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신학(리차드 보쿰) 이필찬 역 한들출판사 2000
서 지 상
제1장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요한 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
요한 계시록은 서두에서 세 가지 종류의 문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제목에 해당하는 처음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께 제공하시고 그리고 계시의 연계 고리를 통해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어진 계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하나님 → 그리스도 → 천사 → 요한 → 하나님의 종)
요한 계시록은 로마 통치하에 있는 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공동으로 회람하도록 보내진 서신 형태를 가진 묵시적 예언서이다. 각 교회에 개별적으로 주어진 일곱 개의 메시지는 모든 교회에 주어진 요한 계시록의 전체에 대한 서신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세 가지 문학적 범주인 예언, 묵시문학, 서신을 차례대로 고찰한다.
2. 기독교 예언으로서 요한 계시록
요한은 그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인 교들에서 활동해 온 선지자이다. 초대 교회의 선지자들은 환상적인 계시를 받았고 그들은 그것들을 보고 형식으로 교회에 전달했다. 요한 계시록도 전체가 환상적 계시에 대한 묘사이며 신탁적 예언을 포함한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이 경험한 환상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목적으로 문학적인 창조로 변환한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기독교 선지자들 중 하나이고 구약 예언 전승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구약 선지자들이 앞선 예언들을 채택하여 해석했던 것처럼 요한도 그것들을 채택하여 해석한다.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의 전승에 속하여 기록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선지자들의 모든 종말론적 선포들이 성취되는 정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자신의 선지적 계시 안에서 그것들을 해석하고 모으고 있는 것이다.
3.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 계시록
유대 묵시문학에 있어서 선견자에게 계시된 천상적 비밀들은 주제가 광범위하여 역사와 종말만이 아니다. 그러나 요한의 묵시문학은 철저히 종말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받은 하늘의 계시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목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이루러지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심을 갖는다. 요한 계시록은 묵시문학의 장르에 합치되며, 구약 예언과 연속성이 있다. 요한의 작품은 이 세상에 대한 초월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지적 묵시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1세기 말에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지적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선지적이다. 또한 요한의 작품은 환상적 계시를 내포한 묵시적 전승에 속한다.
요한은 하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위해 하늘로 올려진다. 그는 그가 속한 시대와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었다.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최종적인 미래 속으로 옮겨짐으로써 인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안에서 현재의 종말적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의 관점에서 현재를 볼 수 있었다.
요한 계시록은 유대 묵시문학이 가지고 있는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때가 곧 올 것이다는 묵시문학의 관심을 요한의 묵시문학이 공유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 영원한 왕국의 수립에서 해결되어질 종말론적 위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은 유대의 묵시문학적 전승과 연속선상에 있다.
4. 다른 묵시문학과의 차이점
요한 계시록은 다른 묵시문학과 비교할 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다량의 시각적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다. 묵시문학에서 환상들은 선견자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는 천사에 의해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안에서는 시각적 상징들 자체가 의미를 전달하도록 표현하고 있다. 묵시문학에서 환상의 이미지는 그 작품의 다른 부분에서 되풀이 적용되지 않으나 요한 계시록에서 소개된 이미지는 반복되어 나타난다. 시각적 이미지의 풍부함과 환상적 순서의 통일성과 연속성은 다른 묵시문학과 비교된다.
둘째, 묵시문학과는 달리 요한은 자신의 이름으로 직적 기록한다. 그는 모든 예언이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최종적 종말론적 성취, 즉 전승 전체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선임자들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역사의 종말론적 상황이 바로 그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가명으로 저술할 필요가 없었다.
5. 회람 서신으로서의 요한 계시록
요한 계시록 책 전체가 일곱 개의 특정한 교회들에게 전달되어 회람을 위한 편지이다. 서신의 저자는 서신이 본래 목적했던 수신자들 외에 다른 독자들에게도 전달되기를 기대했다. 요한 계시록은 차별 없이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위해 기록한 것이다.
