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도, 신실한 자
(엡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 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은혜가 무엇이고 평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1절을 살펴보려 합니다. 1절에 보면 사도는 편지의 수신자를 두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성도’이며 두 번째가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이라고 사도는 기독교인들을 describe하고 있다.
먼저 성도라는 말에 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를 가리킨다. 거룩하다는 말을 때로 도덕적으로 착하고 순결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윤리적 의미의 거룩은 참으로 협의의 정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원래 하나님의 신성과 크심과 위대하심 등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죄악에 빠진 인간에게 쓰여 지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늘의 것들의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거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이라는 단어를 ‘구별된’이라는 뜻으로 쓰는 것입니다. 구별이 되었다는 것은 어디로부터 구별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바로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늘의 것으로 만들어져 가기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쓰이는 기구들을 ‘성구’라고 하고 시내산을 ‘성산’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 지도록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것들이라는 면에서 성구라고 하고, 성산이라 하는 것이지 산이 착해서 거룩한 산이라고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성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구별되어져, 하늘의 것들로 지어져 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도(聖徒)’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에서는 소수의 몇 사람에게만 그 ‘성(聖)’자를 붙여 줍니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 성모 마리아, 성 베드로 등등 소수의 성자(聖者)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건 틀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성자(聖者), 혹은 성자(聖子)들 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존귀한 분들입니다. 소수의 성자들에게 주늑 들지 마세요. 그래서 바울이 지금 에베소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성도(聖徒)라고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갈1:4)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골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렇게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져서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온 자들을 성도라 합니다. 하나님과 하늘의 것들에게만 쓰여 지는 그 ‘거룩’이라는 단어가 드디어 죄인들 중 어떤 무리들에게 쓰여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성도라는 말은 우리의 죄 사함이 확인되어진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죄인들에게는 쓰여 질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으로 옮겨진 자들이라면 그들에게는 당연히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공존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죄가 씻겨 진 자들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도’랍니다. 우리는 죄가 없는 하늘의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좋지 않으세요? 우리가 우리의 꼴을 보면 여전히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거룩한 무리’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찌 된 것입니까? 누군가에 의해 도말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완전한 의를 입은 자, 즉 성도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품에 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40일 만에 정결 예식을 행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완벽하게 율법을 지켜내시는 그야말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완벽한 삶을 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게 되어졌고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엡1:7)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진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마음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겔36:26)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 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지고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새 마음으로 바꾸어 놓은 자들, 그래서 세상과 구별이 되어져서 세상 사람들이 좇는 것들을 좇아 사는 자들이 아닌 하늘을 소망하며 사는 자들을 ‘성도’라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교회를 좀 다닌 사람보고 ‘성도’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지요? 교회에 얼마 안 다녔어도 ‘집사’‘권사님’ 해드리면 으쓱하는데 ‘아무개 성도’라고 이야기하면 굉장히 기분나빠합니다. 제가 전에 부목사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주소록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나이 드신 집사님 한분의 명칭이 아무개 ‘성도‘로 표기가 되었습니다. 그 분이 교회 사무실로 찾아오셔서 노발대발 하셨는데 그 이유가 자신은 안수집사인데 주소록에 성도라고 표기가 되어서 창피해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웃지 못 할 무식한 행위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호칭인데 그 것을 창피하다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의 교리의 이해 수준이 이정도이다 싶어 참으로 암담했었습니다. 아닙니다. 성도라는 말은 정말 귀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정확하게 성취된 말이 아닙니까?
(출19:6)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 에게 고 할지니라
(벧전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 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거룩한 무리’‘성도(聖徒)’로 만드시겠다는 것을 언약의 핵심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언약이 성취된 단어가 바로 ‘성도’라는 단어인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많은 민족들 가운데의 한 민족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그들은 뭔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갖지 못한 어떤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이후에 독특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백성들이 되었으며,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가지지 못했던 것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별된 백성이요, 세상 안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닌 사람들이요, 하나님에 의해서 소유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것 같이 보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유독 이스라엘의 역사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그들만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고 선택되어져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데에 쓰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주관을 받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관 하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세상의 정신이나 사고방식에 주관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상과는 다른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살아있을 때 세상은 그들을 보며 영향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고통과 짐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성도가 성도답게 존재하는 데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지 우리의 열심과 노력과 언변과 설명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한 자로 잘 지어져 가며 그 거룩의 삶을 나타낼 때에 그 길에서 전도와 선교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이렇게 성도와 세상 사람들이 구분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까? 성도들이 구별된 자들답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 다른, 구별된 모습이 보여 지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궁금해 하며,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궁금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가 어떤 곳입니까?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치던 자들이었다. 그 곳은 마술과 요술이 자행되던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에베소를 찾았을 때 열 두 명의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령이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이신지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즉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 에베소가 나중에 사도 요한의 일터가 되었습니다. 이교도들로 꽉 찬, 거만과 교만이 흘러넘치던 에베소에 성도 몇 사람이 그 도시에 생기니까 결국 그곳에 교회가 생기고 하나님의 일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는 그렇게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성도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세상에게 영향을 받아 세상과 방불한 불순종의 자녀들처럼 살고 계십니까?
