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찬송하리로다.
(엡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주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평강과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서는 평강과 은혜를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하게 확인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강과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배우신 이러한 교리들을 잘 숙지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무 자격 없을 때에 은혜로 우리들을 불러내시고 거룩하게 구별시키셔서 성도라 부르시고 믿는 자, 신실한 자가 되게 하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평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은 즉각적으로 그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로 그 ‘찬송’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바울은 3절을 뜬금없이 ‘찬송하리로다.’ 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용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찬송하리로다.’ 하고 시작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찬송의 내용이 3절부터 14절까지 자세히 설명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많이 하는데 찬양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는데서 나오는 감격이 찬양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할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하신 일을 알아야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분이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그저 감정이 격해져서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 찬양을 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신학을 몇 개월 하다 그만 둔 한 찬양사역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학이 오히려 신앙을 망쳤다’
신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부가 신학입니다. 다른 거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공부하는데 왜 신앙이 망쳐집니까? 그 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두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신학교에서 가르쳐 지는 신학이 엉터리로 변질되었거나
두 번째로 체험적인 신앙으로 시작해서 순 체험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와 자기 신앙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 분이 그렇게 이야기 하셨을 수 도 있습니다. 그저 계속해서 신비적인 체험만 주면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신학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슬람이 믿는 하나님이나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이나 불교가 믿는 부처나 힌두교가 믿는 브라마나 매 한가지입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신비적인 체험이나 하게 해 주면 그 존재를 좇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도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호4:6)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 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6:3)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성경은 이렇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망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지 알지 못하고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데 무슨 찬양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유대인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유대교를 믿고 있는 유대인들의 찬양이 어떤 찬양이겠는가?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힘을 가진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을 위한 지상의 왕국을 건설해 주리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요즘도 헐리웃 거리에 가면 토요일 날 검은 옷에 중절모나 빵떡모자를 쓴 유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치성을 드리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부른 노래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수용소에서 불렀던 노래는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염원이지 그건 바른 찬양이 아닌 것입니다. 엉뚱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찬양일 리가 있습니까?
잘 보세요. 그럼 사도 바울이 지금 3절에서 외치고 있는 찬송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는 것인가?
그 찬송의 이유가 적혀 있는 것이 바로 4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4절에서 14절까지는 우리의 신분이 삼위 하나님의 열심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본문을 보시면 우리의 신분이 어디서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 누구냐?’는 질문에 ‘난 국회의원이다’‘난 의사다’‘난 판사다’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직업이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50년 후에 당신은 여전히 국회의원일까 물어보면 금방 ‘내가 그때까지 살겠어?’ 합니다. 그럼 50년 후까지도 보장이 안 되는 직책이나 직업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은 좀 어리석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럼 여러분은 ‘당신 누구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 하나님 아들이요, 하나님 딸이요’ 이렇게 자기의 신분을 정의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신분은 50년이 아니라 5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신분입니다.
누가 자식에 대해서 물어보면 ‘우리 아들 하버드 다녀’‘우리 아들 변호사야’ 이렇게는 대답하지만 ‘우리 아들 그리스도인이야, 그 아인 정말 참 복음을 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이렇게 자랑하는 사람 별로 못 보았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아들이라도 세상 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으면 자식 이야기 할 때 슬쩍 피해서 나가는 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는 우리 삶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신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 서두에서 큰 소리로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찬송은 일부러 만들어 내는 찬송이 아닙니다. 그랜드 캐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그 장엄한 광경에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하다못해 설악산에 가서 단풍을 보아도 우리 입에서 ‘우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생각할 때마다 좋아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 바로 찬송인 것입니다. ‘우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 정말 좋아 죽겠네.’ 이게 바로 찬송의 본질인 것입니다. 조금 유치합니까? 아니요. 유치하다니요. 그게 바로 찬송입니다. 그러한 자기 신분의 자각과 그로 말미암는 감탄이 없는 자들은 절대 찬송을 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한 번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신분이 그렇게 바뀌게 되었는가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전체가 복음에 관한 설명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꼭 기억하세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찬송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는데 4절에서 6절까지가 하나님 아버지의 하신 일이고, 7절에서 12절까지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며 13절과 14절이 성령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라고 찬송을 하는데, 그 찬송을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잘 읽어 보세요. 거기에 우리가 한 것이 한 가지라도 있습니까? 그 찬송의 내용인,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에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일은 모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로 그일, 우리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사도는 감격스러운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조금 각색을 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을 유년 주일학교 학생 취급하신다고 기분 나빠 하실 필요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목사의 설교는 항상 초등학교 육학년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회의를 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무리의 우리 백성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이, 안식을 누리게 해주자’ 그렇게 계획을 세우시고는 그 일의 시행을 성자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에 의해 완성이 된 구원의 선물을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적용시키시는 일을 성령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 역사적인 하나님 백성 만들기의 장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된 영역의 창조로 시작이 됩니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우선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것들 안에 틀을 만드셨습니다. 