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받을 교회(II)
(창6:1‐8)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생육과 번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성경이 어떻게 유기적이며 점진적이며 모형론 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고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자 명령이었던 그 생육과 번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떠난 타락한 인간들에 의해 심판의 근거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혼에 의한 부부관계와 가정이라는 것을 통해 새 생명은 어떻게 탄생이 되는 것이며 그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되기까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를 보이시고 그들에게 ‘남편들은 아내들을 목숨 걸고 사랑해 주고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목숨 걸고 순종하라’는 명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그러나 새 생명을 배태하고 출산해야 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고 얼마나 순종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폭로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결혼은 그렇게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순종, 그리고 은혜로의 부르심,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배움과 실천과 양육의 장(場)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결혼이라는 것이 우리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주권이 폭로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오롯이 드러나게 되는 성숙과 양육의 장으로 의도하신 것이라면 인간들이 그 결혼을 추악하고 더러운 쾌락과 자랑의 도구로 삼았다고 해서 심판을 하시면 안 되잖아요?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혼의 목적 중에 인간의 불가능함이 폭로되는 면이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그 결혼을 엉뚱한 쾌락과 자기 과시의 도구로 썼다고 해서 심판을 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거기서 또 은혜의 교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결혼의 목적은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러하다고 해서 인간의 죄가 묵과 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자신들의 사랑 없음과 불순종이 확인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인간의 죄가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것이기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는 그들의 그 불순종의 죄로 인해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와 불신자의 똑같은 행위가 한쪽에게는 은혜를 깨닫게 되는 도구로 한쪽에게는 심판의 근거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인지 아시겠지요? 우리도 불신자들과 똑같이 심판의 자리로 떨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심판의 물을 예수께 부어 버리시고 그를 익사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이 발견되어질 때 한없는 은혜의 장중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그가 무엇을 했는가?’ 즉 'what you did'가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 ‘who you are' 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힘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악한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노여워하고 계신지를 배워야 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여전히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이끌림에 의해 점점 세상의 삶의 원리와 정 반대되는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게 되고 그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로 발길을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위에 앉으려는 그 무질서 속의 힘의 원리는 하나님의 노여움의 불에 반드시 소멸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드리면서 오늘의 본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으로 생육과 번성의 명령을 주셨을 때의 상황 속에서의 결혼이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 아버지께 목숨 걸고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도록 그러한 자들을 많이 낳고 번성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의 순종이 전제 되어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잘 순종하여 생육하고 번성을 했으면 그러한 순종의 자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들 스스로가 자기 삶의 왕이 되고자하는 삶을 살게 되자 그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불순종의 죄 속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바로 좇아 하나님 아버지께 목숨 바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의 방법으로 주어진 결혼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 찾은 쾌락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족시켜야만 하는 인간들에게 쾌락과 자기 자랑의 도구로 전락을 해 버렸던 것입니다. 환언하면 인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를 만족시키려 하는 힘의 원리를 자신들의 삶의 원리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죄의 뿌리, 불순종의 세상을 다 심판하여 죽여 버리시겠다는 의지를 노아의 홍수 사건 안에서 섬뜩하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러한 힘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무죄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은혜를 믿음으로 깨닫게 된 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힘의 원리가 발견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감사가 그들을 그 힘의 원리에서 꺼내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가 되셨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배우고 깨닫고 고치고 성숙시켜 가야 할 것은 내가 나를 지키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들이 유구한 역사를 통해 만들고 쌓아놓은 세상의 힘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만이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깨우치고 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이 우리 속에서 향기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성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가난하고, 실패하고, 질병에 시달리면서 사실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길에서 이 세상의 힘의 원리로 사는 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께 나의 모든 것을 의뢰하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다면 그 삶이 바로 복 받은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의 힘을 삼아 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인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는 심판의 구체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생육과 번성을 이러한 식으로 변질시켜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이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라는 학설입니다. 실제로 구약에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기가 된 곳이 있지요?
(욥1:6)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보시다시피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지요?
(욥38:6‐7) 6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하나님의 천지 창조 전에 이미 창조된 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쁘게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천사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의 아들들도 천사들일 것이라고 여러 학자들이 주장을 했습니다. philo나 josephus, Martin Luther등이 그러한 주장을 한 분들입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요?
(마22:29‐30)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분명 천사들은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육신이 있는 존재들이 아니고 영적인 존재들이라 그들에게는 결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합니까?
