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생명나무와 선악과
(창2:4‐17)
4. |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
5. |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
6. |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
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8. |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
9.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
10. |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11. |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
12. |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
13. |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
14. |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
15.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
16.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
17. |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우리는 지난주까지 창세기의 일곱째 날까지의 창조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지 모두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놀랍게도 그 창조기사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안식을 주시고야 마시겠다는 결연한 언약이 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어떻게 완성해 가시는가를 주제로 삼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기는 언약의 책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단어가 바로 그 주제를 확증해 주는 단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히브리어로는 ‘엘로힘 야훼’입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2장 3절까지 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냥 ‘엘로힘‘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능력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의 ‘엘로힘 야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엘로힘 야훼’라는 단어가 무려 6,800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엘로힘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단어인지 아시겠지요?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그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 안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이름의 의미는 중요한 것입니다. ‘야훼’라는 이름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출애굽기로 가보겠습니다.
(출3:14‐15)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야훼‘’여호와‘라고 소개하시면서 그 이름의 의미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혀 주시지요?
(출6:2‐5) 2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4 나는 또한, 그들이 한동안 나그네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세웠는데,
5 이제 나는, 이집트 사람이 종으로 부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언약을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스스로의 능력과 열심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소개한 후에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등장시킴으로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스스로 이루셨으며 그러한 창조의 기사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의 창조에 대해 반복 설명이 시작되는 2장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깊게 해석을 하지 않으면 자칫 곡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부분입니다. 언뜻 보면 각기 다른 창조기사가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앞부분의 내용과 모순이 되는 듯 한 내용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창세기 2장 3절까지의 창조와 이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창조로 봅니다. 첫 창조가 실패를 했기에 또 다른 창조가 있었던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실패도 하실 수 있으신 분인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2장 4절 이하의 창조가 2장3절까지의 창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창조의 순서가 1장의 것과 틀리는 것을 보아서 이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설화들을 짜집기 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한 주장들이 일리가 있는 것들인지 제가 오늘 그 논란이 되는 부분들을 clear하게 주석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장 4절을 보시면 거기에 ‘대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대략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톨르도트’입니다. 그 ‘톨르도트’라는 단어는 ‘역사’ ‘기원’(record), ‘기원에 관한 기록'(record of the origin)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대략이 이러하니라‘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2장 4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2장 3절까지의 내용이 다른 관점에서 재 묘사되는 기록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2장 4절 이하가 첫 번째 창조가 아니라 두 번째 창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어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얼치기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5절을 보시면 아담이 창조되기 직전의 천지의 묘사가 조금 이상합니다. 분명 셋째 날 창조 때 초목과 채소들이 창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이 창조될 때 초목도 없었고 채소도 없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창세기 2장3절까지의 창조기사는 천지 창조의 전체를 개괄적으로 기록을 한 것이지만 2장 4절부터는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는 언약의 당사자인 ‘사람’에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장 4절 이하는 창세기 여섯째 날의 창조를 ‘사람’이라는 존재에 더욱 초점을 두어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는 단어와 문투(文套)를 사용해서 2장 4절 이하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5절을 잘 보시면 그 문장의 강세(强勢)는 ‘들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밭에 채소가 없었다는 것’에 있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에 있습니다.
(창2:5)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에서 ‘들’과 ‘밭’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사데’입니다. 그 단어는 ‘땅‘’에레츠‘라는 단어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땅‘에 초목과 채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경작하고 다스릴 들과 밭에 초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천지 만물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스리고 경작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밭과 들의 초목과 채소가 존재치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는 것과 초목과 채소는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경작되어 질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초목과 채소가 있었다 없었다 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땅‘에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들과 밭’에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목과 채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스위치 역할을 하는 인간이 없는 초목과 채소는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2장 19절에 보면 마치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이 창조된 후에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도 얼치기 신학자들에 의해 자주 회자되곤 합니다.
