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J. Moltmann 편,이신건 역,"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한들출판사) 중에서
친애하는 위르겐, 친애하는 동료들과 여러분, 우리 세대와 세대 간의 사귐을 생각할 때, 나는 먼저 20세기 독일사의 중심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더욱이 이 중심적인 사건, 즉 독가스, 폭력, 전쟁과 살인의 유산(遺産)은 아마도 나의 내면 형성과 본질적인 관련성을 갖는 사건일 것입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 이후의 신학이 어째서 그 이전의 신학과 똑 같을 수 있는지를 나는 지금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점은 현실과의 실제적인 관련을 맺지 않고 똑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는, 무감각한 신학에 대한 나의 놀람의 첫 징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교회와 무관한, 교양있는 시민계급 출신입니다. 누가 교회에 다니는지 아닌 지는 우리 집안의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집안은 누가 나치 주의자와 반유대주의자인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들은 서로 엇갈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매우 분명한 한계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이로부터 뭔가를 물려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나로 하여금 교회라면 무조건 반대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처럼 나도 갑작스럽게 신학을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고전어를 몇 학기 공부한 후에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내린 터라, 자유분방하셨던 내 부친은 상당히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내 모친은 오히려 당황스럽게 웃으셨습니다. 언젠가 이 결심은 내게 매우 중요한 분이었던 한 여자 선생님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분은 마리 바이트(Marie Veit)이며, 불트만의 제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아주 애띤 부인으로 우리 학교에 오셨으며, 파격적으로 종교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이덱거와 사르트르를 읽었으며, 신약성서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논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들의 '비열한 저승 신앙'을 대담하게 공격했을 때, 그분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이 지혜롭게, 친절히 질문하는 법을 터득하고 계셨습니다. "그래, 너는 바울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거니, 아니면 루터를 말하는 거니, 대관절 너는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니?" 그분은 나중에 나를 가르치시던 그 어떤 선생님들보다 뛰어나게, 나를 묵살하지 않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 문 앞에서 이성을 포기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성을 조용히 받아들 여야 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아마도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이것은 불트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그분은 내게 전달해 주셨습니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다른 스승들은 옛 작가들, 특히 키에르케고르, 파스칼입니다. 나는 이들이 전수해 준 그리스도교를 통해 교육받았으며, 이런 그리스도교에 소속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교회의 실제적인 기구 안에서는 거의 자리잡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기구를 문제가 많고 까다롭고 또 지겹기도 한 일로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내 마음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물으신다면, 지금은 내가 매우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내가 교회와 맺는 관계는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나와 맺는 관계도 바뀌었는지를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공론화(公論化) 과정으로부터 생겨나는 저항단체들에게 거는 나의 희망은 지금 훨씬 더 커졌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영이 대학에서 불지 않고 이미 오래 전에 대학을 떠나 버렸다고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구조를 철폐하거나 우리 세계에서 필요한 다른 일들을 하는 여자들과 남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이 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도 역시 내가 자라면서 익숙해진 다른 형태의 대화입니다.
나는 괴팅엔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불트만은 바로 전에 은퇴 하셨는데, 이것은 내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그분에게 배우기 위하여 마부르크(Marburg)로 갔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괴팅엔에 간 것은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때문입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관해 한 권의 책을 쓰셨는데, 이 책은 예수와 바울과 루터가 말한 것을 깨닫는 데 내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내게 만족스럽지 않았던 현대적인 부분이 한 군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서 나는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천박하게 변한, 반복되는 개념들을 집어던지는 법을 배웠고, 개념들을 바꾸는 용기를 배웠으며, 다시 질문하는 법, 역설적으로 되묻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다른 스승은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입니다. 나는 오늘 밤에 그분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나는 그분과 늘 다투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매우 자극을 받았고 고무되었으며, 특히 그분이 불트만을 공격하실 때에는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언제나 큰 스승의 편에 섰고, 스승의 편에는 한번도 서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그분은 신약성서 분야에서 내게 매우 많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경력을 쌓았습니다. 여하튼 나는 독일에서 는 전혀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자녀들을 기르다가 다시 대학으로 들어갔고, 대학의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열정적으로 교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생각으로만 가능한 여러 번의 중단과 여성 고유의 지연(遲延)을 경험한 후, 나는 결국 미국에서 몇 년 동안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특히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는 여성주의자들과의 만남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나의 신학 사고(思考)에서 일어난 다른 변화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른바 1968년 세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변화가 1968년과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일 따름입니다. 나는 이미 이전부터 아우슈비츠(Auschwitz)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 보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서구에서 잘못 진행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굶주리는 어린이들의 숫자는 줄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이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제3세계"라 는 단어가 등장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쾰른에 초교파적인 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마리 바이트(Marie Veit)도 여기에 소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예배 형태인 "정치적인 저녁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게 매우 활력이 넘쳤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신학적인 결실을 하나의 개념으로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우슈비츠로부터 결론들을 도출하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죄이해를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양심의 정치화"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나의 성욕(Sexualität)이나 늘 저주의 상태 아래 있는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말투로써는 나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내가 나의 손자들이 마실 물을 오염시키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실로 나는 지금 생태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 국제통화기금이 어린이들이 교육받지 못하는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온 몸으로 걱정하 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정치화입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하여 우리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세계 그 자체입니다. 이로부터 떠나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개인적인 일로 축소하는 일 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완전히 환상적인 희망이겠지만!-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사촌들과도 언젠가 한번 대화하고 싶은 점입니다. 언젠가는 그들도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용서받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참으로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이 나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출발점이기 때문에, 부르조와처럼 죄를 오직 개인에게만 돌리거나 카톨릭 교회처럼 죄를 오직 성욕으로만 축소하는 것은 이제 정말 충분하지 않습니다.
