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27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받을 교회(I) (창6: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15:17

27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받을 교회(I)

 

 

(6:18)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설교를 하기 전에 여러분이 설교를 잘 들으실 수 있는 팁을 한 가지 드릴게요. 여러분 저와 함께 오늘 우리가 공부할 성경 본문을 읽으신 후에 성경을 덮지 마시고 본문을 계속 펴놓으세요. 제가 설교 중간에 찾아 읽는 구절들은 파워포인트로 스크린에 다 올려 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펴놓으시고 한 절, 한 절, 한 단어, 한 단어 모두 이해가 가시는지를 수시로 살피시면서 설교를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설교를 다 들으시고 난 후에 여러분이 공부하신 성경 본문이 눈에 확 들어 올 수 있게 되고 그 날 공부한 내용이 모두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고 멍하니 앉아서 제 이야기만 들으시다보면 여러분의 기억은 기억하기 쉬운 재미난 예화(例話)나 사담(私談)만을 붙들 뿐 정작 성경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은 다 놓치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펴서 무릎에 올려놓으시고 본문을 수시로 읽으시면서 설교를 들어주세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노아의 홍수가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기억나세요?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 상자 그리고 애굽의 군대가 모두 빠져 죽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걸어서 나온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물속으로 던져진 요나, 그리고 물위를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인지 우리는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우리가 공부한 바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세상과 함께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아내심으로 물에 빠져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홍수와 같은, 풍랑과 같은 인생길 속에서도 물위에 뜨신, 물위를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올바른 자각과 함께 믿음으로 오늘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까지 공부했지요?

 

 

오늘은 이제 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한 절, 한 절 읽어가면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성경의 단어들과 구절들과 문맥이 어떠한 세부적인 메시지를 우리 교회에게 주고 있는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그렇게 긴 노아의 홍수이야기가사람이 땅위에서 번성할 때에라는 어구로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조금 의아해 하시겠지만 그 짧은 어구가 바로 노아의 홍수 전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키입니다. 홍수가 오게 된 이유가 그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번성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라로브라는 단어는 우리가 1장에서 본 단어입니다.

 

 

(1:28)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위 문화 명령이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복된 명령의 성취가 심판의 근거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을 어떻게 저주로 바꾸어 버리는 지 잘 보시란 말이에요. 창세기 1 28절에 처음으로 등장한,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창세기 전체의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만 그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홍수 후에 노아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하십니다.

 

 

(9:1,7)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그렇지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은 노아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조금 다른 말로 똑같은 내용의 명령을 하시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내용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의 하나님의 명령이며 약속입니다.

 

 

(22:17)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하십니다.

 

 

(26:4)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 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혹 여러분 중에 제가 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혼용해서 사용할까 궁금해 하실 분이 있을까봐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약속이기도 한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명령과 약속이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 명령은 야곱에게로 이어집니다.

 

 

(35:11)  11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똑같은 단어들이 나오지요? 이제 하나님의 그 약속은 요셉의 때에 가시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듯 보여 집니다. 물론 요셉 때에 이루어진 하나님 약속의 성취과정은 어떠한 원형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모형으로서의 성취과정입니다. 그 원형이 무엇인지는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일단 모형으로서의 성취 장면을 보시지요.

 

 

(47:27)  27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이렇게 요셉의 때에 하나님의 명령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70명의 야곱의 식솔들이 애굽 고센 땅에서 무려 삼 백만에 가까운 큰 민족으로 생육하고 번성을 하지요.

 

 

(1:7,2021)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수가 불어나고 세력도 커졌으며, 마침내 그 땅에 가득 퍼졌다.