이제 두 번째 용어인 ‘신실한 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실한 자들이라는 용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도마의 이야기로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샬롬이라고 인사를 하시고 두 손과 두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지요?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하는데도 자기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기 전에는 절대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이리 내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믿는 자’라는 말이 ‘신실한 자’라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신실한 자’란 ‘믿음을 행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실한 자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자들입니까? 다시 사도행전 19장으로 가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행19:1-5)
1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니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멋진 사람, 선한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세상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은 자들, 즉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신실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부자 되게 해주시는 예수를 믿고, 병 고쳐 주시는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의 삶 속에 기적을 일으켜 남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자기의 일만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주시는 그런 알라딘 요술램프의 거인 같은 예수를 믿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초라한 나사렛 예수가 독생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이며, 그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고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어떻게 다 맞을 수 있나? 성경도 오류가 있는 것이고 신화나 설화 같은 이야기는 그냥 웃고 넘어가라, 우리는 거기에서 이 땅을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교훈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골든 클락 박사의 ‘장로 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나폴레옹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가 프랑스 혁명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가 되었으며 유럽을 정복하고 러시아를 침공했으며 워털루 전쟁에서 패했고 조세핀과 결혼했으며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는 전설적인 사실은 믿지 않는다. 나는 그를 보지 못했고 그 시대에 살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나폴레옹을 확실히 믿는다.’ 지금 이 사람이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정말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실존했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나폴레옹의 업적과 생애를 믿어야 나폴레옹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바꾸어 설명해 볼까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각색해서 옮겨 보겠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이나 이적, 그리고 부활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의 탄생이나, 예수의 업적이나,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도 믿지 않으면서 무슨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그 모든 일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지금은 거룩한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복귀하셨고, 이제 속히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을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하고 그들을 ’신실한 자들‘’믿는 자들‘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있느냐 안 다니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와서도 얼마든지 다른 잡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착하게 살고 있는가, 아닌가?‘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우리 성도들의 궁극의 목표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하게 잘 사는 것이라면 우리보다 더 착하게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그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지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않았던 간디나 슈바이쳐도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깨끗하고 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것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착하게 사는 것,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너무 가난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게 무슨 복음(福音)입니까? 무거운 짐이지요. 성도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는 해방이 되었어요.‘라는 복음을, 그리고 그 복음을 완성해 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신실한 자들은 그렇게 확고부동한 믿음의 소유자들이면서 그들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하도 교인들한테 사기 당했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 말하기가 참 어색합니다. 요즘 TV에 나오는 범죄자들의 종교는 왜 다 기독교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세상 사람들 등을 치지 않습니다. 자신은 이미 너무나 귀하고 복된 것을 소유하고 있기에 그깟 세상 것들 조금 손해 보아도 속임수나 사기나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세상은 ‘믿을만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건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이해한 만큼 그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향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신실한 자들은 믿음이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활활 타는 화형대 앞에서도 ‘가이사는 주’라고 한 마디 하는 것조차 거절하며 확고하게 믿었던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이 ‘신실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맞다 면 그 믿음이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흔들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신실한 자들’믿는 자들‘은 경제적인 희생이나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요동치 않는 참 믿음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아주 잘 믿는 것 같았던 사람들이 어려움이 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종종 보지 않습니까?
