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에 나타난 카리스마에 관한 연구 조갑진 교수
고린도전서12장과 로마서12장을 중심으로
1.들어가는 말
한 기독교대학의 성서학자가 은사에 관한 논란 때문에 실험을 했다고 한다.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한 신자와 방언의 통역을 가졌다는 신자3명을 준비하고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 것이다.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한 신자의 방언을 녹음을 했단다. 그리고 난 후에 대기 시켰던 3명의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았다는 신자들을 차례로 들어오게 한 후에 그 방언을 통역역하게 한 것이다. 그 후에는 각각의 녹음통역내용을 비교한 것이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각 사람의 통역내용이 다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은사를 받았다라는 은사자들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대한 현상이다. 실험만 놓고 말하자면 우선 3명의 방언통역역의 은사자들은 셋 중의 둘은 틀렸든지 아니면 다 틀렸든지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실험을 통해서 은사문제를 목회와 선교의 현장에서 어떻게 분별하며 참된 은사가 교회공동체에 풍성하게 드러나게 해야하는 가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중요한 질문이다.
신약에서 은사문제를 이해하려면 성령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은사는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약의 성령을 이해하려면 전반부, 곧 복음서와 후반부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주목해야 한다. 전반부는 성령께서 예수님께 집중적으로 역사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미래에 선물로 받을 약속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전반부에서는 예수자신과 그의 사역에 집중되고, 후반부에서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집중된다. 이것을 구분짓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탄생한 초대교회가 현대 교회들의 모델교회로 강조되는 것은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회였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변화받은 베드로를 위시하여 120명의 신자들에게 나타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출발한 교회들이었지만, 역사의 흐름속에서 여러 가지의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가 보여 준대로 교회안에 여러 가지 은사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대답을 주지만, 오늘의 교회들도 동일하게 고린도 교회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들도 바울이 가르치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교훈에 귀를 기울여 교회를 세우는 차원에서 그 은사를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자가 받은 방언과 예언은사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은사문제가 발생한다하여서 은사단절론을 주장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은사로 문제가 있었듯이 은사로 인한 문제는 현대교회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은사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목욕물을 아이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과 같다. 바울서신에서 은사를 언급한 본문은 고린도후서 1:11(카리스마)과 디모데후서1:6(카리스마),에베소서4장을 비롯하여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다. 고린도후서와 디모데후서의 경우는 은사(카리스마)를 언급한 것뿐이므로 대부분의 은사와 관련한 본문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 집중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에베소서의 경우에도 은사목록에 나오지만 그것이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의 은사에 거의 포함된다. 이 논문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을 중심으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를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비교를 통해서 이 두권의 서신에서 말하는 은사에 집중하되 여타의 서신에서 보여준 은사들을 또한 취급할 것이다. 이것들을 비교하여보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가 파악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취급은 정경적인 순서보다는 기록연대순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바울의 은사문제를 학문적으로 다룬 시크프리드 샤츠만(Siegfried Schatz -mann)의 바울의 카리스마신학(A Pauline Theology of Charismata)에 상당부분은 빚을 지고 있음을 밝힌다. 이 은사의 문제를 용어와 관련하여 구약과의 중간기유대교와의 관련성속에서 그 배경을 살펴보고 성경본문에 대한 주석적 고찰과 더불어 바울이 언급한 은사의 특징을 살펴보고 바울이 은사를 통해서 교회와의 관계에서의 어떤 윤리적인 기능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2. 카리스마의 용어
카리스마에 대한 연구들은 나타난 현상과 그 효용성에 대한 기대가 증폭됨으로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의 매우 효율적인 방편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신학자들도 신학적 범주화와 전제조건을 가짐으로 교파적 관점을 달리하는 표식(marks)이 생겨났다. 카리스마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4가지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심층적 연구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어원의 연구다. 둘째로, 그것과 관련된 것은 용례의 연구다. 셋째로, 바울서신에서 증언되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은 동의어 연구이다. 넷째로, 카리스마(타)의 의미를 확정짓는 용어의 정의이다.
2-1. 카리스마의 어원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하고 또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세를 재현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들인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과 관계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카리스마는 반드시 성령과 관련이 된다. ’카리스마'는 '카리스'라는 어근에서 사용되었는데 전자는 간헐적으로 사용되나 후자는 일상적인 헬라문헌과 신약에서 공히 풍성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희소성 때문에 바울에게서만 카리스마가 독특한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카리스마는 바울로부터 그 어원적 중요성을 획득했다라고 할 수 있다. 바울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은혜(grace)로 번역되는 ‘카리스’와 ‘은사’(gift)에 대한 독특한 신약적 용어인 ‘카리스마'는 한면에서는 ‘카리스'와 연결되고 또 다른 한면에서는 영적현상들이 ‘카리스마타’라는 면에서는 ‘프뉴마’와 연결된다. 그래서 카리스마는 ‘영적인 선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은 은혜의 구체화, 즉 인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시고 권세있는 관심의 구체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거룩한 은혜의 수단이 되는, 즉 하나님의 은혜경험의 매개가 되는 어떤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사용되어진다. 바울이 로마서 1:5에서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인상적인 표현으로서 사실상 고린도전서12:1과 14:1에서 푸뉴마티카=카리스마타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중복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은 추가적인 강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은혜는 아마도 구원사건을 표현하는 바울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일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은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이나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카리스마는 은혜의 큰 틀에서 주어지는 구체적인 선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2. 카리스마의 용례
신약에서조차도 카리스마는 상대적으로 희귀한 단어로 17번만 나타난다. 베드로전서4:10을 제외하더라도 모든 언급은 바울서신에서 발견된다. 로마서에서 6번과 고린도전서에서7번 그리고 3개의 여타 바울서신에서의 언급들을 포함해서 16번의 언급이 신약에서 나타난다. 이 용례는 바울이 최초로 이 용례를 소개했거나 또는 교회가 바울이 이전에 그 용어에 친숙해 있어서 바울이 이미 통용중인 표현을 사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문제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할 만한 어떤 중거도 제시할 수 없으므로 본 용어의 중요성은 독특한 바울의 것이며 그것은 그 스스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한 결실이었다. 던(James D.G. Dunn)은 “이 단어의 선택을 결정짓는 바울의 중요한 영향력은 자기 자신의 경험, 즉 그것이 묘사하는 창조적인 경험이다"라고 했다. 용례와 관련하여 첫째, 바울은 카리스마의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로마서6:23과 5:15,16에서처럼 카리스는 사용되지 않지만, 카리스마는 여기서 카리스와 상당히 겹친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범위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카리스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면서, 신자와 관련하여 그 행위의 포괄적 결과를 포용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사(카리스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이니라."(롬6:23,RSV)
둘째, 이 용어는 신자에게 주어진 특정한 은사로 두 번 사용된다.