2-3장에서 일곱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승리에의 부르심은 요한 계시록의 끝 부분에서 묘사되는 종말론적 종착점에 이르기 위해 요한 계시록의 중심부분에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전쟁에 연결되어 있는 부르심이다. 일곱 교회의 성도들이 그들 자신의 특정한 상황에서 승리함으로써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기록한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묵시문학처럼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서만 쓴 것이 아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부요했고 압제자와 타협하고 있었다. 심판은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그들이 좌초한 심판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독교의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위로와 격려인지 또는 경고와 회개를 촉구인지가 달라진다. 이기는 자에 대한 부르심은 위로와 경고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그의 의의를 증거하는 사명에의 부르심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위로와 경고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의의를 증거하는 것을 준비하도록 고안되었다.
일곱은 완성의 숫자이다. 요한은 일곱 교회에 말함으로서 그의 메시지를 들은 모든 독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교회들에게 있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을 선보이고 있다.
6. 이미지 이해
아시아지역의 도시에 사는 요한 계시록의 독자들은 세상에 대한 로마의 제국주의적 능력과 이방종교의 화려한 이미지를 주는 환영들을 지속적으로 직면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은 요한 계시록의 독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다른 환상을 각인시킴으로써 로마의 강력한 인상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독교 선지적 이미지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계시록의 시각적 능력은 세상의 현재적 모습과 미래적 모습에 대한 대체적 환상들로 새롭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상상력을 일소하는 효과를 갖는다.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은 상징적 세계에 상상적 동참을 유발하는 자극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상징들이다. 요한계시록의 정확한 구성은 부분들과 전체의 의미를 알려주는 문학적 병행들, 대조들과 같은 복잡한 네트워크를 창출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본문 배후에 존재하는 구약 본문들 사이의 연결점을 전제한다. 아시아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그들의 유대적 특징 때문에 구약에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에는 당시에 존재하는 신화적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다.
제2장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요한계시록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연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마지막에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1. 신적 삼위일체
요한은 계시록의 초두에서부터 신적 존재를 삼중적 용어로 표현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 의 머리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4b-5a)
위 말은 요 1:4-5에서 서신을 처음 시작할 때 사용하는 형식이다. 초기 기독교 서신은 축복들의 신적 원인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명시함으로써 인사말의 기독교적 형태를 가미했다. 초기 기독교 서신들은 첫 머리에 삼위일체적 서식들이 있다. 그러나 요한의 인사말에 나오는 삼위일체적 형식은 독특하다. 그것은 유대적 혹은 유대 기독교 전승의 자료들에 대한 창조적 활용에 의해서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 1:4-5에서 인사말에 대한 요한의 창조적 변형은 신적인 존재에 대한 그의 이해가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삼위일체적 특징을 갖는 요한의 신학적 관심은 교부시대에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던 신학적 관심과 동일하다.
2. 알파와 오메가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안에서 두 번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선포한다. 한번은 요한이 환상을 보기 전이고(1:8) 두 번째는 피조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를 ‘다 이뤘다’라고 선포할 때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끝 글자이기 때문에 의미상으로 ‘처음과 나중’ 그리고 ‘시작과 끝’과 동일한 의미이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는 이사야에서 유래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처럼 신적 자기 칭호로서 나타난다.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권을 가지신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축약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선지적 조망을 결정하는 것은 철저한 유일신 사상이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원천이시며 목표이다.
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1: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1:8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어고 장차 올 자
4:8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11:17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16:5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
세 개의 시제를 사용한 형태가 세 번, 두 개의 시제를 사용한 형태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칭호는 야훼라는 신적 이름에 대한 해석이다. 출애굽기3장 14절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후기 유대교의 해석은 신적 영원성에 대한 진술로 이해했다.
이 칭호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세 개의 시제로써 신적 존재를 나타내는 형식문들은 그리스신들이나 철학적 지고 신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곤 했는데 신적 이름에 대한 유대적 해석에 대하여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유대적 해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들을 세상을 향한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오심으로 이해했으며 이것을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의 오심은 곧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성취이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에 있을 때 하나님의 종말론 오심은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 1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도었음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의 칭호에 대한 미래적인 요소를 대신하고 있다. 요한은 이 세상과 관련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 신적 칭호를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역사 안에서 존재하신다는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을 요한은 하나님의 영원한 미래 안에서 모든 만물을 성취로 이끄실 것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이 되게 하였다.
