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담과 하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창2:18‐25)
18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19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20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21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23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앞서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공부하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죽음 속에 꽃피게 될 생명, 즉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 중앙에서 발원하여 네 갈래로 흐르는 강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강 주변의 보석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도 공부를 했습니다.
잠시 복습을 하고 넘어가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 ‘토브‘ 다른 말로 선한 상태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뛰쳐나가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 선한 상태가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뛰쳐나가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의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인간들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폭로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는 자들을 만드실 것이라는 구속 사 전체의 내용이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에 힌트 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의 이야기는 에덴동산 중앙에서 발원하여 에덴동산 밖에서 넷으로 갈라지며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되는 강의 이야기에서 조금 더 구체화되어집니다. 그 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온 세상으로 흘러들어 생명을 소성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강이 흐르는 곳에 보석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름답고 화려한 신분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이야기 뒤에 오늘 본문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앞서 설명 된 ‘죽음 속에서 꽃 피는 생명’이라는 그 은혜의 복음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행이 될 것인가’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라는 관점에서 해석을 하시면 여러분의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조금 의아하시지요? 하와가 만들어지는 사건이 어떻게 구속사와 관련이 있는가?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는 이야기가 선악과 이야기와 동일한 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8절을 보세요.
(창2:18) 18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여기 보시면 ‘좋지 못하다‘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 말의 히브리 원어는 ’로 토브‘입니다.’선하지 못하다‘입니다. 그 ’토브‘라는 단어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처음 쓰인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을 위한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이 깨어져 버린 상태를(’로 토브‘’보시기에 좋지 못하니‘) 어떠한 방식으로 다시 ’선’하게 만드실 것인가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선이 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언약 바로 다음에 '로 토브''선하지 못하다'라는 단어가 나온 것을 유념해서 보시면 이해가 쉽겠지요.
그런 후에 더 구체적으로 3장에 인간이 뱀의 유혹으로 타락을 하는 이야기와 그 타락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것인가를 언약하시는 3장 15절의 원시 복음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홀로 독처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를 통해 갈비뼈를 하나 뜯어내십니다. 그리고는 그 뼈로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남자를 여자에게 보내어 연합시켜서 ‘하나’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인류 최초의 결혼 장면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원래 아담의 갈비뼈는 12 쌍 24개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빠지면 몇 개입니까? 23개이지요? 그러면 지금 남자들의 갈비뼈는 23개여야 합니다. 맞습니까? 24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걸까요?
진화론자인 라마르크라는 사람이 획득 형질은 유전이 된다는 용불용설을 주장했었기 때문에 아마 그 영향으로 그런 질문들이 드실 텐데 인간의 획득 형질은 유전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지가 사고로 다리를 절단했다고 해서 아들이 외다리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의 갈비뼈가 23개였다고 해서 그 아들 가인과 아벨이 23개의 갈비뼈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갈비뼈에는 골막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골막만 건드리지 않고 갈비뼈를 떼어내면 언제든지 갈비뼈는 재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도 얼마 가지 않아 24개의 갈비뼈로 회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궁금해 할 것도 아니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하도 회의론자들이 많아져서 참고로 설명해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려보았던 그림 (남자가 자고 있는데 그 남자의 옆구리를 뚫고 갈비뼈가 뜯겨지고 여자가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남자를 그 만들어진 여자에게 보내셔서 하나로 연합을 시키신 그 그림)을 신약에서 한번 찾아볼까요?