(창2:19)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그렇지요? 분명 1장에서는 짐승과 새들이 각기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아담보다 먼저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마치 아담이 먼저 창조가 되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기 위해 짐승들과 새들을 창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법의 시제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그렇게 까다로운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정확한 시제는 문맥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나오는 ‘지으시고‘’야짜르‘는 NIV의 번역처럼 ’had formed'나 ‘having formed'로 해석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던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러면 1장의 창조와 전혀 문제가 될게 없지요?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1장의 창조와 창세기 2장의 창조를 하나로 이야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19:3‐4)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4절은 창세기 1장 27절을 인용한 것이고 5절은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두 구절을 결합시키셔서 인용을 하심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분리된, 그리고 서로 모순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은 천지 만물 가운데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구절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흙’이라고 번역이 된 ‘아파르 민 하아다마’는 ‘땅의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티끌로 지어졌다는 것을 밝힘으로 해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이 끊기고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가 될 때 그저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티끌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를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창18:27) 27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삼상2:8) 8가난한 자를 진토(아파르)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여기서는 티끌과 거름더미를 동격으로 놓고 있지요? 그러니까 티끌인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는 똥 더미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티끌은 ‘저주와 심판, 그리고 완전한 패배’를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합니다.
(왕상16:2‐4) 2 "나는 너를 먼지 속에서 이끌어 내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았다. 그런데 너는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걸어서, 내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그 죄 때문에 내 분노를 사는구나.
3 내가 바아사와 그의 가문을 쓸어 버리겠다. 그리하여 네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만들겠다.
4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성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 바깥의 들에서 죽는 사람은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아사를 티끌에서 들어서 세웠는데 그 바아사가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게 되자 다시 티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와 그에게 속한 자의 시체를 개와 새들이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계시록의 언어가 등장하지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마치 창세기 3장 19절의 저주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같지 않으세요? 아담이 죄를 짓자 하나님은 ‘네가 흙이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티끌인 인간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있을 때는 생령이 되지만 하나님의 생명력이 떠나버린 인간은 그저 티끌인 것입니다.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 그 자체가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불신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 주 수요 성경 공부 때 공부할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라고 명기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地獄)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할 하늘의 복과 차단되어 땅에 갇혀버린 상태를 지옥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사람들이 그 지옥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달콤하고 짜릿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바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추구하던 그 달콤한 신기루들이 쑥 빠져 버렸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과 관계없는 상태인 지옥(地獄)이 실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삶인지를 알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믿음 안에 거하려 힘을 쓰는 것입니다.
(수7:6) 6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아이성에서 패배한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티끌이지요? 이렇게 성경에서 ‘티끌‘’아파르‘는 저주요 심판이요 패배요 보잘것없음의 상징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부를 쌓고 명예와 인기를 누린다 해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가 될 때 그 사람은 저주와 심판과 패배의 보잘것없는 티끌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공부할 때 확인했듯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 외양이 화려해도 죽은 사람, 티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그가 가진 재산이나 외모나 재력 같은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한국 여자 배우가 프러포즈 선물로 남자친구에게 2억 원 상당의 벤츠 자동차 와 5억 원 상당의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다고 해서 세간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리고 어떤 여배우는 30억 원을 호가하는 청담동 고급 빌라를 신혼집으로 장만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여자는 일단 예쁘고 봐야 한다는 자조석인 넋두리가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그게 정말 부러우십니까? 시체와 방불한 티끌들이 그 티끌에 치장하는 모습들이 정말 부러우세요?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우리의 가치관은 이제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러워해야 할 것은 그런 외형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의 복을 풍성히 누리며 사는가를 부러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잘 생긴 자와 못 생긴 자,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 와 같은 그런 모든 분류는 다 잊어버리세요. 이 지구상에 인간은 딱 두 부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영생을 소유한 자라는 관점에서 평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그저 티끌이라는 면에서 역시 평등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티끌들에게 서로 경쟁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올림픽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다 별걸 다 만들어놓고 모든 인간들을 경쟁 구도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티끌들은 그 경쟁의 재미 속에서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절대 경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 남을 밟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생명 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그 복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사소한 것들로 경쟁하지 않고 세상이 추구하는 그 ‘힘’이 없다고 풀 죽어 하지도 않습니다.
