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고난(I)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18

그리스도인의 고난(I)    고통 없는 지옥

 





(1:29)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이신 헬무트 틸리케 목사님이 미국을 두루 여행하며 설교를 하신 후 미국에 대해 느낀 점을 이야기 해달라는 질문에 “그들은 고난에 대해 부적합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고난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한 번 재고해 봐야겠지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일단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은 다 사라지고 행복과 평화가 내 삶에 올 것이라는 착각들을 합니다. 그것만큼 위험한 발상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 삶의 고난은 당연히 신께서 막아주셔야 한다고 우깁니다. 실제로 버트란트 러셀이나 볼테르 같은 anti-christian들은 인간들이 겪는 전쟁과 기아, 범죄, 질병을 막아주지 않는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기독교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에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을 즐겨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고난과 고통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조키스트 류의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 없는, 고난 없는, 시험 없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그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로 한센 병(나병, 문둥병 이라고도 한다)환자들입니다한센 병의 특징은 인간의 몸에 있는 통점들이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들이 감염이 되어 가면서 전혀 통증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 한센 병입니다.

우리 몸은 알게 모르게 통증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눈을 오래 부릅뜨고 있으면 눈이 시려서 눈물을 흘리게 되거나 눈을 깜빡이게 됩니다. 고통이 눈의 시력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손이 난로 가까이에 가면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난로에 데지 않게 손을 얼른 불러들입니다. 역시 고통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뼈가 어긋나면 통증 때문에 우리는 팔을 묶어 목에 맵니다. 우리는 고통 때문에 더 이상 뼈가 어긋나지 않게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은 때로 우리를 더 큰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센 병 환자들은 고통을 모르기에 시력을 잃기 일쑤입니다. 그들은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면서 빗자루를 쥔 손에 너무 힘을 주어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알지 못합니다. 너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가도 뜨거움을 모르기에 그냥 그 물로 세수를 하다가 화상을 입기도 합니다. 고통이 없기에 일어나는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고통들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할 수 있고, 핀으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묘기를 친구들 앞에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은 그만큼 위험합니다. 고통이 없는 삶이 생명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소원은 고통을 느껴야 할 때 고통을 느끼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멸되어져 가는 고통의 상실을 막기 위해서 치료를 합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고통은 이렇게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어나는 고난과 고통과 시험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목숨 값으로 지불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좀 과장을 한다면 우리를 그 아들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도대체 우리가 뭘 했다고 우리를 위해 그러한 희생을 감수하시는지 우리는 천국에 올라가기 전에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사랑을 입었고 사망에서 건져졌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을 막아주시지 않으실까요? 그 분은 분명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하셨고 우리의 삶에 분명 간섭하고 계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데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왜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냥 두고 보시는 것입니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엘리 위젤이라는 유태인 청년이 쓴 "The Night"라는 소설에서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닥친 고통을 차마 끝까지 견뎌내지 못하고 “하나님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나의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지금 아무 일도 안하며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은 그 고통들을 방치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까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많은 고난이 여러분의 삶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때마다 막아주시던가요? 아닐 때가 더 많지요?

그렇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그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드세요? 오늘 그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관해 잘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책에서 우리는 절대 그 이유를 확실하게 다 밝혀 낼 수 없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CS Lewis도 그의 책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에서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 것이라고 원론적인 결론만을 내리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나 추측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 그 고통의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며 고통을 겪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등을 지고 이제 세상과 원수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한 자들이므로 당연히 세상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이야기 합니다.

(5:10-12)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24:9)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벧전5:9-10)

9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11:35-38)

35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고통에는 우리의 범죄 함으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징벌(懲罰)이 아닌 징계(懲戒)이며 그 징계는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는 개념보다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 인생에 던져 넣으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에게 거룩의 옷을 입히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를 자식답게 만들어서 천국에 넣고 싶으셔서 이 인생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땅은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세워진 잠정적이며 임시적인 가건물에 불과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온통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에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 거룩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가 순종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가차 없이 우리를 징계하셔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조명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징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으로 고통으로 올 수 있습니다.

(12:5-11)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세 번째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과 시험이 오는 이유는 우리의 잘 잘못을 떠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강한 백성으로 연단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고통스런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순화시키는 데 기여를 하는 것이지 절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1:5-7)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그렇지요? 고난의 정확한 이유가 나오지요? 우리 성도들을 정금 같은 순전하고 순결한 백성으로 연단하시기 위해 성도들에게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일 기회로 쓰시기도 하십니다.

(9:1-3)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역시 성도의 연단을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험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해 줍니다.