뿐만 아니라 만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이라면 최후의 심판의 모형으로 주어진 노아의 홍수 심판이 천사들의 타락에 의한 것이 되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천사들의 타락 때문에 주어지는 것인가요? 아니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인간들의 타락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의 모형인 노아의 홍수 때 ‘땅에 기식하는 모든 것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만일 천사들의 타락 때문이라면 천사들만 모조리 죽이시면 되지 않아요?
두 번째 학설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라는 학설입니다. Augustine이나 Jerome 그리고 John Calvin이 그러한 학설을 지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학설이기에 오늘날 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학설입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인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그들과 마구잡이로 결혼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주장이지요. 거의 대부분의 주석서들과 강해 서들이 이 관점에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학설에도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타락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노아의 홍수 심판은 최후의 심판의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이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성도의 견인 교리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도 크게 금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 땅에서 세상 것들을 의지하며 그 것들을 힘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을 대표했던 이 땅의 왕들이라고 봅니다.
성경에는 이 땅의 왕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자주 표현을 합니다.
신정(神政)국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왕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재판장(출21:6)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고 왕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기도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편 2편을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 때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시편 2편은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메시아 시편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시편 2 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의 명칭을 왕에게도 스스럼없이 갖다 붙였습니다.
(시2:6‐7) 6 "내가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7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대관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들을 낳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왕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신이 스스로 자기 삶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악한 꿈이 집약된 자리가 왕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인간의 악한 의도가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왕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을 힘으로 삼아 기고만장하고 살아가는 모든 타락한 인간들의 대표요 상징인 세상 왕들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최후의 심판의 근거가 딱 들어맞게 됩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이 세상 것들을 힘으로 삼아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를 짓는 모든 죄인들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들을 아내로 삼아 버립니다. 여러분, 왜 굳이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대조적인 표현을 썼을까요?
지금 성경이 독자에게 주지시키고 싶은 것은 인간들이 타락을 하여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들 사이의 질서를 깨버렸다는 것을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단어들을 동원하여 웅변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이며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땅의 인간들인 피조물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무질서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만 간파(看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다 취하였다면 역시 심판의 대상인 사람의 딸들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2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무엇을 보았다고 합니까?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하지요? 사람의 딸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내세우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딸들이 내세웠던 ‘아름다움‘은 히브리어 ’토보트‘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앞서 배운 히브리어 ’토브‘의 여성 복수 형용사입니다. 그 뜻은 ’감각적으로 예쁜, 감각적으로 즐거운‘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외견상의 아름다움만을 지칭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판단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성숙함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감각적인 섹시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딸들은 자신의 내면의 성숙이나 아름다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치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자들이 내세우는 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뭐예요? 역시 세상의 힘입니다. 여자는 완력으로는 남자에게 안 되니까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사로잡아 버리지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인치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는 변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력의 남자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바로 여자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을 힘으로, 무기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시도가 나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의 딸들도 다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딸들은 외적이며 감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며 그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 했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감각적으로, 외견상으로 아름답고 보기 좋은 여자들은 그들이 결혼을 했건 말건, 그들이 어떤 성품과 인격을 가진 자이건, 그들이 어떤 신을 섬기건 상관없이 전부 아내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빠하루’는 ‘선택하다, 고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는 ‘그들이 선택하는 모든 자 중에 아무나’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우면 아무나 아내로 택해서 그들의 욕정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키며 세상의 힘으로 다른 이들의 것을 함부로 취하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런 곳과 그러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비단 노아 시대만의 문제일까요? 오늘날에도 사회법이라는 것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고 있고 금전적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사회법이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고 금전적 체력적 능력이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것을 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행복은 피상적으로 멋져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많이 모으고 쌓는 것뿐이거든요. 그게 다 뭡니까? 그게 바로 ‘죄’의 실체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선악과를 먹어버린 아담의 모습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그 아담의 죄가 모든 죄의 뿌리이며 정체이니까요.