양심의 정치화라는 이러한 맥락 안에서 우리 세 사람, 즉 위르겐 몰트만, -나는 당연히 몰트만 당신을 맨 처음에 말해야 하겠군요.- 밥티스트 메츠가 "정치 신"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이 생겨났습니다. 이 단어는 내 게서 그 동안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해방 신학"에 관한 말을 듣고 미몽(迷夢)에서 깨어났던 그 날을 나는 아직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내가 일평생 동안 찾아 다녔던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해방 신학에서 배운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을 더 분명히 말하는 법, 구 원(소테리아)이라는 단어를 늘 개인으로만 몰아갔던 우리들이 지금껏 해왔던 것 보다 더 낫게 번역하는 법, 더 큰 지평,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언급하자면- 내게 가장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가 되었던 "중간자"(Interlokutor)의 개념입니다. 진정한 신학은 중간에서 말하는 자, 중간에서 묻는 자, 투덜거리는 아내, 과부, 질문을 던지는 무식꾼을 필요로 합니다. 중간자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나의 중간자가 원래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나는 더 이상 신학을 해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오래 동안 연구했으나 물론 아직은 완성하지 못한 다른 주요 문제도 바로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의 물음입니다: 어떤 의미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무신론적인 언어가 아닐까? 니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닐까? 나는 이에 관해 많이 싸웠고, 많은 어려움 을 당했으며, 스스로 되물었고, 자신의 견해를 뒤집기도 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것으로서 고전적인 신학의 근본 개념, 즉 전능(全能)의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이 개념을 갖고서 살아 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남자들의 망상(妄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즉 남자들 이 자신들의 소원을 하나님에게 투사(投射)한 것을 이해하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처럼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는 30년 가량이 필요했습니다. 여하튼 이것은 역사의 근본 주제에서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우슈비츠 에서 매우 작은 분이셨고, 이 시대에 아무런 친구도 없었으며, 하나님의 태양, 정 의(正義)는 빛나지 않았고, 성령은 우리의 이 땅에 거할 장소를 전혀 갖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힘(Macht)에 관해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지 더 정확히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둘째로 여성 신학이 내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여성 신학이 교정하고 수정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대명사의 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별도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정말로 적절한 것은 힘에 대한 더 자세한 이해입니다. 나는 이것을 독일말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말로 "Ermächtigung"(권한 부여)이라는 단어는 우리 세대에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고,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empowerment"(强化)라는 단어를 씁시다. 즉 선한 힘은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강화하는"(empower) 것,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동안에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로서 악귀를 추방할 수 있고 굶주린 자들을 먹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추상적인 그리스도론적, 신론적 연구가 얼마나 우리를 실제적인 실현 가능성으로부터, 실제적인 행동으로부터, 자매들을 향한 예수의 신뢰로부터 멀리 떼어놓았는지를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개념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도움이 되었던 중간자는 무엇보다도 유대인들과의 대화였습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나중에 한번 만났던 한스 요나스(Hans Jonas)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에밀 파켄하임 (Emil Fackenheim), 엘리 비이젤(Elie Wiesel)과 다른 저술가들도 생각합니다. 이들이 전통적인 신학을 교정해 준 것은 내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전능 비판과 그리고 전능과 전능 고집을 포기한 신이해는 여성적 사고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여하튼 이것은 남자들의 성본능과 남자들의 교의학 안에도 너무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립을 조금은 달리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나를 열렬히 끌어당기고 사로잡았던 주제입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나의 변화를 말씀드리자면, 이 주제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신비주의가 정의하는 "실험으로부터의 하나님 인식"(cognito dei experimentalis)이라는 신비주의적 이해 안으로 나를 점점 더 끌고 갔습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뉴 에이지(New Age)나 그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경험되는 진지한 나의 신비주의입니다. 나는 내가 앞으로 쓰고 싶은 글로 여러분을 인도하고 싶으며, 아울러 공개적인 토론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근본 개념, 즉 저항의 개념으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나는 신비주의의 개념과 저항의 개념, 이 두 개념들을 보 편화하고 싶으며, 이 개념들로부터 엘리트적인 경향성을 떼어 내고 싶습니다. 칼 라너(Karl Rahner)가 말한 신비주의적 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필수불가결한 요청입니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이 거듭 말해 왔듯이, 우리는 모두 신비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은 내게 점점 더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로 인하여 이제 제3세계 내에서는 더 이상 인간적인 얼굴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더 이상 경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 앞에서 신학이 장차 해야 할 일은 이런 근본 개념들, 하나님의 신비적 임재와 저항을 지향하는 해방 신학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만약 이런 다른 해방 신학이 없다면, 유럽을 위해서도 해방을 희망할 용기를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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