성경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자신의 신부의 탄생을 위해 옆구리가 뚫려 죽었던 신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랑은 부모를 떠나 신부에게로 내려가 연합을 하는 신랑입니다. 누구입니까? 신부인 교회를 탄생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고 자기의 신부와 연합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담은 부모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결혼시키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신부인 교회와 연합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잠자는 신랑 아담으로부터 신부인 여자를 만들어내시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알게 되어 참된 선을 깨버림으로 보시기에 좋지 못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 (‘로 토브’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다시 ‘보시기에 좋은’ ‘토브’ 의 상태로 만드실 것인가를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증거를 대 드리지요. 우리가 지난 수요 성경 공부 때에도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곳에서 당신을 우리의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렘3:14)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사54:5) 5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마9:15) 1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고후11:2)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려 선이 깨져버린 상태를 아담이 독처 하는 것으로 묘사를 하신 것이고 그 깨져버린 선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당신 자신의 죽음을 택하셨다는 것을 잠자는 아담의 갈비뼈로 신부가 탄생하는 장면으로 창세기에서 이미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고 하와는 교회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확인도장을 찍어 줍니다.
(엡5:31‐32) 31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언어를 그대로 인용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설명하고 있지요?
우리가 여기서 아울러 알아둘 것은 교회인 여자는 절대 자신의 요구나 노력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와가 ‘나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를 했나요? 무슨 노력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무(無)에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와의 창조이야기가 교회의 탄생을 예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구원에 있어서 절대 인간 측에서의 선택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매니안 주의나 웨슬리안 theology는 완전히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창세기 2장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와 언약이 조금씩 더 구체적이며 점층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장에서는 간략하게 세 단계로 점층법을 쓰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을 만드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생기를 받지 못한 짐승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힌트 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생명인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될 것임을 힌트 하시는 것이며,
세 번째로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오게 하신 후 결혼을 시키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는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연합되어져 살아가게 될 것임을 힌트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은혜의 복음이 조금 씩 조금씩 밝게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의 점층적 설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점점 밝아지는 계시가 완전하게 밝혀지는 곳이 계시록 21장입니다.
(계21:2)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요한 계시록의 결론으로 향하고 있는 계시의 출발지점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들을 등장시켜서 교회의 정체성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가를 상징하고 있으며, 요셉이 아스낫과 결혼한 일과 그가 애굽에서 얻은 아들들이 야곱에게 속한 것은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서 선택받아서 어떻게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결혼을 함으로써 이 땅의 교회는 ‘광야 교회’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고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갈렙의 딸 악사가 옷니엘에게 출가한 후에 아버지로부터 윗 샘과 아랫 샘을 얻은 것은 유업을 받는 교회에 대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룻기에 나오는 룻이 보아스에 의해 대가를 치르고 결혼한 것은 값으로 사서 구속되는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고 사무엘상에 나오는 아비가일과 다윗의 결혼은 군대로서 싸우는 교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서 선택을 받아, 구속을 입었고, 광야를 거쳐 나왔으며, 사탄과 싸우며, 유업을 받고, 그리스도께 바쳐진 존재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며 그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창세기 2장의 하와의 창조의 모습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결코 우연히 우발적으로 생겨 난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작정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만 지으시고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 하와까지 만드시고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괜히 심심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엡1:23)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 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없이는 충만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독처 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이 오늘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그 신부인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자들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굳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른 재료들도 많은데 왜 굳이 사람의 내장을 헤집고 뼈를 꺼내어 여자를 만드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탄생이 어떠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꼭 예수 안에서만 나와야 한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 문맥 속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조금 석연치 않은 문맥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 하는 것이 선하지 않아서 그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주시는 사건에 왜 갑자기 19절부터 20절까지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왜 짐승들 중에서 아담의 돕는 배필을 택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니 왜 짐승들을 등장시켜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을 삽입시킨 후에 그 사건을 아담의 갈비뼈와 대조를 시키고 있을까요?
셈족의 문화권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까? 이름을 짓는 자가 이름을 받는 자의 존재의 속성과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짓는 자가 이름을 받는 자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담이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아담이 그 짐승들의 속성과 내용을 속속들이 다 파악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보아도 그 모든 짐승들 중에는 배필로서 아담을 도와줄 존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아시게 되겠지만 그 짐승들이 바로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처럼 살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나온 존재가 교회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아담이라는 존재 안에서 그 아담을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지요.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2장7절을 보면 최초의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후에 생기를 받습니다.