고린도전서 7:7에서 독신에 관해 말하면서 바울은 카리스마를 개인화 한다:“각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라고 하며 고린도후서 1;11에서 카리스마를 아주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바울을 구해내는데 허용된 하나님의 호의로 간주한다. 특히 독신의 목적이 고린도전서12:8-10과 로마서 12:6-8에서 은혜의 또 다른 나타남 즉 교회의 오이코도메(세움 건축)와 같다면, 물론 고린도전서7:7을 아래의 제3범주에 할애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후서1:11은 본 용어의 일반적인 사용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셋째, 본 용어는 신자의 공동체 내에서 은혜의 나타남을 가장 빈번히 보여준다. 로마서 11:29에서 자신의 선택이 그들의 은사와 부르심에서 확립되는 구약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초점이 모아진다. 주요구절들인 로마서12:6-8과 고린도전서 12-14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특정한 은사들을 반영한다.
마지막으로 직분으로서의 카리스마 사용의 용례를 볼 수 있다. 로마서 1;11과 고린도전서 1:7 그리고 디모데전서4:14와 디모데후서1;6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이해가 가능하다.
2-3. 카리스마의 동의어들
바울은 동사와 명사의 형태로 공히 동의어로 사용했다. 카리조마이가 일반적인 나눔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처럼 디도미는 동일한 기본적 행위를 나타낸다. 신약에서 동사의 주어는 흔히 하나님 예수님 또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부어주는 성령이다. 명사형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에베소서4: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선물(δόματα)을 주셨다"고 언급한다. 4:7에서 바울사도는 본 인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선물(δόματα)의 분량대로 은혜(χάρις)를 주셨으니(ἐδόθη)" 여기의 도레아(δόματα)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와 호환적으로 로마서5:15에서 사용된 반면, 5:16에서 바울은 더 나아가 도레미와 카리스마를 병행시킨다. 그리고 엡2:8에서 구원의 은혜적 성격을 강조하는 도론의 사용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추진력을 보여준다. 고린도전서12:4-6에서 복수형 카리스마타는 또한 본 용어 디아코니아와 카리스마로 병행된다. 고린도전서12:1과 14:1에서 두 번 복수형으로 사용한 명사 타(τα) 프뉴마티카(πνευματικα) 역시 “은사성의 언어”에 속한다. 프뉴마티카(πνευματικα)와 카리스마간의 관계성 문제는 그들이 동의어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첫째는 카리스(χάρις)와 프뉴마(πνεῦμα) 역시 호환적이기 때문에 프뉴마티카는 완전 동의어이다. 그래서 프뉴마티카는 "성령의 은사의 총체"를 나타낸다. 둘째는 두 용어간의 동의어의 자격이 있다. 셋째는 동의어 가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견해다. 이상의 논의에서 카리스마의 용어사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의 주요사항을 정리할 수 있다.
카리스마(타)χαρίσματα)는 카리스(χάρις)에서 유래된 말로서 교부문헌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대중적인 헬라문헌에서 조차도 용어사용의 용례가 희귀한 바울만의 독특한 개념이다. 도레아 도레마 도마타 그리고 카리스와 같은 동의어적 표현을 사용할 때 바울이 나타내 보여준 용이함 때문에 은서성에 대해 바울이 선화하는 용어로서 카리스마의 독특성은 더욱 증가된다. 케제만(E. Käsemann)은 카리스마를 “은혜의 개인화, 프뉴마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참여, 그리고 우리의 기독교적 소명의 구체화”로 정의한다. 던(Dunn)은 "특정한 경우에 그리고 그 경우를 위해서만 은혜와 권능의 경험이다"라고 함으로 은혜의 체험적인 국면을 강조한다. 슐츠는 “바울에 따르면, 카리스마는 무엇보다도 하나요 동일한 성령의 은사, 선물, 부여, 그리고 나타남, 구체화 그리고 개인화, 권능으로서의 은혜의 역사이며 결국 그것은 원수를 포함하여 이웃에 대한 섬김의 직분이다."라고 함으로 원수까지로 이웃에 대한 섬김의 스펙트럼을 확장한다. 이러한 카리스마타에 대한 이해는 존 스토트가 적절히 정의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체적이고 상응적인 봉사하도록 맞추어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부여된 어떤 역량들”이라고 하면서 “카리스마는 능력자체도 아니고, 사역이나 직임자체가 아니라, 사역을 위해서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능력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은사와 그 속에서 은사를 행할 수 있는 직업, 혹은 직업과 그것을 가지고 직업을 감당하는 은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3. 바울 카리스마의 배경: 구약과 '중간기'유대교에서의 성령
파이게(T. Paige)는 바울의 성령론의 배경을 다음의 3가지 근원으로 요약하고 있다. 구약의 경전, 중간기 유대교 문헌, 그리고 초대 기독교사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로 구약과 중간기 유대교에서 성령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해 사용된 '루아흐'로 쓰였고 70인력(LXX) 에서는 프뉴마로 번역되었으며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다소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이 용어는 때로는 '숨/호흡'을, 때로는 '생명력'이나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 구약성경 중 가장 오래된 번역 중의 하나인 어람어 탈굼역에는 NIV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물위를 운행하시니라”를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을 휩쓸더라'(While a wind from God swept over the face of the waters)”로 옮기고 있다. 마치 한 사람의 ‘영’이 그의 ‘활력'이거나 ‘생명'이듯이 성령을 활동하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활력이이라고 설명하기 쉬울 것이다. 