그래서 1절의 ‘사람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하 아담’인 것입니다. 아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아담’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문맥상으로 보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에서의 ’사람’은 아담을 포함한 아담 이후의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단어는 ‘하 아담’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낙원을 상실한 바로 그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아담이후의 모든 타락한 인간들을 가리키면서 첫 번째 아담도 동시에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최초의 아담이 저지른 범죄나 그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저지른 범죄가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교리)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는 인간들의 모든 죄는 바로 그 유일한 뿌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질서를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자기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축적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자신을 자랑하고 군림함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밟는 세상의 힘의 원리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한 번에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본질이며, 뿌리이며 정의(定意)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첫 번째 아담이 저지른 바로 그 죄 속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두 심판 받아야 하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잖아요? 여러분이 지금 열심을 내는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욕심과 쾌락과 자랑을 위한 것들 아닌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당신께서 택한 백성들을 불러내셔서 예수님 안에 넣어 십자가에서 다 죽여 버리시고 새로운 ‘하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저주 받을 첫 번째 ‘하 아담’에 속한 사람에서 이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두 번째 ‘하 아담’에 속한 분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게 복된 소식, 복음(福音)인 것입니다. 이게 안 기쁘세요?
그걸 아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전히 아무런 죄책감 없이 힘의 원리를 사모하며 추구하며 사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거기서 나온 분들이?
그래서 제가 자꾸 성경을 통하여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공부하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한 만큼 그 사람은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을 분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인간들이 힘으로 삼고 있는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먼저 세상 사람들이 정의 하고 있는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힘‘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를 자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나 수단”을 힘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돈입니다. 그리고 명예, 미모, 완력 이런 것들이 인간들이 힘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지요. 사람들은 그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모으고 쌓기 위해 한 평생을 다 보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그런데 우스운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젠가 온전히 찾아 올 것이라고 믿는 그 행복을 위해 평생 안 쓰고 안 입고 열심히 모아서 결국 자기를 흡족하게 만족시켜 줄 행복을 맛보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행복해 지기 위해 평생을 모은 돈은 죽을 때 한 푼도 못 가지고 갑니다. 왜 수의에는 주머니를 안 만듭니까?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다고 하루에 다섯 끼 먹는 사람 없습니다. 돈이 많다고 옷을 두벌 세 벌 겹쳐서 입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돈이 많은 죄인이 잠깐 행복해 질 때가 있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몹시 부러워 해 줄 때, 혹은 언젠가는 자기가 만족할 만큼 충분하게 모여져서 자신에게 온전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 돈을 계속해서 모으고 있을 때 신기루 같은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분, 쾌감과 행복을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쾌감을 행복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행복(幸福), 복(福), 히브리어로 ‘바라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인한 기쁨, 평안, 안식, 사랑 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참 행복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드러나고, 남 들 앞에서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상대적인 우월감에 젖는 것을 행복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적 행복은 돌아서면 사라지는 일시적 만족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변하지 않는 참 행복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회복이 되었고 그 분이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인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나를 천국의 백성으로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지어져감의 열매가 내 속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것에서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했던 내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온유와 인내와 절제와 화평과 섬김이 나오는 것을 문득 문득 경험하게 될 때 우리 성도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만족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참 행복으로 이끄실 수 있으신 분이기에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는 불쌍한 죄인들은 그 행복을 돈과 명예와 외모와 건강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에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단지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의 심리가 그 돈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으로 힘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돈 그 자체로 진짜 힘인 참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 많다고 돈으로 폭력배들을 사서, 세상의 힘을 사서 아들의 복수를 해 준 사람이 있었지요? 여러분 그 힘이 그렇게 부러우십니까? 그렇게 돈으로 힘을 사서 그 사람이 행복해 졌나요?
얼마 전에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큰 로또에 당첨 되었던 사람의 인터뷰가 신문에 났었습니다. 그 분 왈(曰) ‘내 인생에서 가장 한스러운 것은 내가 로또에 당첨되었을 바로 그 때 그 로또를 찢어버리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또에 당첨이 되자 부부관계가 소홀해 졌고, 자녀 중 하나는 그러한 불편한 가정에서 우울증을 얻어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아무 때나 손을 벌리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한 번 두 번 거절을 하다 보니 친척과 친구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자신은 술과 여자와 도박과 마약에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돈은 그 돈을 운용할 실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는 저주입니다. 절대 그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저주 한 번 받아보고 싶으시지요?
여러분, 정말 돈을 모으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그 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운용할 수 있는 신앙의 실력을 키우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용 카드를 맡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신앙의 깊이에 다다르게 되면 그 때는 분에 넘치는 돈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청지기인 자신에게 맡기시는 것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확인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부가 주어지게 되면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쓰게 되는 것인지 고민하고 기도하고 분주하게 나누러 다녀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제가 세상 힘의 대표 격인 ‘부(富)’라는 것을 예로 들어서 왜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힘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하는지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과연 청부론과 고지론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청빈론이 맞는 것인지 성경을 토대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날에는 어떻게 바늘귀를 통과하겠다는 낙타들이 그렇게 많은지 함께 공부해 보자고요.