(창2:7) 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서 ‘생령‘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하이 네페쉬 하야’입니다. ‘살아있는‘(하야) ‘산 존재’(하이 네페쉬)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그 ’하이 네페쉬‘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인 19절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창2:19)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여기서 ‘각 생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하이 네페쉬‘입니다. 그 각 생물들 역시 흙으로 지어졌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생기‘라는 것을 불어넣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짐승들은 ’하이 네페쉬 하야‘가 아니라 그냥 ’하이 네페쉬‘입니다. 반면에 생기를 부여받은 인간은 ’하이 네페쉬 하야‘’살아있는 산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만 부어진 ’생기‘는 무엇일까요? 그 단어는 히브리어로 ’니스마트 하임‘입니다. 제가 전에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기를 그 ’니스마트 하임‘은 ’생명의 기운‘이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단어는 생명을 의미하는 ’하임‘이라는 단어와 ’휙 하고 불어오는 바람이나 호흡‘을 의미하는 ’네솨마’라는 단어와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생명 자체가 아닌 생명의 기운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그 ‘니스마트 하임’ ‘생기’는 무엇에 쓰는 것일까요? 그 것을 알면 짐승들과 인간인 아담이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있겠지요?
그 ‘니스마트 하임’이라는 똑같은 단어가 잠언에 나옵니다.
(잠20:27) 27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주님은 사람의 영혼을 환히 비추시고,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살펴보신다.)
여기서 ‘영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니스마트 하임’입니다. 그 ‘니스마트 하임’이 무엇을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합니까?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핀다고 합니다. 거기서 ‘사람의 속‘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베텐‘입니다. 그 단어는 ’자궁,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니스마트 하임‘’생기‘는 ’생명을 알아보고 생명을 지각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를 받은 생령’이 의미하는 바는 ‘짐승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감지하고 생명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쉽게 말해서 ’성령‘아닙니까? 아닙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른 뼈들에게 들어간 생기는 성령이 맞습니다. 거기서 ’생기’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루아흐’입니다. 그 단어는 우리가 공부했듯이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7절에서의 생기와 에스겔 서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에게 들어간 생기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좀 더 확실한 증거는 70인 역과 신약 성경도 첫 사람 아담을 ‘성령의 사람’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은 그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프쉬켄 조산’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 ‘프쉬켄 조산‘은 성령을 의미하는 헬라어 ’프뉴마‘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이라는 단어를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산 영’이라는 단어로 옮기는데 그 단어도 ‘프뉴마’가 아니라 ‘프쉬켄 조산‘입니다.
(고전15:45)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바울이 첫 사람 아담을 묘사하는 단어로 ‘프쉬켄 조산’이라는 70인 역의 번역을 따랐다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은 그저 살아서(living being), 생명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알아 볼 수 있는 존재였지만 생명나무의 실과인 살려주는 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나지 못하면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영생하도록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단지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하고 추구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자 인간은 그 ‘생명의 기운’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하고 추구할 수 있는 ‘생명의 기운’ ‘니스마트 하임’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차버린 인간에게 죄 책을 물으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이고, 타락하여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이제는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닌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부어주심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것임을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언약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첫 사람 아담은 ‘생기‘’니스마트 하임‘’생명을 알아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기운‘을 받아서 생명을 알아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존재였고 나머지 짐승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도 없고 감지할 수도 없으며 그 생명을 추구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아시겠지요? 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교회의 탄생을 예표 하는 하와의 창조 사이에 갑자기 짐승들을 등장시키고 아담이 그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을 삽입시켜 놓았는지 아시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그 분이 주시는 생명을 추구할 수 도 없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추구하며 땅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탄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셔서 우리와 연합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와 내가 감히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돕는 배필’ ‘에제를 크나긋도’는 ‘그에 상응하는 도움’ 혹은 ‘그에 상응하는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상응하는 존재로 보아주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신랑 안에서 나온 예수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교회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
의 성분과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요?
(창2:23‐24)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성경은 분명 교회는 짐승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추구해야하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원수들의 유익을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성분이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숙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말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십자가의 삶의 원리로 바뀌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늘의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면 우리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와야 하고 적어도 그러한 삶을 위한 분투가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전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짐승입니다.