따라서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여호와의 영'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행위를 수행하는 ‘여호와의 팔'이나 ‘여호와의 손'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행동하시는 야훼자신을 언급하는 방식의 하나로, 그 자신의 보이지 않는 임재/현존의 연장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통상적인 행위들에 관해 두 가지 점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권능의 활동 또 다른 면은 계시와 지혜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현존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영은 전형적으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활동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거의 독점적으로 그 거룩한 나라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한 1세기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예를 들어 매주 회당에서 구약 성경이 낭독되는 것을 들음으로써 성령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실상은 그들도 취사 선택적으로 듣기 십상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안에 있던 다양한 집단이 성령의 역사의 다른 측면들을 각각 강조하면서 그 밖의 다른 측면들을 무시했다. 중간기 유대교 문헌에서 나타나는 성령은 무엇보다도 ‘예언의 영'이었다. 따라서 성령으로 기대되었던 가장 전형적인 은사들은 다양한 유형의 은사적 계시, 은사적 지혜, 그리고 급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은사적 발언이었다.
3-1. 예언의 영은 가장 흔하게 은사적 계시와 지도를 제공한다.
유대교 저작물들 가운데서 ‘예언의 영'은 가장 흔하게 은사적 계시와 지도를 제공한다. 전혀 만난적이 없고 그래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알아낸다는 기록을 접한다. 이것은 바울을 가르쳤던 가말리엘의 손자의 경우로 가말리엘에게 마베개의 이름을 알려준 것은 성령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랍비들과 탈굼의 예들은 앞서 시사했듯이 풍성하다. 막스 터너의 주장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솔로몬에서 랍비 시므온 벤 요카이에 이르기 까지 계시되었다 라는 말로 그 예를 증명한다. 그 계시의 주체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라는 주장이다.
3-2. 예언의 영은 은사적 지혜를 제공한다.
후대 유대교에 의해서 일정하게 언급되고 있는 성경의 원형적인 예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언약적인 기구들을 세공하는 일에 있어 온갖 지혜를 갖게 된 브살렐(출31:3),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나가고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 70인의(혹은72인의?) 장로들일 것이다. 성경의 증거 외에 전형적인 예로는 필론의 ‘모세의 생애'(life of Moses) 2.265를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문맥에서 필론은 안식일과 관련된 모세의 지시사항들을 논의한다. 필론의 관점에서 은사적인 지혜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인간의 마음이 그 지혜를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은사적인 계시와 유사하다. 그러한 이해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개입하셔서 마음을 지도해 주셔야만 한다. 에스라4서 14:22에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태초부터 세상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겠다는 요청에 응답은 자신이 받은 바를 표현 할 수 있도록 지혜와 이해로 가득 찬 잔을 받는 맥락이 잘 드러나 있다(25,40-41).
3-3. 예언의 영은 때때로 엄습적으로 임하는, 감동된 예언적 설교를 제공한다.
여기서 엄습적이라는 표현은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사로잡혀서 감동을 받아 말하게 된다는 뜻이다. 민수가23-24장에는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억지로 이스라엘에 예언적 저주를 말하기 원했다. 이스라엘은 발락의 왕국 모압을 위협하고 있었다. 발람은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의 예언을 받았다. 발락이 발람에 대해서 화를 냈을 때, 발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발락,---그대는 그 문제 전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그대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을 때, 이와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아예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그(성령)가 자기 원하는 대로 그러한 언어와 말을 발설하도록 하고 그에 대해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Josephus, Antiquities 4.119). 여기서 예언자 선지자는 실재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고 있지 못한 것처럼 그러한 예에 반영되어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같이 중간기 유대교 문헌에서 나타나는 성령은 무엇보다도 ‘예언의 영'이었다. 따라서 성령으로 기대되었던 가장 전형적인 은사들은 다양한 유형의 은사적 계시, 은사적 지혜, 그리고 급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은사적 발언이었다. 바울 은사론에서 언급한 영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으로 비롯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또는 하나님의 영으로 나타나지만,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나타나며 종말론적인 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유대교문헌만을 다룬 것이다.