(약1:9‐11)
9.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10. |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11. |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약2:1‐4)
1. |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2. |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
3. |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
4. |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떠나서는 티끌에 불과한 사람임’을 아는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경쟁상대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사2:22) 22"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으니, 수에 셈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간들은 그 코에서 숨이 멎는 순간 순식간에 허망한 티끌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부를 쌓고 어마어마한 명성과 인기를 누렸어도 그 코에서 숨만 멎으면 그 사람은 며칠 안 가서 티끌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지요. 그래서 욥기4장에 보면 인간을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을 자’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자기부인)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우리는 그저 티끌이니까.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쓰인 ‘생기‘’네솨마‘는 ’생명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인간에게 부어졌던 ’생기’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었지 생명 자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생명의 기운’을 소유했던 아담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지를 기록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희생,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시는 방법으로 그 백성들을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닌 ‘생명’으로 만들어내실 것임을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에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따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그 곳에 두셨습니다. ‘에덴’은 ‘garden of joy''기쁨의 동산’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동산’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간’은 ‘울타리를 치다’라는 의미의 단어인 ‘가난’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울타리가 있는, 다른 말로 외부와 차단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울타리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덴을 창설하셨다’에서 ‘창설하다’로 번역이 된 ‘와이잇타’라는 단어는 원래 ‘심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에덴은 ‘어떤 특별한 것이 심겨진 곳‘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것들이 심겨져 있었나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울타리가 쳐진 동산과 두 나무’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완성이 될 것이며 어떤 원리로 움직이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으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그 두 나무의 상호 관계를 통해 완성될 것이고 통치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 두 개처럼 보이는 나무의 상호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통합된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다시피 선악과나무는 하나님의 계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는 단순히 먹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었다면 동산 중앙이 아니라 동산 구석에 심어 놓으셨겠지요?) 그리고 생명나무는 말 그대로 생명의 발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창2:17)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주시고 그 계명을 어길 시에는 죽이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서만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께 자신의 전부를 의뢰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고 있는 선악과나무를 통과하지 않고는 생명나무로 나아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계2:7)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여기 분명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자는 ‘이기는 자’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생명나무의 과실은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이긴 자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둘 다 좋은 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시고 선악과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실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일 수 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복잡하게 선악과나무를 에덴에 두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설명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드셔서 반드시 안식을 주시고야 마시겠다는 복음을 그 두 나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를 동산 중앙에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통해 너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티끌인지를 만 천하에 폭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는지를 인격과 오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설복시키시기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소품을 에덴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산중앙에 함께 심겨져 있었는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조금만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생명나무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인간이 언제 그 생명나무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됩니까? 인간이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로 발생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도래했을 때 생명나무는 드디어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주기를 은근히 기대를 하셨던 것이 아니라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그냥 폭로시키신 것입니다.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조차 지켜낼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임을 선악과를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티끌들(성경은 그들은 죄인이라 부른다)은 절대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티끌에 불과한 자들이 어떻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지요? ‘은혜’입니다. 티끌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저 똥 덩어리, 거름더미일 수밖에 없음을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티끌들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는 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과 두 나무의 이야기를 통해 흙은 흙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시고 그 땅(흙)이 어떻게 하늘을 덧입게 되는 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해 줍니다.
(고전15:48‐49)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하나님은 땅에 속한 ‘흙’에게 ‘하늘‘을 덧입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은혜‘라는 방법입니다.
(롬4:7‐8) 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8 주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티끌인 인간의 정체가 폭로된 후에 모든 인간들은 생명나무 콤플렉스를 앓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나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가 폭로되었고 ‘죽음’이라는 것을 당면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인간들은 비로소 생명나무에 대한 욕구를 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매한 티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다른 말로 ’종교와 이데올로기 윤리와 도덕, 과학과 교육‘ 같은 것들로 생명나무에 도달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다 뭐예요? 세상이 말하는 ‘힘’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로 인해 발생한 생명나무 콤플렉스를 세상의 힘을 소유함으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도 그 티끌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어 행복을 창조해 내 보겠다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주와 심판과 패배와 보잘 것 없음의 집합체인 티끌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통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아들의 품속에 집어넣으셔서 생명나무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왜 만드신 것입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의 티끌의 실체를 폭로하는 소품들인 것입니다. 제 말이 좀 잔인한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열심히 따 먹고 있는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품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의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동원된 소품인 것입니다.
