 고치고 또 그렇게 망가지도록 내가 하나님께 반역했던 죄를 용서받고 정말 회복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것을 가능케 해주시는 하나님께 겸손하게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그러한 인간의 온전한 모습을  담은 법, 규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뭐를 주셨냐하면, 희생 제사, 속죄 제사의 방법을 자세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인간이 정말 그렇게 살아야 마땅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무엇인가 하면 사형입니다.

‘살인한 자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여라.’ 뭐 여러 가지의 형벌이 나옵니다. 율법에서 죄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묘사를 했지만 그 근본 뿌리가 뭡니까? 죄의 본질이 뭡니까? 불순종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죄가 되어 전 인류가 죄인이 된 것입니까? 과일을 먹은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법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가지라도 지키지 않으면 인간은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이고 그것은 사형입니다.

(2:10-11)

10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전체를 어긴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 "간음하지 말아라"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비록 간음은 하지 않아도, 살인을 하면, 결국 당신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지켜져야 합니다. 형량이라는 것은 그 죄를 범한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아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것으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의 머리를 쥐어박으면 고소당합니다. 부시 대통령의 머리를 쥐어박으면 그 자리에서 경호원들에게 사살됩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죄를 지어도 사형입니다. 그 하나님이 너무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림이란 말은 상징적인 말이에요. 왜냐 하면 유대인들은 생명이 피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어요.

레위기에 이렇게 말씀해요.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 그래서 피 흘림이란 말은 생명을 잃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 생명을 잃음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

 

! 이 대목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탁 주시지 왜 헛갈리게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제시하고 동물의 피로 드리는 희생 제사를 주고 한참 지난 뒤에야 예수를 보내셨는가? 그런 질문 안 해보셨어요? 왜 성경을 십자가부터 시작하시지 구약을 거쳐서 한참 뒤에야 십자가를 보여주십니까?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의 점진 성이다 그렇게 말해요. 계시의 점진 성!

우리가 만일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이 원리를 설명하려고 할 때 유치원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가장 단순한 그림으로, 그냥 크레파스로 종이에다가 “여기 구름이 있지. 여기 비가 이렇게 내려.” 이렇게 밖에 못 그려줘요. 그런데 이것을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학교 들어가면 조금 달라지죠. 중학교 들어가면 구름이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가 있고 부딪히면 소리가 나고 불빛이 생기고 하는 것이라 설명할 수 있겠지요? 더 지나서 이제 대학교나 대학원에 기상학과에 가면 훨씬 더 정확하고 깊고 그런 넓은 지식으로 그 기상 현상을 설명해 줍니다.

구원 계시는 생각보다 퍽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를 바로 탁 제시했다면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이게 뭔가?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아주 희미하고 예비적인 계시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어겼을 때 누군가 대신 죽는 희생 제사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의 계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라고 자꾸만 우리에게 사인을 보내주고 있는 셈입니다. 갈라디아서 3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19-21)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즉 타락한 죄 지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좀 보라고 거울로 주신 것이라는 거죠.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중보는 누구입니까? 중보는 모세죠) 모세에게 천사들이 갖다 줘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만일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였다면 인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의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게 됐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성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못할 것을 뻔히 알고 계셨고 그들이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죄 성에 절망한 나머지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 숙이고 나오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정말로 구원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계속 가리키고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은 율법이 가리키고 있던 바 그 목표에 도달했다는 것이죠.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분의 살아가신 생애와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그 사역을 통해서  율법을 처음 주실 때 하나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계획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될 수 있는가를 보겠습니다갈라디아서 44절입니다.

(4:4-5)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율법 아래 오셨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어야 됐을까? 인간은 율법에 묘사된 그러한 온전한 성품을 가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일 수가 없어요마태복음 5 48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이렇게 말했어요.  perfect! 하나님 아버지께서 perfect하신 것처럼 너희도 perfect해야 된다. 그러니까 정말 그 성품에 있어서 완벽한,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답고 성결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안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는 불행히도 타락해 있습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자들은 출생할 때부터 영적인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더럽고 망가진 존재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묘사된 것 같은 그런 온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아무도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낼 자는 없다는 것이고 율법은 그냥 거울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거울!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확증해주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함께 율법 아래 놓였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할 궁극적인 성품인데 아무도 그렇게 살아 낼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시고 내려오셔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살아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보세요.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죄를 씻을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원래 신약성경에서 세례라는 단어 자체가 연합을 말하는 것이에요. 연합! 유니온(union), ‘어떤 것과 같은 성질이 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말은 우리와 같이 되어 주셨다는 상징입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의 신분으로 자기를 낮추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예요. 이제 죄인의 대장이 되어서, 대표가 되어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실존 안에 품으시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자신을 우리와 일치시킨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어요. 전적인 순종.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간의 가장 완전한 삶의 모습을 사셨어요. 원래 율법이 그려내고자 했던 바로 그 삶을 살아내신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에요. 불순종이 모든 죄의 뿌리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율법대로 사신 삶의 핵심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완벽한 순종이었습니다그 순종의 절정이 뭐냐 하면 십자가예요. 빌립보서 2장에 보면

(2:5-7)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정말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했었는데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하게 순종하셨는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순종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십자가는  우리가 받았어야할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시려고 구약시대에 인간들에게 율법과 희생 제사라는 것을 주신 것입니다.