4. 두 서신의 기록정황과 해당본문의 위치
바울이 기록한 두 서신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은 발신자와 수신자간의 정황을 이해하지 아니하고는 서신을 해석할 수 없다. 어떤 문맥에서 은사에 관한 부분이 거론되었느냐는 것이며 왜 이 은사부분을 논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교회의 정황과 고린도교회의 정황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4-1. 고린도전서와 12-14장의 위치
고린도는 아가야지역의 그리스의 주요도시로서,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수스 지역을 연결하며 에게해와 아드리아 해 사이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고린도는 두 개의 큰 항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고린도만 하단에 있는 레키움이며 그곳에서 이탈리아와 서방으로 무역하였다. 다른 하나는 조금 떨어진 겐크레아라 불리는 항구로 이곳에서는 아세아로 무역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고린도는 선로의 요충지가 되었고 급기야는 해양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린도는 엄창난 부를 축척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외극장 운동경기장 각종 지방 신전등을 골고루 갖춘 경제문화 종교도시로 성장 발전했다. 이러한 급속적인 발전은 사치와 환락과 매춘이 성행하여 도시를 온갖 죄악으로 오염시켰다. 고린도의 타락상이 극에 달하여 ‘코린티안 조마이(고린도인처럼 행하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이 말은 시대적 상황을 지적하는 의도로서 사용됨에 따라 '매춘행위를 하다'라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런 물질적 풍요로움과 함께 극한 우상숭배와 음란이 교회안까지 침투하였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A.D. 50년경), 고린도는 50만 이상을 가진 도시였으며 부와 쾌락의 도시로서 아가야의 수도였다. 고린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아프로디테'란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 약1000명의 창녀가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그밖에 ‘세리비스' ‘아시스'라는 신전도 있었다. 특히 ‘이스두무스'에서는 올림피아 다음가는 인기있는 운동경기가 2년마다 열리는 경기장이 있었다. 아덴을 출발하여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고(행18:2),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했으나 핍박을 받아 회당을 떠났다. 이때 회당 장 유스도의 집에 거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회당장인 그리스보가 그의 가족과 함께 믿게 되었다(행18:7-8). 바울은 약1년6개 월 동안 머물렀다. 고린도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고전12:2) 또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하류에 속하였다.(고전1:26이하)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적잖았으며 상류급과 부유층 신자들도 더러 있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교회에는 아굴라가 전도자로 있게 되었는데 아굴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으며 웅변에 능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다(행18:24 이하;고전3:5 이하).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여러 가지 교회문제에 관하여 보낸 질의서에 대한 답변으로 기록되었다(고전7:1). 또한 고린도교회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식에 대한 올바른 도리를 증거 할 목적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존재하는 문제인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의 사회구조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지키며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를 교훈한다. 고린도전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맥락에서 서신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적 부도덕, 성도간의 송사, 성만찬의 문제, 예배시의 무질서의 문제와 은사의 문제와 부활의 문제를 다룸으로 제기된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슈미탈즈(W. Schmithals)는 영지주의를 고린도교회의 근본문제로 파악하고 다른 학자들은 방언의 남용을 근본문제로 주장한다. 방언을 남용하는 자들은 열광주의자들로 아마도 고린도교회 내에서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는 이들이 교양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문맹개종자들, 노예들, 그리고 항만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4-2. 로마서와 12장의 위치
로마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100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국제도시였다. 제국내의 반란에 신속히 대처하려고 잘 닦아놓은 도로는 군사물자와 장비를 원할 하게 수송하려는 목적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통 상으로 세계 중심도시였던 로마시에는 상류층의 귀족들과 함께 시민들, 장사하러 온 상인들, 여러 종류의 유랑민들, 피정복지에서 끌려온 노예들과 더불어 각종 인종과 민족이 잡거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 로마시에 있던 노예의 수는 20-30만에 이를 정도여서 로마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로마의 티베르 강 건너편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왔다가 자유인이 된후에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로마사람들 중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높은 도덕적 삶이 그들에게 충분한 매력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로마에 사는 유대인의 인구는 5만명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로마교회는 가정교회들(house churches)로서 몇 군데에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자기집을 교회로 내놓았다(롬16:5).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했던 바울이지만,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심으로 갈수 없던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A.D. 49-52년) 끝 무렵에 마침 로마에서 추방되어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난다. 이 부부는 고린도에 체류한 3개월 동안에 바울을 맞아 동역하면서 바울이 가기를 열망했지만, 막혀서 기다리던 로마교회의 최근 소식을 알려주었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로마의 가정교회들이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과 이방헬라의 배경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 온 사람들이 서로 간에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갈등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다른 배경에서 로마교회에 들어옴으로 피차간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로마교회 안에서는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자들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글라디우스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로마추방령으로 모든 유대교배경을 가진 신자들이 추방됨으로 사도행전18:1-2에 의하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추방되어 로마로 온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교회는 이제는 이방헬라계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성장했고 네로황제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로마로 돌아온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자로 전락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형편이 역전된 것이다. 여기에서 생기는 갈등을 바울은 어떤 경로로든지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부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전해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형편을 알고 있던 바울은 아직은 방문이 허락되지 않지만, 로마교회성도들을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헬라인에게로다. 그리고 강한 자와 약한 자를 지적하면서 그러나 서로가 용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개연성이 있는 가정이다. 갈등하는 교회공동체에게 그러나 복음으로 변화되어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야하는 공동체에게 12장부터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면서 은사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요 선교사인 바울이 교회의 문제를 풀기위한 목적으로 편지를 쓰면서 그는 과연 무었을 말하려 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분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화목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삶의 구체적인 방식을 말할적에 성령의 은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4-3. 두 서신의 기록목적과 본문의 위치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의 기록목적의 공통점은 각각의 교회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의 로마교회가 두 개의 그룹의 불편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고 고린도전서의 고린도교회역시 교회공동체 안에 성적타락의 문제, 혼인에 대한 문제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 성찬에 관한 문제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교회공동체를 분열시키며 교회교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들로서 반드시 해결하고 해소되어야 할 문제였다. 편지를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답을 주는 바울은 문제의 해결의 과정에서 로마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맥락에서 은사문제를 다루고 있고 ,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는 맥락에서 은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두 서신을 통해서 로마와 고린도교회가 교회로서 정상적 기능을 하기 바라며 그렇게 작동되지 못하는 것과 관련하여 은사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로마교회는 교회 안에 발생한 갈등의 문제를 삶의 문제와 연결하여 강조한다면 고린도교회는 이미 은사문제로 발생한 교회 안에서의 문제를 올바르게 잡아주는 차원에서 은사의 문제를 다르고 있다. 이 두서신이 제3차전도 여행 중에 쓰여졌고 고린도전서가 로마서 보다는 먼저 쓰여졌기 때문에 정경적인 순서보다는 기록연대의 순서에 따라서 해당 본문을 주석할 것이다.