이곳에도 혹시 그렇게 ‘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티끌에 불과한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드러내기 위해 소품으로 쓰이고 계신 분들이 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선악관나무와 생명나무, 이 두 그루의 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죽음 속에 숨겨진 생명’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기어이 어기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살해하는 피조물을 보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살해했을 것입니다. 아니라고요? 실제로 이 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생명나무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티끌로 살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과 열심으로 선악과를 안 먹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를 통해 티끌인 인간의 실체를 폭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너희들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이니까 그런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노력일랑 집어치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담들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애초에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티끌인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제넘은 티끌들에게 살해를 당하심으로 자신을 살해한 티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잘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실 십자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나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매달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를 따 먹어버린 지워지지 않는 주홍 같은 인간의 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안에는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죄를 하얗게 사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티끌이라 절대 그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품고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하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티끌이었던 아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 생명을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 앞에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또 무엇을 더 달라고 요구하시겠습니까?
그 엄청난 선물 앞에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잠깐 주어지는 여러분의 처지나 상황으로 절망하며 낙담하시겠습니까? 성도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 안에서 그 처지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자 들인 것입니다.
내 소원이 들어지지 않아서 울고불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왜 그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있는데도 이처럼 작은 고난에도 일엽편주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가를 고민하시면서 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대학시절 다니던 교회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3대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결혼하고 바로 아이를 가졌는데 몇 개월 후에 기형아 검사를 받아보니 아이의 다운증후군 수치가 너무나 높게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운 증후군은 아이의 아이큐가 50도 안 되는 정신박약 증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얼굴도 일그러져서 금방 정신지체아라는 것이 드러나는 그런 병입니다. 그 집안에 이미 다운증후군 병력도 있고 해서 의사는 낙태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정중히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려고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 친구가 어떤 기도 부탁을 했는지 아세요? 그 친구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닥친 상황을 굳이 바꿔 달라고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신 것은 그 일이 저희 부부에게 유익이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 그렇지만 지금은 저희 부부 모두 그 상황을 이겨낼 믿음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저희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더 큰 믿음을 주세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황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건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상황과 사건과 조건 속에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신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를 어서 없애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 원수의 핍박을 내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그리고 저 악당도 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실력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실력자들에게 더 나은 성숙을 위해 감당할 능력과 함께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세상의 힘들이 그저 티끌임을 경험케 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할 힘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걸 믿음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육신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저희 서머나 교회 개척 멤버였던 유정이가 졸업을 하고 홍콩에 직장을 얻어 LA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우리 청년들이 하나 둘 떠날 때 정말 마음이 서운합니다. 유정이는 5년 전에 저와 빅베어에서 있었던 수련회에서 만났습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유정이가 이제부터 나도 예수를 믿겠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부터 놀랍게 변해 가는 유정이를 보면서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고 감탄을 할 정도였습니다. 매년 있는 중국 선교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 년에 두 세 번씩 자비로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 선교에서 만난 아이들을 찾아가 그 아이들하고 일주일씩 시간을 보내면서 복음을 전하고 왔습니다. 복음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아주 잘 정리를 하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저는 유정이 에게 배운 아이들에게 머지않아 훌륭한 열매들이 맺힐 거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유정이가 그렇게 올바른 신앙 위에 우뚝 선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다녀가신 유정이 어머니의 신앙이 그 딸에게 그대로 본이 되었기 때문이란 것을 한국에 가서 유정이 어머니를 만난 뒤에 알았습니다.
유정이 어머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을 여러 개 앓고 계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걸리기 힘든 치료도 할 수 없는 희귀한 병을 여러 개 앓고 있는 사람의 고통이 어떤지 아세요?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 걸까’라는 좌절감과 자괴감까지 겹쳐서 그야 말로 암흑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유정이 어머님은 그런 병이 하나 하나 생길 때마다 더욱 더 평안해 지신 답니다.
하나님께서 병이 하나 생길 때마다 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의 성숙을 함께 주신다는 것이지요. 주변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그런 고통과 시련이 다 물러가야 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충고를 하면 그냥 웃으신 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들 이 세상의 티끌들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보여주고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그 자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리에서 당당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병약한 사람은 병약한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 됨의 행복과 기쁨을 뿜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잘 이겨내십시오. 힘이 들 때마다 우리를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다음 주에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고 에덴을 관통하여 흐르는 그 네 강들과 에덴을 수놓고 있던 보석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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