(사1:3)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소나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그 분께서 주시는 하늘의 생명에 대해 전혀 알아보지 못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기’ ‘니스마트 하임’이 없는 그저 ‘흙’이기 때문에 생명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생명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흙으로서 흙에 속한 것, 다른 말로 땅에 속한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치 타락한 짐승인 뱀이 흙 속에서 흙만 먹으며 살도록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이 땅의 수많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짐승들이 흙 속에서 흙이 주는 것들로만 배를 불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이 세상 사람들도 착하게 사는 사람들 많은데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생명을 알아보거나 지각하지 못하고 그 생명을 추구하지도 않고 생명을 원하지도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저주받아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하는 일이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재었을 때 한없이 선하고 훌륭한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것은 모두 저주받은 흙의 일인 것입니다.
(눅17:26‐30) 26 노아 시대에 일이 벌어진 것과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롯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여기 보시면 멸망의 날에 멸망 받은 사람들이 하던 일이 전부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뭐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멸망의 물과 멸망의 불 속으로 떨어졌습니까? 생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들은 제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자기 자신의 자랑과 높임을 위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하며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 흙의 세상에서의 높아짐이나 흙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받는 찬사나 인기를 배설물처럼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생명이신 성령’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그렇게 이 땅에서 오로지 흙만 쳐다보던 삶에서 돌이켜 생명을 추구하는 십자가의 삶 속에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의 거장 장예모 감독을 아주 좋아합니다. 중국의 제 5세대 감독으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그런 감독입니다. 가장 최근의 ‘황후 화’를 비롯해서 ‘붉은 수수밭’이라든지 ‘국두‘’귀주이야기‘같은 초창기 작품들을 보면 적어도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는 이해하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거의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자신만을 위해 서슴없이 남에게 해를 입히고 손해를 주는 이기적인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을 합니다.’국두‘같은 영화에서는 인간의 쾌락을 향한 잘못된 추구와 이기적인 욕심이 결국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되는지 양 서방 네 염색공장이 모두 불에 타는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쾌락과 이기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타 죽습니다. 거의 20여 년 전 영화인데도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가 ’저게 바로 지옥이구나‘하고 그 장면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거든요.
세상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자기 부인의 삶’과 반대되는 오로지 흙에만 몰두하는 짐승들의 삶인 ‘자기만을 위한 삶’이 어떠한 결과로 막을 내릴지 잘 압니다. 하물며 생명을 인식하고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우리 성도들이 여전히 짐승들처럼 남들을 밟아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고 흙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게 어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생명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왜 그렇게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최초의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결혼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며 어떠한 삶으로 그 결혼 생활을 채워야 하는지가 자명 하게 드러나지요?
하나님은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체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삶을 잘 훈련하라고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전6:20)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6장에서 음행에 대한 경고를 하고 마지막 결론으로 던지는 것이 ‘음행으로 몸을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입니다. 그러니까 결혼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지금 고린도 전서 6장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상을 사랑하는 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 생활을 통해서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삶을 두 사람이 구현해 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게 결혼입니다.
남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를 신랑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의뢰하고 의존해야 하는 교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못 생각하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신랑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십자가, 자기 부인’입니다.