5. 바울서신본문의 문맥과 주석
5-1. 고린도전서1:7과 7:7의 은사
바울은 고린도전서1:7에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에서 전문적인 용어로서 카리스마타(χαρίσματα)를 사용했다. 바울은 성령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어느 은사도 공동체로서 그들에게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인정하면서 개인에게가 아니라 전체로서 교회에게 말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갈등과 부조화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렛은 “고린도에서의 분쟁은 은사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평가하고 사용할 때 조화와 균형의 부족 때문이었다"라고 한다. 그노시스와 로고스를 두 개의 “독특한 신령한 은사 또는 자질”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명백하게 고린도인들이 언어지향적 영성의 표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엔 판티 로고는 집합적인 모든 영감된 형태의 언어로 이해하도록 요청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미래를 희생하여 현재의 황홀과 흥분의 경험에 몰입하는 반면, 바울은 그 신령한 은사를 준 목적이 미래 곧 종말의 배경에 두었다. 콘첼만(Conzelmann)은 “카리스마(타)의 소유는 종말의 실현이 아직 아니며, 이루어질 것에 대한 열성”이라 하였다. 바울은 13장에서 은혜의 선물 곧 은사와 종말과의 관계에 대하여 할 말이 더 있었다. 그래서 카리스마(타)의 소유 또는 현존이 성령안에서 삶의 절정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활발한 사역에 종사하면서 주님을 간절히 기다릴 때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성령의 현재 역사이다(고전1:12참조).
고린도전서 7;7에서 독신을 카리스마로 언급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기를, 즉 미혼이기를 소망하는 바울의 표현을 따른다. 독신과 결혼의 논의는 7:1부터 시작되는데, 바울은 독신을 하나님의 은혜와 그 구체적인 표현의 문맥안에 놓음으로 고린도교회 성도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고린도교인들의 한 당파는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것”, 또는 더 올바르게, RSV를 따르면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면서 성관계의 문제에서 모든 신자들의 일치를 주장했던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7:7하반절에서 은사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은사를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 저 은사를 받는다라고 한다.
독신을 은사로 해석하면 결혼한 사람들은 마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서 결혼한 사람자체가 교회공동체에서 마치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바울이 말하는 독신이 은사라고 하는 해석은 “한 사람이 이 은사를 갖고 다른 사람은 저 은사를 갖는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상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은혜의 선물이기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혼도 또한 하나님의 은사로 이해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다만, 독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특별한 은사”로 그것은 자신의 소명에 적합했다고 말하고 있다. 맥고먼(MacGorman)은 “그것이 성적 유혹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탈선에 빠지지 않고 사도로서 순회 사역을 완수하도록 무장시켰다”고 고찰했지만, 과연 이 주장을 받아야 할지는 의문이다. 다만 독신은 바울에게 준 하나님의 은사로 사도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유익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은 독신의 은사가 자기에게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게하는데 보다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게 해주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5-2.고린도전서12:8-10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되는 은사의 종류는 9가지이다. 그 9가지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의 은사, 기적, 예언, 영분별, 다양한 종류의 방언, 방언의 통역이다. 바울은12:1부터 그 목록들을 가리켜서 “신령한 은사” 또는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는 반면에 다른 은사들을 :“사역적 은사" “카리스마적 은사" 또는 “동기유발적 은사"로 말하고 있다. 바울이 12:4에서 카리스마(타)를 프뉴마와 연계한 것은 그러한 자의적 구분을 무효화 시킨다. 다양한 종류의 카리스마(타)로 성령의 나타남은 공동의 선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열거하는 은사의 순서를 “가치의 순서”(order of value)로 이해하기도 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은사를 열거하면서 알로스와(ἀλλῳς) 헤테로(ἑτέρῳ)를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비록 헬라어에서 이 단어가 꼭 구별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울은 여기에서 어떤 구분을 목적으로 헤테로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을 통해서 바울은 그가 언급하려는 은사를 3개의 그룹(three groups)으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가 아래의 (1)(2)이고 마지막의 (8)(9)이고 나머지는 (3)(4)(5)(6)(7)로 구분된다.
(1) 지혜의 말씀(Utterance of wisdom)
본래 고린도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소피아로서의 지혜는 무엇을 말했는가에 대하여서는 논의를 생략하겠지만, 고린도의 그리스 회중이 인간의 철학과 재담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표어가 소피아(지혜)와 그노시스(지식)이었다(고전1:17-2:16). 바울은 인간적으로 획득한 지혜와 지식과 그로인한 교만(4:6-10;8:1-3)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여된 십자가의 도를 강조했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의 말씀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즉 우리의 의, 거룩과 구속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이 있다(고전1:30). 이것은 신비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인데(2:7)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고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었다(2:7-10). 이것은 당시의 지혜로 말한 세상의 관점과는 전혀 차별화된 내용인 것이다. 인류구속의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클라이맥스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고 그 지혜를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행위를 지혜의 은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십자가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선포를 통해서만 구원의 사건으로 나타나기에 복음전도의 행위 그 자체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가진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2) 지식의 말씀 (utterance of knowledge)
소피아와 같이 그노시스도 고린도에서 바울에 반대하는 당파중의 하나의 모토였을 것이다. 그노시스파는 정통기독교의 입장과는 크게 달랐다. 육체를 부정적으로 영혼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원론이었고 개인적인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극단적인 선악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8 에서 말하는 지식, 곧 그노시스는 “실재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우주의 구조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우주내에서 영적 물질적 관계에 대한 카리스마적 통찰력”이었다. 또 슈르만은 그노시스를 “실재를 더 지향하는, 사람의 영의 깊이로부터 오는 신령한 이해로 본다.” 바울은 그노시스파를 의식하여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지식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언급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바울이 구분하였는지의 여부 및 방법을 말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두 언어 간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노시스의 특별한 본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라고 간주했던 공동의 선을 위한 영감된 지식의 말씀이었다.