20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21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똑같은 단어들이 계속등장하지요?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물론 모형으로서의 성취입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무리를 이룬 이들을 성경은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이스라엘이라 부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28절에서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던 명령입니까? 바로 교회를 향한 명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로 가서 그 단어들이 누구에게 적용이 되는 지를 보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23:3)  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던 생육과 번성이라는 단어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맹렬하게 지켜 가고 계시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해서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또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 remnant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교회지요? 이렇게 생육과 번성은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이며 언약인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졌지만 그 약속은 점차 부족으로 민족으로 확대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유기적(有機的)이며 점진적(漸進的)이며 모형(模型)론 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라 했지요? 유기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우리 유정이 어머님으로부터 수지침을 조금 배웠습니다. 유정이 어머님은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여러 가지 앓고 계시기 때문에 비상시 스스로 할 수 있는 응급처치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몸이 많이 아픈 사람들은 통증이 심할 때 자가 치료하는 법을 조금씩은 알고 있어야 응급처치가 가능한 것이라며 제게 손바닥에 침을 놓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플 때 손바닥에 침을 놓으면 참으로 신기하게 통증이 멈춥니다. 그 말은 우리 몸은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머리가 아프면 머리에 침을 놓아야 하는데 가운데 손가락 첫째 마디에 침을 놓으면 그 통증이 치료가 됩니다. 그렇게 전체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을 유기적(有機的)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성경도 창세기를 찌르면 요한 계시록이 올라오고 출애굽기를 찌르면 로마서가 올라오는 식의 유기적인 하나의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점진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복음의 사건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점점 크고 확실하게 반복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점진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 15절의 원시복음에서, 아벨의 죽음과 셋의 탄생에서,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모리아 산의 이삭의 사건에서 점점 선명하게 십자가가 계시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렇게 점진적인 계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형론 적이라는 것은 신약에 나타나는 원형들이(anti type) 구약에서 모형으로(type) 그려지고 있는 형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광야의 놋 뱀 사건으로 모형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라거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이 될 하나님의 나라가 성막과 성전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그려져 있는 것 그리고 모세나 여호수아 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등이 모형론 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이지요. 이렇게 성경이 유기적이고 점진적이며 모형론 적인 상호 관계에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나온 것이 조직신학이며 성경신학인 것입니다.

 

 

조직 신학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유기적인 책이라는 전제하에 그 육십 육권 전체에 흩어져 있는 공통된 교리들을 통합하여 신론, 구원론, 인간론, 죄론 등등으로 묶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유기적이며 점진적이며 모형론 적인 상호 관계에 의해 기록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성경의 사건에 시간을 도입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창세기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었으며 출애굽기에서는 어떻게 그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었고 선지 서에는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풍성하게 계시가 되었는지를 유기성과 점진성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해 드리는가 하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생육과 번성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유기적이며 점진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잘 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육과 번성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창세기부터 예레미야까지 거슬러 올라왔잖아요? 최초에 아담에게 내려졌던 그 명령이 어떻게 점진적이며 유기적으로 진행되어 오는지 잘 보셨지요? 우리가 지금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이 바로 성경신학적 성경해석방법인 것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에스겔서로 한 번 가볼까요?

 

 

(36:11)  11 내가 너희 산들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여, 그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번창할 것이다. 산들아, 내가 너희를 예전처럼 사람들이 살도록 하고, 전보다 더 좋아지게 해주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른 뼈가 군대가 되는 이야기, 환언(換言)하면 교회는 어떤 지경에서 어떻게 탄생이 되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이야기에 앞서 그 이상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 마른 뼈들이 뭐라고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탄생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 교회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교회에게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과내가 반드시 내 백성인 교회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들겠다.’는 언약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 날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생육과 번성, 그리고 노아에게 주어졌던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어떻게 교회까지 흘러내려오는지 잘 보셨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제 우리는 왜 그러한 하나님의 복된 약속과 명령이 인간들을 다 쓸어버리시는 홍수 심판의 근거가 되었는지를 살펴 볼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차피 당신의 백성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시켜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이 만드실 것이라면 처음부터 단번에 그 전체를 창조하셨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남자와 여자를 둘만 달랑 만들어 놓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을까요? 한 번에 만드셨으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던 그 여섯째 날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보실 수 있으셨을 텐데 왜 생육과 번성이라는 방법으로 수천 년을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60억이 아니라 600억 명의 인간도 한 번에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 둘 만을 만드시고 그러한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별 의미도 없는 이성(異性)을 만들어 놓으시고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으니까 그 곳에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이 별 의미가 없다고요. 그런데 왜 굳이 이 땅에서 교회를 번성케 하시는 방법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결혼을 시키심으로 생육과 번성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케 하실 까요?

하나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의 그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교회를 탄생케 했다는 것을 육신과 이성을 가진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만 탄생케 됨을 교회에게 주지시키고 가르치시기 위해 남자와 여자로부터 차근차근 교회를 생육시키시고 번성시키시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창세기 2장에서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대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가지요.