(10:1)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구약시대에 소를 잡고 양의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는 그것을 상징으로 보여주셨지만

그것은 ‘정말 완전한, 단 한번만 드려도 영원히 효력이 있는 완벽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분이 온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님 자신은 죄가 없는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례 받으심으로 우리와 일치, 연합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것이에요. 돌로 쳐 죽여야 할 간음한 여인의 죄가 되셔서 흙에다가 예수 님 자신의 이름을 써넣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돌에 맞아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잔인한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를 만족시킨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완벽한 아름다운 인간의 삶을 그대로 살아내심으로써 성취하셨고 또 그렇게 살지 못했던 우리들의 죄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도달하고 성취하셨어요. 그래서 율법은 이제 정죄의 기능으로서, 우리의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폐지됐다 그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2 14절입니다.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죠.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 율법을 성취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외치셨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고, 그 부분에 대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approve하신 것이 부활이에요. 그것이 로마서 4 25절이죠.

(4:25)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완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살아서 못 나옵니다. 예수께서 살아 나오셨다는 것은 그 제사가 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십자가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바 됨을 부활로서 확증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처음 주셨을 때 그 마음에 품으셨던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마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었습니다. 의의 흰 옷이 입혀 진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마치 땅에서 뿌리 뽑혀진 나무처럼, 그 나무가 얼마 있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리듯이 그 나무가 다시 땅에 심기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난 자연적인 인간은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땅에, 하나님 나라로 가서 심겨져야 되겠는데 그 가운데는 엄청난 계곡이 있어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거기는 넘어 갈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거기를 넘어가려면 의가 필요해요. 의라는 다리가 필요해요. 만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즉 율법에 나타난 그 인간의 모습을 완벽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의가 되요. 그래서 그 사다리로 하나님께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성경이 말했고, 여러분과 저의 실존의 삶이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의를 만들어서 그 사다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에 기독교 구원 진리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어요. 바울 신학의 가장 요체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union christ)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고, 초경험적인 사건이고, 은혜 중의 은혜예요그분과 연합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그가 행하신 모든 일, 그가 하나님께 드린 온전한 율법의 순종,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6:3)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굉장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우리 옛사람은 죽었어요. 그리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러한 그 엄청난 은혜, 신비의 극치인 이 은혜의 선물을 누가 받느냐는 것이죠. 여기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10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그 엄청난 ‘의’라는 큰 위대한 다리를 누가 선물로 받느냐? ‘믿는 자’라는 거예요. 믿는 자! 지구상에 태어났다 죽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인간 중에서 오직 믿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그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 자라는 말에 유의를 해야 되요이 안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안 되느냐?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는 그 말속에 삼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만 믿으면 안 되느냐? 그건 안 됩니다. 구원받지 못해요. 지금 바울이 구원 문제로 애타하는 대상이 누굽니까? 유대인들. 이들은 하나님을 너무 잘 믿었어요.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 안에서 선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해도 안돼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시고 성취하심으로 그리고 그분이 나와 연합되어있기 때문에 나도 그분처럼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과 그분의 온전하신 의와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선한 일들, 또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세요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하신 일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님 안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의해서 완전히 정죄 된 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요내가 율법이라는 거울을 봤을 때 너무나 망가진 송장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에요왜냐 하면 그것이 아니면 그리스도는 필요 없어요여러분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면 그 이면에는 나는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말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새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6: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켜서 십자가에서 같이 죽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죠. 새사람은 이제는 율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 이미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 완벽하게 이루신 율법의 모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되어서, 율법을 이루어서 하나님께로 가야겠다는 이런 생각은 전혀 필요 없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아니 그 이전에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내가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고 생명으로 충만한 삶인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해 주셨던 많은 하나님의 성품과 삶의 방식과 교훈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서 그렇게 살기를 즐거워하겠죠?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어린 아기입니다. ‘야내가 하나님의 의를 다 받아서 하나님 안에 살게 된 자로서 이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일까?’ 고민해 봅니다. 잘 모르죠, 금방 태어났으니까. 아기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 아니, 율법 속에, 율법에 쓰인 이 방법들이, 이것이 기가 막힌 방법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은 이렇게 됩니다. 시편119편입니다.

(119)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3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127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믿는 자들 참 교회들, 가라지가 아닌 알곡들은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율법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것이 뭐 꿀처럼 달고 금보다 더 귀하고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그것이 그냥 나의 법칙으로, 지키지 못하면 벌 받을 수밖에 없는 법으로 있을 때 누가 그것을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은 다 사라지고 내가 믿는 자가 되어서 모든 의가 다 내게 와서 이제는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어서 다시 율법을 보니까 이건 너무나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정말 신나고 너무 복되고 너무 행복한 삶이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살고 싶고, 그러니까 이것을 밤낮 보고 싶어지고, 그냥 달고 귀하고 이렇게 된다는 것이에요살아가다가 또 실수하고 실패하고 잘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많이 어겨도 괜찮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리 실패해도 결코 정죄가 안 되는 완전하고 영원한 보장이 딱 주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이제는 우리가 기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그 사랑하는 분이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신 그 리고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칙도 아니고, 그렇게 못 지키면 벌 받는다는 그런 법도 아니고, 우리의 친근한 동무요 길잡이요,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죠.

우리 참 교회들은 그런 거룩한 것들이 몸에서 배어 나와야 합니다. 툭 치면 나오고 툭 치면 나오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신자들은 툭 건드리면 나오는 것이 “아멘” “할렐루야”입니다. 그런데 삶은 개판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지 말고 그렇게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무 입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0:4)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헬라어로 아홉 단어밖에 안 되는 이 구절 속에 복음의 모든 내용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주 상기하시고 묵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