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고난(II) 피할 길은 있는가?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18

그리스도인의 고난(II)

 

피할 길은 있는가?

 

(고전10:12-14)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유사 이래로 종교가 타락하면 네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성직자가 많아지고 두 번째로 종교 기관이 많아지며 세 번째로 종교가 기복이 되고 네 번째로 그 종교집단이 이해 집단화한다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종교 기관이 많아지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운영해야 할 돈이 필요하게 되고 그 돈을 갖다 바칠 사람들을 모아서 꼭 붙들어 두려면 청중들이 듣기 거북해 하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청중을 붙들어 두려면 청중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복” 이야기로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단은 각자의 욕심과 배를 채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당연히 전체가 이해집단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기 위해 상대방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던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든 회교도들의 과격한 포교 활동, 국가 문화재인 불상의 코를 잘라버리는 유치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집단화 되어버린 종교의 타락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현재 미국 서부에만 목회를 안 하고 노는 목사님들이 이천 오백 명쯤 되고 캐나다와 미국 서부에만 삼천 명이 넘는 목회 지를 못 찾은 목사님들이 있다고 합니다. 웬만한 교회에서는 저마다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검증되어지지 않은 목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

현재 한국의 신학생들의 숫자를 다 합치면 전 세계 신학생들의 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정말 우리나라는 말세에 즈음하여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화란의 어떤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밖에 모른다. 첫째가 하나님, 둘째가 자기 자신, 셋째가 돈이다’

정말 잘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주일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예배, 매일 있는 새벽 예배, 구역예배, 수련회, 부흥회 그야말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예수에 미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를 다른 나라 신학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고 혹평을 하고 간 것입니다.

비단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기독교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부터 그렇게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스땅달의 적과 흑이라는 소설을 보셨습니까? ()은 추기경의 붉은 제복을 말하는 것이며 흑()은 범관의 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추기경의 붉은 제복을 택할 것인가? 법관의 법복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되어도 충분히 축재하며 권력을 휘두르며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젊은이들은 성직자가 될까 법관이 될까를 놓고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타락은 그 종교를 이기적이고 이해타산 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 본질이 흔들리니까 예수를 믿고 나의 생활이 윤택해지지 않고 오히려 고난이 닥치면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진짜 하나님이 있긴 있는 거야?”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 까지 합니.

(16:17-18)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고전6:13)

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보세요.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배를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정작 신은 자신들의 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먹을 것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늘 실망하며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이, 고통이, 시험이 필연 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을 도와주는 분으로 몰고 가면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의 삶은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병이 걸리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정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칼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예수님 때문에 갈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자기 백성의 거룩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가차 없이 쳐버리실 것이기 때문에 가족 간에도 불화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입니다.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행복을 깨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구제와 선행을 명령하시는 것도 그런 기독교의 본질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천국 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정말 그 본질을 알고 있느냐” 하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14:15-17)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나라, 신자의 신자 됨의 본질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인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인색하게 되지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가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인색을 뛰어 넘어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신자의 본질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형제와 자매를 돕는데서 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구제와 선행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지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독교의 본질이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남의 부러움을 사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처지나 상황이 왜 그렇게 이 공동체 안에서 크게 부각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반드시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은 꼭 행복해 져야 하고 , 그렇지 못하면 뭔가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열심 있는 교인의 아이가 대학에 떨어졌을 때 금방 어떤 공격이 날아가느냐 하면 “교회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아이가 대학에 떨어져, 그 사람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아직 뭔가 해결되지 못한 것이 있는 거야”라고 공격을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장로님이 비즈니스가 어렵게 되면 “ 저 장로님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 한 게 있나봐”라고 수근 거립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혼을 한 사람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서 다닙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왜 이혼을 해“ 이렇게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뭔가 평범한 데서 떨어져 나온 사람처럼 여기게 공동체가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울도 그런 억울한 평가를 자주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계속 가짜라고 쫓겨났습니다. 걸핏하면 매 맞고 걸핏하면 감옥에 가고 걸핏하면 굶기 일쑤였습니다. 그럼 바울은 신앙이 뭔가 잘못 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까?

(1:14-21)

14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15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16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17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18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갇히자 “거봐, 저 사람이 진짜라면 어떻게 저렇게 가두어 놓겠어, 우리가 진짜야”하며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울도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걸핏하면 옥에 가두게 하시고 가난에 시달리게 하시고 병에 시달리게 하시는지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본질이 아님을 알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시는 것”이 신자의 본질임을 강조하고 설파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약한 자, 힘없는 자가 되고 고통과 고난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있는가, 아닌가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9:19-23)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유대 사람들에게는, 내가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작은 자, 약한 자가 되기도 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나, 경건의 모양이나, 형식적인 외양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본분이며 본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이나 처지, 고통, 고난, 시험은 나의 신자 됨의 근거나 판단 기준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므로 그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지요.

진짜 영원한 곳을 알고 있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부귀영화나 고통이나 고난 환란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인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는 욥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 주시지요?

“네가 무엇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너에게 이런 저런 고난이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십니까? 단박에 물어보시는 것이 ‘네가 내가 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

바다가 넘칠 때 그것을 막고 경계를 놓은 게 누구냐? 광명과 흑암의 처소가 어딘 줄 아느냐?