다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힘이 명예입니다. 한 나라에서 최상의 명예를 얻었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대통령, 국회의원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가진 세상의 힘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굽 신 거리는 것을 즐기는 것 이외에 그들이 명예가 주는 힘으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명예를 소유한 그들이 그 명예로, 그 힘으로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나는 이 만큼 출세했소.’라고 자랑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건 쾌감이라니까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을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들을 합니다.
남들이 자신을 부러워 해 주고 자신이 가진 것에 열광할 때에 자신은 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니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아주 부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만 떠 올려 보세요. 여러분이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여러분 마음속에는 오히려 질투와 시기가 더 클걸요? 그런데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러워 해 줄 때 자신이 그 사람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줄 착각한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겉으로는 부러워 해 주는 것 같지만 거기서 바로 돌아서면 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요. 오히려 시기, 질투 같은 미움의 감정이 더 클 걸요?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삶의 전 영역에서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명예? 그 것으로 남들이 여러분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착각들 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명예 앞에서 굽실 대는 것은 자기의 필요에 의해 그러는 것뿐입니다. 돈이건 명예건 그 것들이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내 힘으로 남을 눌렀다는 상대적이고 비교 우월적인 야비한 쾌감뿐입니다. 내가 남 위에 올라서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아담의 타락 장면에서 나타난 인간의 원초적인 죄 아닙니까? 인간들은 죄를 지으면서 행복감을 느낀다니까요? 그건 참 행복이 아닙니다.
미모는 어때요?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한 때의 미모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요? 역시 다른 이들에게 ‘나는 이 정도예요.’라는 자랑 이외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거기서 진짜 힘인 참된 행복이 나올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아무도 여러분을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무인도에서 혼자 사신다면 여러분의 미모가 여러분의 힘이 되겠습니까? 거기에서 자신의 미모가 자랑스러울 수 있습니까? 아마 그런 곳에서는 머리도 안 감고 이도 안 닦고 매일 부스스 해서 살 거예요. 만일 거기서도 토끼야, 거북아 나 예쁘니? 이러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비교우월적인 유치한 행복을 추구하시겠어요?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이 힘으로 여기고 있는 세상 것들은 전부 다른 이들을 내 발 아래 내려놓고 그들 위에서 상대적인 쾌감을 맛보기 위한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저주받을 죄이지 절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힘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내어놓는 힘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인간들이 합의를 해서 이런 것들이 힘이라고 공인을 해 놓았어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그 힘이라는 관념 앞에 자기들이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정식 아내가 삼 백 명이었고 첩이 칠 백 명이었습니다. 그는 금과 은이 돌처럼 굴러다녔다는 부유하고 풍성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내를 얻을 때 아무나 얻었겠습니까? 그 나라에서 최고로 예쁘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아내로 첩으로 얻었을 것입니다.
천 명의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한 달에 한 명씩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해도 100년 이상이 걸립니다. 부와 명예와 쾌락의 극치를 맛 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 솔로몬이었습니다. 그처럼 많은, 게다가 아름다운 아내들을 거느렸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와 명예와 군사적인 힘까지 소유했던 솔로몬이 나중에 남긴 결론이 뭡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입니다. 아름다운 여자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생사(生死)여탈(與奪)까지 손에 쥔 권력으로, 세상을 다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은과 금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 했던 솔로몬은 그 모든 것을 다 가져보았음에도 결국 자신의 행복은 그러한 것으로 올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에서만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참된 힘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의 헛된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고 자신을 만족시켜 행복에 이르려 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오늘 본문이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 드린 이러저러한 학설을 다 기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꼭 숙지 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했지요? 반복합니다. 성경은 지금 하늘과 땅의 대조적인 개념을 동원해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늘과 땅, 즉 혼합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이러한 대조의 개념을 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뭐라고요? 인간, 즉 피조물은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항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그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종의 삶을 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힘의 원리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질서를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세상의 것들이 힘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얻어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따라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거기서 진짜 행복이 옵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왔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이들이 이 땅에 생겼으며 그 통치에 순종하는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 이미 생겨났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라는 정확한 진리 속에서 사는 이들이 이미 이 땅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라하신 수많은 명령을 예수님께서 한 문장으로 줄여 주셨지요? 뭡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를 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뜻을 좇아 열심히 살아내는 그 삶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에 대해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나라의 삼 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라고 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권이라 했습니다. ‘누가 다스리느냐‘