 

 

(2:1824) 18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20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21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23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아담에게 신부인 하와로 상징되는 교회를 만들어 주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에 관한 답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모형론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지요? 아담이라는 모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원형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와라는 모형 속에서 교회라는 원형을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대로 이 장면은 여자인 하와는 아담이 깊이 잠들고 그의 옆구리가 뚫리며 그의 몸의 일부인 갈비뼈가 뽑혀져서 탄생이 되는 것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창에 옆구리가 뚫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머리이신 당신의 몸의 지체들을 만들어 내시는 거라는 걸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남자와 교회의 모형인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결혼을 통하여 새 생명이 잉태되는 것처럼(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야 아기가 태어나지요?) 교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신랑과 신부가 된 교회에 의해 계속해서 생육하게 되고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전도와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참 성도의 삶과 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비밀이 전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교회의 생육과 번성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의 혼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이 땅에서의 부부관계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담고 있는 아주 신성한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건 순종에 의해 탄생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허락하시고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고 신부들에게는 남편에게 목숨 걸고 순종하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부관계 속에서 새 생명이 잉태되도록 하심으로 새 생명, 즉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 탄생이 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잉태하도록 되어 있는 이 땅의 부부들에게서는 그러한 지고한 사랑과 목숨을 건 순종이 나올 수 가 없음을 우리는 그 부부관계 속에서 배우고 우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아울러 배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부부관계 속에서 태어난 아기에 대한 사랑을 맛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어떠한 사랑으로 창조하셨는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자식을 낳아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엄마 아빠 앞에서 예쁜 짓을 하는 자기를 쏙 빼 닮은 아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이런 아기가 한 열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속만 썩이고 짜증만 나게 만드는 그런 아기 말고 늘 생글생글 웃으며 아빠 엄마의 애간장을 녹이는 살인미소를 달고 사는 그런 아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바로 그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신 분이십니다. 인간들이 없어도 조금도 외롭거나 쓸쓸하신 분이 아닙니다. 충만의 충만, 거룩의 거룩, 행복의 행복, 영광의 영광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족되어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삼위 하나님께서 굳이 인간들을 창조해서 왜 이렇게 속을 태우십니까? 바로 지금 말씀드린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창조케 한 이유인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뗄 레야 뗄 수 없는 완벽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들이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부어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러한 사랑하는 아들들을 더 많이 만들어서 그들에게 당신의 아들이 갖고 있는 권세와 행복과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동일하게 누리게 해 주시고 싶어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교회가 바로 여러분과 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로 둘째 아들, 셋째 아들, 넷째 아들 이렇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결혼을 함으로 예수와 한 몸이 되어 예수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8:29) 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대가족 안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셔서 예수님의 동생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로 만드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행복과 영광과 평안 등등 그 모든 하늘의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 교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교회의 본무(本務)가 무엇인지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또 다른 아들들의 순종과 찬양과 섬김을 기대하시며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인 생육과 번성이 완성이 되도록 하신 것은 그러한 아비의 마음을 당신의 자녀들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 경험 속에서 이해를 하라고 우리에게 부부의 관계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택하시고 창조를 하셨는지를 배우는 것이고, 우리의 사랑 없음과 불순종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들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버리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그 아들 또한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케 하시기 위해 목숨을 거는 순종으로 아비에게 순종을 했음을 결혼 생활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잉태되고 탄생되는 것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목숨을 건 순종이 성도라는 새 생명을 탄생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결혼 생활은 자신들의 부족함이 자꾸 폭로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순종이 부각되는 결혼 생활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자주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 된 육신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우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이 부부 관계 속에서 발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발견되는 것이고 그 은혜를 발견한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을 담은 이상적인 부부관계로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차이니 뭐니 이런 소리하지 마세요. 우리는 결혼 생활을 통해서우리는 그 정도의 인간들밖에 안 된다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아내를 사랑합니까? 어떻게 우리 같은 인간들이 목숨 바쳐 남편에게 순종을 해요? 잘 안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신부로 택하시고 목숨을 버려가며 신부로 삼아 주셨다는 그 은혜를 우리는 혼인 관계 속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이 된 신부, 즉 교회에 의해 또 다른 교회들이 탄생이 되는 원리가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교회 성장의 원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 성장이란 개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다시 말 안 해도 잘 아시겠지요? 참 교회의 생육과 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이 그 생육과 번성을 탐욕과 쾌락의 도구로 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노아의 홍수 심판의 근거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2절과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하지요? 그 속에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좇고자 하는 인간의 순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저 인간들의 탐욕과 허영과 쾌락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환언하며 인간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행복을 얻는 자리에서 이탈하여 자기들 스스로 힘을 쌓아 행복을 찾는 자리로, 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택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2절과 3절에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 나옵니다. 그 부분은 다음 주에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배우라고 우리에게 주신 결혼이라는 관계도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자랑을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심판의 근거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힘의 원리를 좇아 사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힘의 원리를 좇아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자랑만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우리의 자리를 잘 찾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잘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하며 분투하며 찾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lass� |$Nr�� �� > 

 

(14:21)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홍해를 말리 우는 바람도 동풍입니다. 혹자는 홍해를 가른 동풍은 은혜의 바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홍해가 갈라진 것을 무엇이라 표현합니까?