물과 뭍을 나누시고 빛과 어두움도 나누셨으며 그 각각의 틀을 풍성하게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성부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그 사람들 중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운행하시고 경륜(經綸)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삼위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아는 자가 어찌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존재하지도 않았던 티끌에 불과한 우리들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시고 그 계획된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보내시고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것이 믿겨지도록 우리의 심비에 그 놀라운 복음을 새기고 계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가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 일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글이나 말로 설명할 때 그 시작을 달리 무엇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는 누구이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면 ‘찬송하리로다.’로 밖에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겐가 복음을 설명하실 때 어떤 마음과 어떤 감정으로 시작을 하십니까? 정말 감격스럽고 복받쳐 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실 수가 없어 ‘찬송’으로 시작을 하세요? 우리가 참 너무 복음에 무디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냥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우리가 무엇을 좀 깨닫고 성실하게 살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향해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 앞에 더욱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께 호감을 갖기도 전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만 좇고 있을 때, 아니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알지도 못 했을 때 우리이름을 불러서 생명책에 기록하셨다는 것 때문에 더욱 감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낙제 점수밖에 줄 수 없는 자인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낙제 점수 받은 자로 여기지 않으시고 100점 받은 자로 여겨 주신다는 것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침상에서 통곡하면서 뭐라 고백합니까?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꼴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자를 ...’하고 가슴을 치는 마음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라는 것이다. 그렇게 처절하게 가슴을 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놓으신 일을 떠올리게 되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감사 찬송’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찬송을 듣고 싶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 정말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시군요’라는 찬송의 소리를 듣고 싶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4절부터14절까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기술하면서 그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지요? 6절과 12절, 그리고 14절을 다시 보시지요.
(엡1:6,12,14)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정확하게 나오지요? 우리는 구원을 너무 감상적이며 이기적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해하면서 ‘나’에 초점을 맞추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오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송을 받고 싶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의 목적은 피조물들이 피조물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잘 반사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엄위하심과 존귀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1번이 무입니까? 이제 우리 교인들은 다 외우셨지요?
거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에게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아, 그 분이 세워 놓으신 질서 아래에서 그 분을 찬송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가 우리의 신앙에 방해가 된다는 소리를 합니까?
그러면 우리 3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이 왜 그렇게 찬송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엡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3절은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셨습니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믿음이 좋아서입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열심히 지켜나가셨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잘 새겨두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동일한 언약을 하셨습니다.
(창22:17)
17)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26:3-4)
3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28 :14)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의 실체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복‘’바라크‘의 재공급입니다. 여러분 이제 잘 아시지요? 누구로 말미암아 그 언약이 성취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그림자로 모형으로 설명되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 언약을 완성하셨기에 이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 새 언약의 완성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절에서는 ‘God our Father’‘우리 아버지’인데, 3절에서는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예수님은 한 형제다.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신 예수의 형제로 자매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서 서론에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며, 한 형제라는 기술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족보가 참 많이 나오지요? 그런데 예수님 이후로 족보가 기록된 것을 보셨나요? 못 보셨지요? 그 이유를 아세요? 족보란 것이 무엇입니까?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계속 내려가는 게 족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후로 성령으로 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의 형제요, 자매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서 이제 족보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요20:17)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히2:11)
11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안, 자들이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렘11:1-4)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2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3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 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히8:8-10)
8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9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10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옛 언약은 율법 아래에서의 언약을 말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면 살고, 율법을 지키면 축복을 얻는다.’ 당연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의 언약 하에서 이스라엘은 계속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새 언약을 주시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완성시키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시키시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 하는 것입니다.