열광주의자들이 이교의 영향으로 비롯된 이방적인 방언에서 예수는 저주받을 자라는 말은 할 수 없고 성령에 의하여 고백되고 선포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백마디의 잘못된 방언을 하는 것 보다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진정한 지혜와 지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성수는 칼빈의 주석을 통해 “지식은 사물들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지만, 지혜는 보다 비밀스럽고 고상한 성질의 사물들에 대한 통찰력이라고 구분했다.” 그는 골2:3의“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안에 숨겨져 있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서로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지식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 지혜는 거룩한 것들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라고 하여 지혜는 지식보다 이해의 정도가 더 철저하다고 하였다.”
(3) 믿음(faith)
믿음의 본질은 동일하지만 믿음이 역사하는 방식은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구원에 반드시 요구되는 믿음(엡2:8) 둘째는 우리 사람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일부로서의 믿음(갈5:22), 셋째는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서 역사하는 기적적인 믿음(고전12:9)인데 본문에서의 믿음은 세 번째의 믿음을 말한다. 라찡거는 고린도교인들이 그들 은사의 3개의짝 즉 소피아(σοφία), 그노시스(γνώσεως), 피스티스(πίστις)를 가졌다고 상정하면서 바울은 그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것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피스티스 엘피스(ἐλπίς), 아가페(ἀγάπη)와 아포스톨로이(사도), 프로페타이(선지자), 디다스칼로이(교사)의 3쌍과 더불어 소개한 자신의 은사목록은 물론, 자신의 3쌍은 고린도교인들의 열광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피스티스를 신령한 은사로 명명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아마도 산을 움직일수 있는 일종의 특수한 믿음(고전13:2)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엘리야에게 죠지 뮬러, 허드슨 테일러에게 발견되는 믿음이다. 콘첼만도 “믿음은 여타 은사들과 함께 주어진 특별한 은사로, 믿음자체만이 아니라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으로의 믿음”이라는 동일한 주장을 한다. 따라서 12:9에 언급된 믿음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따라 특별하게 나타나는 믿음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유의 할 것은 구원받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도 소유하는 것이기에 분별을 해야만 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정상적 은사로서 이 믿음의 은사는 역사를 동반하기에 바울도 데살로니가교회를 언급할 적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전1:3)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믿음의 은사는 기적을 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감내하고 순교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은사이다. 이 믿음의 은사는 적어도 뒤에 나오는 두 가지 은사를 포함하는 종적(generic)은사이다.
(4) 신유의 은사(Gifts of healing)
카슨(Carson)이 고린도전서12장의 세 개의 경우(28,29)모두 ‘병고치는 은사들’이란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다양한 신유은사들, 즉 한사람이 어떤 종류의 병들을 어떤 경우에만 고친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신유은사들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은사는 의사나 약품을 통해서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기적적인 능력으로 고치는 은사를 말한다. 바울은 12:9,28,30의 3곳에서 이 은사를 언급하면서 이것이 모든 은사가 그렀듯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 은사는 건강한 삶을 비롯하여 병이 든 경우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신유의 은사가 모든 질병을 다 고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병마저도 신유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중에 남겨놓으신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은자들은 제한적일지라도 병든자를 치료하는 역사가 따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재현하는 것으로 믿는자에게 따르는 표적과 맥을 같이 한다. 교회공동체 안에 선별적으로 성령께서 원하심을 따라 주신 이 은사는 메시아적 신유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치유의 활동으로 나타날 적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성결교회는 4중복음을 통해서 이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강조는 예수님의 3대사역중의 하나인 신유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사역을 이 역사가운데 재현하고자 하는 선조들의 열망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단지 병만을 치유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 병의 근본원인인 죄를 치유하고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말하고 있다.
(5) 기적(miracles)
고든 피(Fee)는 ‘기적’은 아마도 병고침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초자연적 역사들, 보통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적을 헬라어로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기적의 사역” “전능한 사역”을 말한다. 바울이 굳이 이것을 신유의 은사와 구별하여 제시함은 이 사역이 신유사역과는 구별됨을 말하는 것이다. 신유가 총체적인 인간존재의 영역에 관심을 두지만, 이 은사는 인류의 환경속에서 두나미스의 능력있는 드러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통하여 악한자의 세력을 이겨냄"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귀능력의 은혜로운 나타남이다. 그러나 범위를 더 넓혀서 보면 비정상적 행위의 넓은 영역을 포함할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자연기적을 표식으로 우리에게 주지만, 얼마나 그 범위가 넓은지 헤아릴 수 없다." 마이클 그린은 믿음, 신유,기적의 관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하였다:
이 은사(믿음)가 왜 신유와 기적(?혹은 능력)과 나란히 언급되는가는 명백하다. 위대한 치유자(예수님)께서 친히 활동할 것이라는 믿음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는 없다. 믿음의 깊은 행사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할 수는 없다. 산을 옮기는 믿음은 성령의 은사인데,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행위와 직결되어 있다.