제 친구 중에 평소에 예수를 너무 잘 믿는다는 평판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비로 오랜 기간 선교 활동도 했고 하와이 DTS까지 다녀 온 사람입니다. 참 극성스럽다 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생활을 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암이 걸렸습니다. 가장 고통스럽다는 직장암이었습니다. 직장이 막혀 옆구리를 통해 배변(排便)을 하는 삶을 오래 살았습니다. 요즘 그 친구가 뭐하는지 아세요? 기 수련에 빠져 있답니다. 그 튼실한 종교적 열정이 다른 곳으로 쏠린 것입니다. 자기가 그러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했는데 하나님이란 분이 자기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럼 그동안 그가 믿었던 시간과 그가 믿음의 열매라고 내어 놓은 여러 가지 업적들이 다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가짜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형대에 묶어 놓는다 할지라도, 아니 사자 굴에 넣으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그 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놓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믿음을 소유한 ‘신실한 자들’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은 하나님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삿대질을 해대는 그런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실한 자들’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사신 삶이 나의 삶이 되고 내가 사는 이 엉터리 같은 삶이 예수님께 전가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도말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합니다. union christ에 관해서는 교리 설교에서 우리가 아주 자세히 살펴 보았기 때문에 성경 구절만 몇 개 찾아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롬6:3-11)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들을 우리는 ‘성도’라 하고 ‘신실한 자’라 합니다.
(엡4:15-16)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나와 예수가 한 몸입니다. 그 관계를 떠나서는 절대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천국 문 앞에서 하나님께서 너 ‘내가 요구하는 율법 다 지켰어?’ 하고 물으시면 여러분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예수 안에서 난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럼 네가 네 육신으로 저질러 놓은 죄 값은 ?’‘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갚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 예수의 이름만 대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이 놀라운 자유, 이 홀가분한 자유를 여러분 정말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안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믿을 만한 일입니까? 우리 조상도 아니고 팔레스타인의 목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다 도말해 버렸다는 것을 자기 상식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믿겨 집니다. 이게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학습으로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믿어진다는 것이 암 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원래 아담 안에 있던 자가, 그래서 아담과 함께 영원한 죄 속에 거해야 할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신비입니다. 복된 신비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예수가 나이고 내가 예수가 되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합니다. 나와 예수님의 관계가 그렇고 여러분과 예수님의 관계가 그러면 우리들끼리 관계는 어떠한 관계입니까? 우리 각자가 수직적으로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 모두는 수평적으로도 한 몸인 것입니다. 그건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어야하며 서로의 기쁨을 공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내는 그러한 모습은 교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발톱이 빠지면 발톱만 아픈 것이 아니라 ‘나’가 아프듯이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나누어지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이며 ‘신실한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모두 천국에서 그러한 삶의 원리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 삶을 맛보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죄로 말미암아 갈라지고 분열되어 버린 죄인들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가 된, 재통일이 된 하나 됨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이라는 말을 equation으로 놓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에도 있고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LA에 존재함과 동시에 저 천국에 살고 있는 자들이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늘 보좌 우편에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이며 동시에 그 하늘에서의 완성된 삶을 배우기 위해 이 땅을 살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부분은 주일에 강해 될 요한 계시록에서 상세하게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already, not yet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에 천국시민으로 들어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 영적 현실이 바로 우리 믿음의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믿어진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겪는 고난쯤이야 한 여름 낮의 꿈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곧 이 양육의 꿈이 끝나면 우리는 진짜 현실인 영원한 하늘나라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기셔야죠. 우리의 그런 고귀한 신분을 설명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그 신분을 아는 만큼 그 나라 시민처럼 살아내게 되는 열매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그런 존재이면 이 땅에서도 그렇게 되도록,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지’ 하고 조금씩 변해 가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날 천국에 보내주시겠지’가 아니라 ‘나의 신분이 이미 그렇게 정해졌으므로 난 거기에 걸맞게 살아야해’로 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들 열심히 노력해서 ‘성도’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성도다.’ 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니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약3:14-18)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나는 하늘에서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거짓도 없는 자니까 이 땅에서도 거짓말하지 말고 화평을 이루며 순결하고 성결하게 살도록 노력해야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지고 나니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먼저 나오고 신실한 자들이 뒤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한 자들이 되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시켜 놓으시니까 우리가 신실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교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작정 속에서 예정하시자 우리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고 그 결과 우리가 ‘신실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순서를 잊지 마세요.
어떻게 우리를 성도로 만드시고 어떻게 우리를 신실한 자들로 만드셨다고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을 사는 자들이고 그 하늘을 사는 자들의 수준에 걸 맞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 알았으면 오늘부터 어깨 탁 피고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십시다. 다른 이들이 개뿔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히죽히죽 거리냐고 물어보면 ‘니들은 몰라’ 그리고 한 번 더 웃어주세요. 언젠가 그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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