즉 구약, 옛 언약은 신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되어지지 않는 구약은 저주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찬송하리로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바울의 표현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구속사의 그림자를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예수의 하나님과 예수의 아버지로 이제 그 모형과 그림자를 원형과 실체로 보여주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사람들과 신약의 사람들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을 아십니까? 모세가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을 아세요?
(히11:39-40)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이 그림자로 어렴풋이 보고 따르던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보고 그 실체를 확인한 자들인 것입니다.
(히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렇게 우리는 약속의 실체를 받은 자들입니다. 구약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지 못하고 간 예수를 우리는 이렇게 명확하게 그 실체를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유대인처럼 애들 키우자고, 그들을 본받자고 세미나까지 합니다. 우습지요?
그리고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데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신다고 하십니다. 자,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복이 나왔습니다. 그 복, 하늘에 속한 복이 무엇인지 오늘 잘 배우고 가세요.
먼저 일반은총이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산상수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비추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분명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공통적으로 내리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돈, 명예, 건강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들에게도 공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일반은총의 범주에 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에게만 내리시는 복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축복을 설명하실 때 예수가 오시기 전이므로 물리적이며, 임시적이고, 외양적이며, 실물적인 것으로 설명을 하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 수준의 어린 아이들에게 형이상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사과나 연필 등의 소품을 이용해 설명하는 것처럼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복은 양과 염소의 숫자와 소유하고 있는 땅의 넓이와 자식들의 숫자, 그리고 육신의 건강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복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실체이신 참 부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런 것으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직접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셔서 이해시켜주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복의 개념을 구약 식으로 실물 적이고, 임시적이며, 외양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참 복은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 백성의 신분, 즉 구원, 영생인 것입니다. 그게 신령한 복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인들이라 자처하는 어떤 무리들이 원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여전히 구약적인 이 땅의 것들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대는 구절이 있지요?
(신28:1-14)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복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옛 언약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러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복은 죄인들인 우리 인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복입니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지켜지고 그 삶을 전가 받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누릴 복을 은유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잘 보세요. 지금 읽으신 부분을 잘 보시면 그 복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시는 땅에서 주신다고 나와 있지요? 이렇게 그 복은 천국의 그림자로 구약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말하는 하늘의 신령한 복은 우리가 앞서 공부한 4절부터 14절까지의 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우리가 읽었던 신명기 28장의 복을 비교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복을 좇고 있으세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못내 못마땅하셔서 이 땅의 복을 여전히 좇고 계세요? 아니면 사도가 말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찬송하고 감격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신약을 살고 있으면서 구약의 복을 좇고 계세요? 그 그림자를 아직도 실체로 보고 좇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늘의 복으로 행복해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벧전1:3-4)
(3)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빌3:18-20)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 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라는 말을 씁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개 같은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그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음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도 그런 개 같은 이방인이었음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감격적인 복을 제쳐두고 왜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시려 하십니까?
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앞에 ‘모든’이라는 말이 보이세요? 우리에게 하늘의 복이 100% 다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20% 누구에게는 40% 만 준 것이 아니라 100% 다 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100점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온전한 하늘의 복을 모두 받은 하늘 시민 여러분 뭐가 부족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만 본 구약의 다윗도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의 실체를 본 우리가 왜 매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데 왜 나는 이렇게 늘 부족한가?’ 이러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 성도의 삶이 뭔가 부족한 것처럼, 복을 더 받아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은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심하세요.
(롬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이 주어져 있는 것 같지 않지요? 아니 모자라도 한 참 모자랍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 땅에 살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만 주신 것입니다. 안 주신 것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는 데에 별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해 하시면 안 돼요.
(엡1:23)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우리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의 충만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우리가 없으면 충만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존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예수님은 충만이 아닌 조금 부족한 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고집스러운 하나님의 열심을 여러분 아세요? 그토록 우리의 신분은 견고한 것입니다. 그게 안 기쁘세요? 그 충만한 복을 받아놓으시고도 여전히 자신들의 문제만 바라보실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하늘의 충만한 복을 이미 받아놓은 사람들이기에,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죽을병이 걸려도 그렇게 슬프지 않은 것입니다. 조금 가난해도 기죽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만 만족한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혹 구약적인 복을 좇고 있으셨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떠한 복을 받으신 분들인지, 삼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의 신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 했습니다. 그럼 우리 이제 복 받은 자로서 그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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