(6) 예언(prophecy)
바울은 예언을 모든 은사들 가운데 선호한다(고전14:.그래서 사도다음에 직접 선지자(예언자)를 반복하여 언급한다. 그리고 전도자 교사 목사들은 선지자(예언자)뒤에 위치시킨다."교회의 가장 중요한 카리스마(타)다"고 주장했다. 예언은 성경과 같은 권위는 없고 다만 성령께서 주어진 상황에 맞게 주시는 어떤 계시를 알리는 것이다(고전14:29-30). 따라서 예언자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메신저인 것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강화와 위로 격려의 메시지를 주며 말씀을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14:3,24,30). 이것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통찰력과 진리와 그 결과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위대한 능력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었다(살전5:19-22;롬12:6). 고전14장에서도 예언은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방언보다는 더 덕을 세우며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하는 은사가 예언이기 때문이며, 고린도전서12-14장에서는 상세하게 예언을 논의한 것은 프리드리히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더군다나 예언이 갖는 신앙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대화의 가능성 때문에 로마서에서는 첫 번째로 이 은사를 거론한다. 예언의 은사가 갖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고전14:3)이기 때문에 로마서 1:11에서도 이 카리스마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언의 목적은 전파하는 것 그리고 자발적 언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소통되는 계시의 기능을 말한다. 자발성의 요소는 적어도 고린도교회공동체에서 카리스마의 확산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영감아래에서 알 수 있고 알려지는 대화라고 생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 은사를 받은 자가 “하나님이 그에게 말하도록 준 것을 넘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그것을 "믿음의 분량대로”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예언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의 중요성에 대하여 힐(David Hill)은 “그 때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예언의 은사를 시행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으로 감동된 그의 말을 의식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생각하건데 그가 하나님께서 그들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고 확신하고 있는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에 대한 질서는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수 있었다(14:29-33)는 데서 드러난다. 고린도전서14장의 바울의 예언의 논의를 통해서 두드러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언은 언급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여타 은사의 도움 없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언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갖는다(14:1-6).
둘째, 예언의 목적은 삼중적이다. 먼저 그것은 전체로서 신앙공동체를 세워간다. 다음은 비방언 신자를 세워감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죄를 깨닫고 결국 하나님을 경배할 비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장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14:3-25).
셋째, 예언은 이성적으로 선지자가 말하는 것을 통제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주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방언이 그러한 것처럼 공동체의 모임에서 질서에 복종한다(14:26-33,37-40).
(7) 영분별(Discernment of Spirits)
이 은사는 일반적으로 성령과 악령 인간의 영을 분별하는 은사이다. 던은 영분별의 은사를 영감된 언어의 평가로 번역하고 그것을 예언의 선행적 언어에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데살로니가전서 5:20-21은 모든 것을 시험하고 평가할 필요성을 언급했고, 이것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권고 직후에 나온다. 따라서 던이 말한 선행적 언어라는 것은 어떻게 받은 은사를 가지고 소위 사역을 한다고 하고 자기의 은사를 주장하는 자들을 평가할 것이냐 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은사다. 나타난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인가 마귀로 부터인가 아니면 단순히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인가를 분별하지 아니하면 이 은사로 인해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만이 아니라 다른 은사를 분별하기 위해서도 이 은사를 필수적이다. 고든 피는 본문의 영분별이 요한일서4:1에 따른 성령과 악령들의 분별도 포함하지만 고린도전서14:29에 따른 예언들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을 특별히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울은 예언의 교회적 기능을 말하는 두 본문인 고린도전서14:29과 데살로니가전서 5:20-21에서 예언을 시험내지 분별하도록 촉구하였다. 둘째로, 예언과 영분별 다음에 바로 방언과 방언의 통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영분별이 예언과 직결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 영들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은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예언자의 영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바울이 기도에 대해서도 성령안에서 내영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점에서 해결될 수 있다. 예언은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은사들을 분별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신자가 받은 은사가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던이 아래의 기준을 영감된 언어로 한정하지만, 시크프리드 샤츠만은 모든 은사에 적용할 수 있다고 확장시킨다.
첫째, 케리그마전통의 시험:그 은사가 예수를 높이는가?(고전2:3)
둘째, 인격의 시험:그 은사가 사랑을 나타내는가?(고전13:4-7)
셋째, 오이코도메의 시험:그 은사가 공동체(주님의 몸)를 세워가는가?(고전14)
그러나 필자는 위의 3가지 기준에 더하여서 은사를 받았다라고 주장하는 자가 진정 정결한 양심을 가지고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순수함에서 그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여러 정황을 근거로 매우 예민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8) 다양한 종류의 방언(Different kinds of tongues)
로버트슨과 플루머는 고린도교회는 훈련이 결핍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당파성에 이용하고(1:12),성찬을 술파티로 변질시키고 영적인 은사들을 모든 신자들의 유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기적 허영의 먹이로 바꾸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은사자들은 서로 기다리지 않고 서로 먼저 나서서 말하려고 했다(14:27). 각종 방언이라는 말은 이 은사가 나타나는 현상이 다양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의 방언은 이성과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점에서는 이교도들의 광증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보통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성령이 제공하시는 언어경험이라는 의미에서 몰아경의 언어라 했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12-14장에서 준 가르침들을 보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고린도교인들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주의 당파가 자신들이 사용하는 방언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탁월한 은사로 간주하여 이 은사야 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최고의 표식으로 과신한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이 은사는 사랑의 결핍으로 다른 지체를 비판하고 멸시하며 때로는 자기를 높이는 수단으로 오용된 것 같다. 이것은 카리스마의 다양성이 무시되고 마치 이것만이 최고의 은사인 것으로 곡해된 것이다. 그 결과는 공동체의 연합이 허물어지고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면 바울은 방언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방언이 인간적이든 천사적이든 간에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일차적인 증표, 어떤 사람이 진실로 영적이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증거는 방언이 아니고 사랑이다.