4.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이 칭호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번 등장한다. 이 칭호는 확장된 형태로서 신적 이름의 표준적인 번역이다. 구약성경에서 모든 만물과 역사 속의 사건들에 대한 야훼의 절대적인 권능과 주권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은 요한이 하나님께 대한 선지자들의 믿음을 계승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전능한’이란 하나님의 만물에 대한 실제적인 통제권을 의미한다.
5. 보좌에 앉으신 이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1:9-3:22) 후에 요한은 하늘 속으로 끌어 올림을 받고 있다(4:1). 요한은 일곱 교회의 상황과 하나님의 천상적 주권에 대한 환상을 본다. 요한이 하늘로 올려진 것은 하나님의 보좌는 모든 지상적 현상들의 뒤에 놓여 있는 궁극적 실체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함이다. 천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난 후에야 요한은 그것이 어떻게 지상에서도 세워질 것인지를 볼 수가 있었다.
신적 보좌에 관한 환상은 이사야 6장과 에스겔 1장에 있는 선지적 환상을 기초로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다. 유대 묵시록의 저자들처럼 요한도 하늘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본다. 하늘에는 천상적 존재들이 둘러싸고 끊임없이 경배를 드리고 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가시적 형태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에게 인지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고 있다. 환상의 특징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끊임없는 예배이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둘러 행해지는 천사들의 끊임없는 예배는 모든 실체들의 속성이 하나님 중심적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예배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미지도 있다.보좌가 놓여진 곳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통치를 행하시는 장소이다. 이십사 장로들은 천상회를 구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된 피조물들이며 그들이 가진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한다.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도래함으로써 로마의 가장된 신적 주권은 천상적 보좌에 앉으신 이의 진정한 신적 주권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 신적 통치에 대한 로마의 주권 침해는 짐승에 대한 우주적 경배로 그려지고 있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에 대한 우주적 경배를 통해서 그려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배타적 유일신론적 예배와 우상숭배가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로마 권력에 대한 비판
요한계시록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이해와 요한계시록이 견지하고 있는 로마 권력에 대한 비판, 이 양자 도두를 이해 하고자 한다면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을 정복에 의해 세워지고 폭력과 압제에 의해 유지되는 정치적 폭정과 경제적 착취 조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요 상징은 짐승(13,17장)과 바벨론의 음녀(17,18장)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로마 제국이 폭정과 착취로 유지되는 조직이라 할지라도 그 대부분의 군신들은 제국에 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군신들은 ‘땅의 왕들’로 표현되는 로마의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통치계급과 ‘땅의 상고들’이라고 표현되는 로마의 경제적 번영에 유착하여 유익을 누리는 자들이다.
요한은 로마 제국의 종교의식에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한다.
첫째는 짐승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에로 돌려야할 종교적 충성을 요구함으로써 스스로 절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으로 표현하는 ‘거짓 선지자’는 아시아 도시에 있는 제국의 제사직을 나타내고 있다. 제국의 종교의식은 짐승의 상을 세우고 그것에 신과 같은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경배를 드리게 하는 것으로써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요한의 선지자적 입장에서 볼 때에 그것은 우상숭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 군사적 권력을 신격화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로마 권력에 대항해야 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은 로마 조직이라는 악으로부터 자신들을 단절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면적인 박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증언자가 되어 하나님을 증거할 경우에는 로마와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언자는 로마의 이데올리기와는 다른 시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요한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지상적 권세보다 위에 계시다는 환상을 보여주고, 그분께서 로마의 절대적 권세를 상대적으로 만드셨고 로마의 신적 위상의 가장을 드러냈다.