제가 예전에 에베소서 강해를 할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듯이 하나님 나라의 그 ’나라’라는 단어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영역 혹은 지역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주권, 통치, 지배 등 왕이 직무를 능력 있게 행사한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즉 성경에서 ‘나라‘라는 의미는 지리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주권(dominion)과 왕의 통치권(sovereignty)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실행되는 곳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묻는 자들에게 ’너희 안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서 ’안에‘로 번역이 된 헬라어 ’엔토스‘는 ’among''사이에‘라는 뜻이라 했지요? 즉 그들 사이에 있는 주님에게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그러한 이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복종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전쟁에서 지고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면 그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고 표현을 하잖아요? 8.15 광복 때 우리나라에 회복된 것이 무엇입니까? 국민입니까? 영토인가요? 아니지요? 그건 그대로 있었잖아요? 주권이 회복된 것입니다. 민주화 투쟁도 결국은 무엇을 위한 투쟁입니까? 국민의 정치적 주권을 찾기 위한 투쟁입니다. 그렇게 국가의 삼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그 주권은 또 다시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그게 입법, 사법, 행정입니다. 법을 만들고 그 법으로 다스리며, 그 법에 따라 심판을 하는 것 전체를 ‘주권’이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그 입법, 사법, 행정권이 다른 말로 통치권이 전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의 나라 백성들에게 “돈을 사랑치 말라. 돈은 일만 악의 근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통치자께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통치자께서 “육체는 풀과 같은 것이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중심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이 길어야 칠십이고 강건해야 팔십이니 건강하다고 자만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돈이나 명예나 외모 같은 것에 주눅이 들거나 부러워한다거나 질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로 자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초개처럼 여기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전념을 하는 것이 바로 성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여러분의 언행(言行)심사(心思)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성도는 천국의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구현에 전심으로 힘쓰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조국 통일에 대한 꿈보다 더 못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현과 그 속에서 얻어지는 행복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가 맞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순복하면서 그 속에서 참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이미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로,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진 자들의 현실이어야 하니까요.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서, 다른 말로 세상의 힘에 조금도 굴 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돈 많은 사람이 자랑할 수 있나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랑할 수 있어요?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좀 된다고 뻐길 수 있습니까? 아무도 부러워 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게 힘으로 발휘가 됩니까?
그런데 웃긴 것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그런 것들이 힘으로 작용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장로가 힘을 쓰고, 좋은 직업을 가진 집사가 대우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나온 목사가 존경을 받고 외모가 번듯한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몸에 장애가 있거나 질병이 있는 사람들은 뭔지 모르는 패배감에 젖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자기 것을 가지고 교만을 떠는 사람보다 못 가진 것에 대한 패배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 더 나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복음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예배당 건물이 크고, 헌금을 많이 저축해 놓은 교회 목사는 가슴을 펴고 다니고, 교인수도 별로 없고, 변변한 예배당도 하나 구입 못해서 빌려서 쓰고, 재정은 늘 간들간들한 교회 목사는 어디가도 주눅이 들어서 구석자리를 찾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힘의 원리가 교회를 움직이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쓸어 버리셨다고요? 그렇게 힘의 원리를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아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소유하려 하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이들에게 자랑을 일삼는 자들을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닥치는 대로 아내로 삼는 그러한 힘의 원리가 바로 심판의 근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과 못 배운 사람들이 홀대를 당하고 부자나 명예가 좀 있는 사람들이 우대를 받는 곳이 교회라고요? 천만의 말씀.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가 진심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참 행복을 맛보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가난이나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이혼이나 사고 등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남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자신의 모든 삶을 그 분께만 의뢰하는 하늘의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로 세상 사람들이 약함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그러한 것들을 우리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에서 병들고 망하고 이혼하여 갈라서고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홀대를 당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몰아붙인다면 그곳이 정말 교회가 맞습니까? 그건 악마의 소굴에 더 가까운 집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정말 그 심판의 불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교리 부분을 공부할 때 찾아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가짜 교회들과 가짜 백성들부터 요절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심판의 불에서 건짐을 받으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힘으로 여기고 있던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 지셨나요?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시며 오직 그 분으로부터만 행복과 기쁨을 받아 누리고 계세요? 그걸 매일 매일 확인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며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엉뚱한 것에 눈 두지 마시고 그 일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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