네가 우박 창고를 가 보았느냐?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느냐? 누가 번개를 치게 하느냐?‘등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 던져진 욥에게 그의 무지함과 작음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크심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것은 제가 우리 강아지에게 뉴턴의 만유인력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연히 우발적으로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작정과 예정과 섭리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표 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천국에 가서 섰을 때 우리가 지나온 인생을 비디오처럼 보게 될 날이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한 점 한 점이 우리를 그 천국에 서게 하기 위한 꼭 필요한 길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지만 우리 성도의 삶에 반드시 고난과 고통과 시험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피할 길은 무엇일까요?

먼저 고린도 전서10장 전체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살피고 그 안에서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의 오늘 본문 이전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죽고, 간음을 하다가 죽고,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0:11-14)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그리고 11절에 그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게 기록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러한 일이 오늘날도 일어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 아닙니까?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시험이 그리고 고난이 닥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어구입니다. 여기서 감당할 시험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안뜨로 피노스’입니다. 그 것은 누구나 흔히 겪는 시험이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겪는 시험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시험이 오면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고 힘들어들 합니다. 아닙니다. 자기가 겪는 시험이 제일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누구나 그만큼의 고통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오는 감당할 시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위폽페로’ ‘to bear’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는 단어입니다. 거기까지 정리를 해보자면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시험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견뎌 낼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견뎌 낼 수 있는 시험들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갓 젖병을 뗀 사람에게는 그가 견뎌낼 수 있는 시험이 유치원을 졸업한 이에게는 초등학교 입학시험만큼의 시험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중학교 입학시험만큼의 시험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대학교 입학시험만큼의 시험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치원 졸업생에게 감당하기 힘든 대학 입시를 치르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에게 온 시험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은 그 수준에 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히려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 속에 계속해서 우리의 성화를 위한 고난과 시험이 있으리라는 것을 10절이 힌트 해 줍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겨우 하나를 견뎌 내고, ‘이제 나는 어떤 시험이 와도 걱정 없어’ 그렇게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죽고 남은 자들 중 거기서 간음한 자들이 나온 것을 잊지 마세요. 간음한 자들이 모두 죽고 거기서 하나님을 시험한 자들이 나온 것도 잊지 마세요. 우리의 삶 속에는 끊임없는 완성을 향한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 어디 사이에 들어가 있는가 보세요.

그 앞에는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고 간음을 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케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 구절이 역시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살펴 본 것처럼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인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의 네 가지 사건이 모두 그 인본주의, 나를 위하는 것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나의 필요를 얻기 위해 어떤 나보다 강한 대상에게 대가를 주고 부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우상은 필요한 것을 주고 대가를 받되 다른 요구는 하지 않는 것이지요. 반면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가요? 하나님은 우상처럼 대가를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뭔가를 계속 요구하십니다. 다름 아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에게 자기들이 뭔가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뭔가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자꾸 시험을 보시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시겠습니까?

(5:8)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요구와 계획, 우리의 욕심과 계획 사이에서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와 계획을 무시하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우상의 이름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리가 도모하는 것에 하나님의 분노가 격발케 됩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분노로부터의 피할 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서의 피할 길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성도의 성숙에 꼭 필요한 것인데 하나님이 그 성숙의 길을 피하는 길을 주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10장의 네 가지 실패의 사건 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죽음을 당한 사건이 민수기에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시험의 피할 길이 뭔지 구체적으로 살펴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314장에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포함한 열두명의 가나안 정탐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은 가나안에 대한 엉뚱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우리는 절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아낙 자손들이고 거기는 네피림이 있어 우리가 그들 앞에 서면 우리는 메뚜기 같이 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그 땅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여호와가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자고 이스라엘에게 고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듯이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가 피할 길인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14:8-9)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바로 이것이 피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주실 때 반드시 그 것을 이길 수 있는 길도 함께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정탐꾼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은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의 말로입니다. 거기서 건짐을 받은 자들, 즉 피할 길로 가게 된 자들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자들입니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승리임을 안자들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시험을 당할 때 절대 승산 없을 것 같고, 다른 이들이 볼 때 나를 지지리도 복도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꼭 멋진 승리의 모습으로 비쳐 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것과 만나와 메추라기로 우리를 먹이신 것과 반석의 물로 마시우게 하신 것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이 시험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피할 길인 것입니다. 그것은 갈멜산의 엘리야의 승리처럼 멋지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처럼 처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갈멜산의 승리와 스데반이 죽음, 어떤 것이 진정 승리의 모습인가요? 둘 다입니다. 우리의 삶에 스데반의 죽음 같은 순종이 요구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 분명 패배처럼 보이는 그 죽음이 엄청난 승리의 모습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또한 패배처럼 보이는 승리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에게 승리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패배의 모습으로 비쳐질 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의 사람인 것입니다.

피할 길을 “우리가 감수해야 할 고난과 고통과 시험으로부터 도망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을 향해 가야 하기에 반드시 지나야 할 문턱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계획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모른 척하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처럼 죽어 가는 모습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분이 요구하시는 거룩으로 한발 한발 가까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