7. 심판에 있어서의 신적 거룩함
요한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제 그의 왕국은 지상에 도래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은 지상의 불의에 대한 정죄를, 그리고 악의 분쇄를 요구한다. 악인들의 통치는 지상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에는 세 가지 시리즈가 있다. 심판의 세 시리즈는 점증적으로 혹독해 진다. 각 시리즈들은 신적 보좌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심판의 마지막 시리즈에서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는 이는 생물들이 끊임없이 찬양하는 하나님이시다. 각 시리즈의 일곱 번째는 최종적인 심판행위를 묘사하는데 이로써 악이 분쇄되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게 된다.
4장 5절(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에서 요한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자아 출현 때 나타난 뇌우 현상을 인용했다. 시내산 언약에서의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직접 묘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생물들이 심판들을 명령하고 천사들은 명령들을 수행한다.
하나님은 모든 가치의 기준점이 되는 창조주로서 자기 자신이 진리요 의로움이신 그분에게 돌려져야 할 절대적 주권은 땅위의 유한한 피조물들이 주장하는 주권과는 전혀 다르다.
8. 신적인 주권과 초월성
초월적인 통치자이자 심판주로서 묘사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우월주의에 대한 종교적인 투영으로 간주하여 비판을 받아 왔다. 비판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을 주권자로 묘사한 이미지들은 권력과 계급으로 이루어진 인간사회의 권위주위적 구조들에 대한 종교적 재가이다. 둘째, 하나님을 그의 피조 세계와 함께 계시고 관여하고 계신 분으로 나타내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독재권을 합법화 하지 않고 절대 권력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말한다. 보좌 이미지는 인간 세계로부터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적 주권과 인간적 주권 사이의 유사점보다는 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보좌 이미지가 취하고 있는 초월성의 의미는 하나님이 초인간적 존재로서 다른 존재들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환상은 독자로 하여금 유일한 창조주이자 거룩하신 분을 경배하도록 이끌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지하도록 일깨우고 자신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게 한다.
보좌에 앉아 계신 이로서의 하나님은 현재 하늘에 계시며 천사적 중개자들을 통해 땅위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종말론적으로 오실 때,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올 때에야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시게 될 것이다. 4장에서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에 도래해야 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악을 평정할 때에야 비로서 그의 왕국은 지상에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11:15). 오직 그때에 하나님은 피조물과 함께 거하시게 될 것이다(21:3).
9.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 속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심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것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인데 이러한 이해는 유대교에 있어서 특징적이며 또 초대 기독교가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장로들은 그들 자신이 피조물이며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신약시대에 유대 유일신론은 창조 교리와 예배 의식에 의해 명시되었다. 만물의 창조주는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 분만이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음으로 끝나는 생명을 주셨듯이 또한 죽은 자에게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은 죽음의 위협을 영원히 넘어선 종말론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인 것이다.
유대의 종말론적 소망은 단지 개인의 부활에서 그치지 않고 전체 피조 세계의 미래에 관한 소망이었다.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의 의미는 인간의 고통과 사망도 끝이 난다는 것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그리고 그것에 대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것에 의한 대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종말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10.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신실함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소망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에 대한 믿음에 그 기초를 둔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악의 권세들이다. 그들은 폭력과 압제와 우상숭배적인 종교로써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황폐케 하고 있다. 자신의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은 악의 권세들을 파괴함으로써 피조 셰계를 구원한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은 창세기 홍수 내러티브의 신학적 주제이며 노아언약 속에서 표현되어졌다. 요한계시록 4장 3절에서 보좌를 두루고 있는 무지개는 노아언약을 암시하고 있것으로 보인다. 홍수의 물은 혼돈 가운데 있었던 태초의 물로서 이해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시 그물을 없애지 않으시고 물과 물로 나누어 있게 하셨다. 그 물들은 피조된 우주를 다시 혼돈 상태로 복귀시킬 수 있는 파괴적인 잠재력이다.
이 혼돈의 물들은 바다인데 이로부터 짐승이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나타난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파괴적인 악의 근원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 세계를 모든 악의 위협에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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