(고후7:8-11)

8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곧 후회하기는 했지만,

9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을 당함으로써 회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슬퍼했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없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징계하는 정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이 닥쳐오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벧전4:12-13)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이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과 환란과 고통과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확인만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게 사탄의 공격이든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이든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든 모든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에 기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나아야 하며, 모든 병은 다 귀신이니까 그 귀신만 쫓아내면 병에서 놓여난다고 하면서 감기귀신, 치질귀신, 종기 귀신 쫓아내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사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제를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고통과 고난과 시험의 원인은 하나님이다”

맞습니까? 어때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은 전부 하나님이 주시는 것 맞아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과 고난은 모두 우리의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전부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류의 죄라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이 고난의 조성 자가 아니시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은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질병, 전쟁, 살인, 약탈, 방화, 강간 모두다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창조해 내신 것은 없습니다. 나의 죄이든 다른 이의 죄이든 하여튼 인간의 죄가 인간의 고통을 배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러한 우리의 죄의 결과들을 우리의 선을 완성시키는데 이용하실 뿐인 것입니다.

(1:14-15)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사시는 이 LA에서 밤에 아무 거리나 활보하며 걸어 다닐 수 있나요? 공항에서 비행기 한번 타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졌습니까?

왜 집집마다 방범창이다, 쇠창살이다, 방범 알람이다 이런 것이 설치되어야 합니까?

왜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신무기는 개발되어야 하며,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요?

왜 경제는 일어났다 주저 앉았다를 반복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왜 질병들은 점점 더 고약해 지고 있습니까? 그 모든 원인은 죄인인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강도와 살인을 낳고 우리의 나태함과 식탐이 비만과 성인병을 만드는 것이고, 우리의 이기심이 불안과 불편함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드셨냐고 질문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왜 신은 지금 이 상황을 연출해 내는가?”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렸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우리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를 간과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피해자이고 하나님이 가해자인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댄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피해자입니까? 진정한 피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가해자는 타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몰아낸 것도 인간이고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자들도 인간들입니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란 말입니까?

고통과 고난과 시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한센 병 환자들이 그로 인해 더 큰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죄악 된 세상이 토해내는 고통의 사건들이 감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죄가 만들어 내는 더러운 배설물들이 폭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고통으로 경험되어 지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과 시험이 없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거기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긍휼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자비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우리가 감내해야 할 인내가 필요할까요? 서로를 위한 격려나 위로가 필요할까요?

너그러움, 친절, 온유, 용기, 순종 등등 우리의 삶 속에서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무런 고통이 없는, 고난이 없는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학습되고 경험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워야 할 덕목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을 절대 잊지 마세요.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절대 잊지 마세요.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이곳에서의 무사태평, 행복, 번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분명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니까, 내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일일거야”라고 감사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감지하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로움에서 멈춰 서 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지 못해 난로에 손을 익혀 버리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시력을 상실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엄지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록 삽질을 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 발가락이 썩어 떨어져 나가는 데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는 영적 한센 병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까지도 감사하라는 것이지요.

 

1963년 미국 장대높이뛰기 세계 챔피언이었던 브라이언 스턴버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날 트램플린에서 훈련을 하다가 잘 못 떨어져서 목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전신 마비 환자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 절망에 빠진 젊은이를 잊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신마비 환자가 되고 3개월이 지난 후 브라이언 스턴버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의 삶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예수를 알지 못하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주는 사람과 전신 마비 환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과 누가 더 축복을 받은 사람인가요? 만일 제가 브라이언 스턴버그의 삶에 일어난 그 사고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가요? 아닙니다. 우리 조금만 더 영적으로 세상의 사건들을 바라봅시다. 내 사지를 잃어 예수님을 얻고 영생을 얻었다면 그 보다 더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물질주의, 성공주의, 패권주의에 젖어 있기에 그러한 영적 안목을 수시로 놓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나에게 영화롭게 될 우리의 몸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것은 항상 아련하고 낯선 개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완전히 나을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될 기회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사십년 쯤 지연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영화롭게 되는 그 날, 그날이 어떤 날인지 나는 그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날, 나는 나의 두발로 서서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신앙고백입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28살에 진보적인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8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됩니다. 사형대에 묶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러시아 정교회의 첨탑에 올려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묘한 감정이 그에게 올라왔고 그 순간 황제의 특사가 소설처럼 등장해서 그는 사형을 면하고 시베리아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도중 그는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십자가를 궁금해 하게 되었고 성경을 한권 얻어서 유배지에서 그 성경을 열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신앙을 바탕으로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은 걸작을 썼던 것입니다. 두 작품의 주제는 모두 죄와 인간과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분명하게 성경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 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참말보다 그가 거짓이라고 증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고난에 대한 반응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이 인생은 너무나 짧은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저 세계로 우리는 던져질 것입니다. “지옥과 천국”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다음시간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만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시는데

그럼 피할 길도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 고난을 피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