신랑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내 뜻과 고집을 죽이고 신랑의 뜻에 순종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신부의 삶을 한 마디로 줄이면 뭡니까? 역시 ‘십자가,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 생활을 통해서 남편은 예수의 역할에 충실하고 아내는 교회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모두가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신부로 지어져 가는 남편과 아내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사랑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의 삶이 나오는 것이고 그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랑과 인내와 용서와 온유와 절제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낼 수 있도록, 여러분의 배우자가 전부 성인군자가 아니고 조금 모자라거나 답답하거나 포악하거나 표독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보면서 ‘내가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만나 가지고 이런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은 배우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인내와 용서와 온유와 절제를 훈련하라고요. 처음부터 살신성인의 자세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만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부부 사이에서 무슨 인내와 용서와 온유가 나타납니까? 원수가 있어야 사랑이 있는 것이고 나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이 있어야 용서가 있는 것이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인내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부부관계를 통해 바로 그러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은커녕 물 한바가지 떠다 주는 것도 귀찮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시지 않았으면 난 어떡할 뻔 했는가’하고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순종은커녕 남편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손톱을 치켜세우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뒤로 숨다보면 어느새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남편으로 남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순종하는 아내로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부가 그들의 관계 속에서 지향해야 할 목표지점인데 다른 것에 관심들을 두니까 평생을 원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30‐40대 기혼 여성들에게 ‘당신에게 만일 살인 면허가 주어진 다면 제일 먼저 누구를 죽이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1 위가 ‘남편’이었다지요? 그게 ‘원수’가 아니고 뭡니까? 완전히 ‘적과의 동침’이지요.
한국의 한 신학교에서 자기 학교 출신 목사님들 1,000명에게 무기명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만일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지금의 사모님과 또 결혼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90%가 ‘아니오’에 체크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원래 부부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한 몸이어야 합니다.
‘네가 나고 나가 너인 관계’가 부부입니다. 부부는 원래 서로를 향해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서로에게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핑계를 대면서 ‘당신께서 만들어 내게 주신 여자’라는 말로 그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까지 타고 넘어들어 왔습니다. 그 말은 자신의 머리 위에 그 어떠한 통치권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 후로 타락한 인간들의 부부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권도 상실이 되었고 서로에 대한 순종과 사랑도 상실이 된 것입니다. 이제 부부는 한 몸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상대방을 갉아먹고 싶어 하는 거머리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창3:16)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사모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테슈카’ ‘장악하다’입니다. 그 말은 인간이 타락을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자 부부관계가 여자는 남자를 장악하려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는 관계로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서 그 상대방이 자기의 짐을 덜어주거나 자기의 삶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순종이나 목숨을 건 사랑은 도대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쌍방이 모두 그 상대방을 ‘자기 존재의 확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배우자가 많이 배우고 잘 생기고 예쁘고 돈이 많으면 마치 자기 존재의 크기가 그마 만큼 확장이 된듯하여 매우 흡족해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방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기는커녕 못 생기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이면 자기 존재에 피해주는 주는 인물로 간주해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러한 이기적인 삶은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말든 서로에게 핑계를 대었던 타락한 죄인들의 삶입니다. 생기를 잃어버린 짐승으로 추락한 아담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상대방을 위해 내가 손해보고 내가 죽어주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용해서 내가 유익을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나로 인해 상대방을 어떻게 유익하게 해줄까’를 고민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의 배우자가 조금 모자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너는 왜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냐’고 함께 손가락질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나만은 그 배우자의 편에 서서 온 몸으로 그 배우자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맞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거벗은 부끄러운 아담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의 부끄러움을 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인 것입니다. 온 세상사람 모두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등을 돌려도 여러분은 그 배우자의 편이 되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권면하며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 상대방의 거룩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내 배우자가 예수를 보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부부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저의 아내를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어도 여러분은 그 상대방의 편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과 온유와 인내와 절제를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배우자가 여러분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다른 집안의 부부관계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다른 집 떡이 커 보이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죄 성입니다. 다른 집은 전부 나보다 행복해 보이시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두다 문제를 가지고 있고 어떤 가정도 다툼이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한 모습을 남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서 전부 연극하고 있는 것이지 다들 그 결혼 생활을 통해 거룩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속에서 묵직한 것이 울컥하고 치솟아 오를 때 나를 탄생케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옆구리에서 살과 피를 모두 쏟아내신 우리 주님을 떠올리십시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털 깎는 자 앞에서의 어린양처럼 묵묵히 수난을 당하셨던 우리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우리의 신랑이 되셔서 우리가 하루 속히 정결한 신부로 완성이 되어 영원한 부부로 살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그러한 훈련의 장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잘 견딜 수 있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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