세례라고 표현을 하지요? 세례는 무엇입니까? 옛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따라서 홍해를 가른 동풍은 저주받은 자들을 물에 넣어 죽여 버리는 심판의 바람인 것입니다. 이 이외의 여러 곳에서 동풍은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바람으로, 동쪽은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고 저주가 실행되는 그러한 곳으로 표기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시사 하는 바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곳이 아무리 환경 적으로 훌륭하고 아무리 편안하고 아무리 엄청난 쾌락을 줄 수 있는 곳이라도 그 곳은 저주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창세기 3장까지에서 각기 다른하나님 같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아세요?

세 번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에 나오는하나님 같이입니다. 사람은하나님 같이만들어 졌습니다.

두 번째는 사단이 하와를 미혹하는 부분에 나옵니다.

 

 

(3:5)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세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하나님 같이입니다.

 

 

(3:22)  22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똑같이 다하나님 같이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세 번째 것은 다른 내용의하나님 같이입니다. 첫 번째하나님 같이 ’like God, with god'하나님 같이입니다만

두 번째 와 세 번째의하나님 같이 ’like God, without god'입니다. 이것 보세요.

똑같이하나님 같이인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하나님 같이와 하나님이 떠나버린하나님 같이는 이렇게 천지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하나님 같이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이라는 복된 어구가 되지만 하나님이 떠나신하나님 같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의 교만과 만용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시도나 노력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후자의하나님 같이를 추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같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채워지게 될 때 그 아들의 생명의 씨가 우리 옛 사람을 먹고 우리가하나님 같이‘’like God, with god'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하나님 같이는 저주받을 자들의 외식으로서의하나님 같이가 되는 것이고 성경은 그 것을 가리켜자기 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함께 하는 하나님 같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채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하나님 같이‘’like God, with god'으로 변화하게 될까요?

말씀과 기도입니다.

 

 

(5:39)  9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를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모두 예수에 대해 증거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채우는 길은 그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채워질 때 우리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는 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하나님 같이외식과 만용이 되는 것이고 축복의 땅도 저주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저주의 땅에서 다시 불러들이십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저주의 땅에서 다시 축복의 땅으로 쫓아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쫓아내다‘’가라쉬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6:1,6)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1절에 쓰인쫓아내리라가 오늘 본문의쫓아내시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잘 보시면 모세가 창세기의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출애굽기에 쓰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주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을 동쪽으로 쫓아내셨지만 그들 중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 저주의 땅인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하는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쫓아내는 사건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빼어내고 건지시는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른 말로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의 땅은 살기 좋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이고 축복의 땅은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가나안입니다. 저주의 땅은 나일 강 유역의 삼각주 땅인 애굽이고 축복의 땅은 천수답 농사를 지어야 하는 팔레스타인인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쫓겨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삶이 그렇게 억지와 조롱과 비난과 누명으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쫓겨나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항상 심판을 전제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모든 인간들이 다 심판을 받아 저주의 자리로 떨어 져야 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백성들만 예수 안으로 들어가 그 예수가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셔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무죄한 짐승의 가죽으로 가려 주신 날을심판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8)  8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 날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날이 서늘할 때에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는욤 루아흐입니다. ‘바람의 날에혹은성령의 날에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 말을 신약에서 찾는다면주의 날이 됩니다.

 

 

(살전5:2)  2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은 여러분이 보시다시피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8절의날이 서늘할 때에심판의 날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솔라 그라티아바로 그 은혜의 십자가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대 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못 배웠어도 조금 가난해도 조금 못 생겼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를 벗어난 그 사실이 우리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고 기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은 자들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무시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으며,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디로 건짐을 받은 것인지를 수시로 확인하시고 세상이 여러 가지 문제로 여러분을 낙담시키려 할 때 세상을 비웃어 줄 수 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곤란케 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