(9) 방언의 통역(interpretation of tongues)
바울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은사는 예언이다(14:1). 그리고 그 다음이 방언 통역(14:5), 그 다음이 12:8-10에서 언급한 지적인 은사들이다. 그 만큼 바울은 방언의 통역을 은사중에서 귀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언과 방언의 통역간의 중요한 방향적 차이는 주장되어야 한다. 방언의 통역은 하나님께 전달되는 방언을 알 수 있는 의사전달인 반면, 예언은 궁핍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문제는 이 은사의 진위여부를 어떻게 판별하느냐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방언통역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방언을 통역의 내용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니 말이다. 그럴 때에 누군가는 틀리거나 전체가 틀리거나를 식별해주는 은사가 필요한데 여기에서 영분별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 이 은사는 예언처럼 다른 예언자에 의해서 식별해야 하는 것처럼 방언의 통역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교회가 이러한 장치를 할 수 있는 목회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신학교육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체계적이고 섬세하게 다룰 교육시스템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5-3. 고린도전서 12:28의 은사
장황한 몸의 유비(12-27)를 따라서 즉시 그 원칙을 논리적으로 적용시켜 가면서 바울은 일련의 여덟 가지 은사들-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이미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 살펴보자.
(1) 사도(Apostles)
바울 자신이 스스로를 가리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점을 강조하여 로마서와 고린도전서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의 각각의1:1에서는 자신을 사도로 칭한다.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강력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한다. 신약에서 사도란 말이 결코 보냄의 행위나 은유적으로 보냄의 목적을 말하지 않는다. 보냄을 받은 사람,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보내진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는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야 한다. 그런데 바울이 결코 자신의 사도직을 카리스마로 묘사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가 카리스마적 사역의 틀로부터 자신의 사도직을 카리스마적 틀로부터 제외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다만 이 문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사도의 은사는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다 그 은사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사도, 선지자, 그리고 교사를 은사의 우선순위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없지 않다고 볼 수 있을지라도 문맥상 아무것도 이러한 가정을 입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은사들이 탁월성의 순서가 아니라 한 성령안에서 주어진 은사로서 교회의 유익성의 순서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2) 다른 지체를 돕는 것(Those who able to help others)
용어 안틸렘프세이스(ἀντιλήμψεις)는 신약에서 여기만 나타나며 “유익한 행위”(helpful deeds)로 가장 잘 번역될 수 있다. 사람에게 보다는 행동 또는 그 행위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아마도 로마서12:6-8에서 언급한 마지막 세 가지와 동일한 유형의 카리스마적으로 부여된 기능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 은사는 집사들의 사역의 그림자가 될지 모른다. 초대교회에서 집사의 주요사역은 신앙공동체의 궁핍한 자들을 돕는 사역이었다.
(3) 다스림의 은사를 가진 이들(Those with gifts of adminstration)
통속헬라어에서는 드물게 나타나고 이 용어는 신약의 여기에서만 발견된다. 퀴베르네세이스(κυβερνήσεις)곧 다스리는 것은 그 단서가 키잡이 또는 조타수를 의미하는 헬라어 퀴베르네테스에서 취한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은사는 지시나 리더십을 가져다주는 기능을 수반했으며, 로마서12:8 프로이스타메노스(προϊστάμενος)와 유사할 수 있다. 바렛의 주장에 따르면, 마지막 두 기능은 집사와 장로이후 사역의 전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체문맥을 보면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5-3. 로마서 12:6-8의 은사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1-11)에서 주로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12장부터는 삶의 문제곧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그의 초첨을 교육에서 권면으로, 직설법에서 명령법으로 바꾼다. 복음의 직설법을 보다 강조하는 측면으로부터 복음의 명령법을 보다 강조하는 측면으로의 이행이다. 변화된 삶을 살라는 명령은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뒤에 선택할 수 있는 제2단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첫 응답자체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 윤리적이고 권면적인 구절들로 가득 채우는데 이것이 몸의 비유 문맥에서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몸안에 있는 다양성이라는 유비를 사용해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교회공동체를 섬기기 위해서는 각 지체의 역할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12:2-5). 6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함으로 은사를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고 있다. 지체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심으로 각지체가 다양하게 기능하게 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권적으로 제한하신 영역에 부합하도록 그 안에서 자신에게 맡기신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몸의 모든 기능들이 연합하여 몸을 세워가듯이 공동체 안에서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은사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어투는 로마서에서 보다는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닐카(Joachim Gnilka)의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기 때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로마교회에 편지를 기록할 때에 고린도상황을 투영시키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수용한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와는 다르게 로마교회상황을 잘 모르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비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비록 바울이 로마교회를 가지 못했을지라도 이미도 앞에서 언급한대로 로마교회 상황에 대한 매우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와는 분명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공동체 안에 나타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문맥에서 은사가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일곱 가지 은사들의 목록(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권고, 구제, 긍휼을 베품)을 말하면서 교회의 생명과 사역의 일부로 이해했던 카리스마적 기능들의 일부로 이해했던 카리스마적 기능들의 광범위한 기초를 기술한다.
(1) 예언(the gift of prophecy)
이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을 포함하는 여러종류의 은사들에 대하여 여기서는 일반적인 면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14:3에서 “권면”이 예언적 은사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은사가 좁은 면에서는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행13:1-3)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12-14장에서 바울의 상세한 예언의 논의는 예언의 은사가 교회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14:1,5은 예언의 은사의 가치가 가장 높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에서처럼 여기 로마서에서도 목록의 순서에서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은사를 거론하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고전14:3)이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1:11에서도 이 카리스마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4:11에서는 두 번째로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로마서에서 발견되지 않은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나온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은사를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이 은사는 공공집회에서 성령의 감동에 이끌려 선포하는 말로(고전12:10,28;14:1,3-6,24,39). 교회공동체에게는 격려와 위로 또는 권고로써 덕을 세우기 위해 중시된 것으로 보인다. 또 불신자에게는 마음속의 비밀을 드러내어 책망과 심판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고전14:24-25). 신약에서 예언은 장래 일어날 일을 포함할 수 있지만,(행11:28;21:10-12) 이것이 본질은 아니다. 그 보다 신약의 예언은 보다 폭넓게, 하나님이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선지자에게 알려주신 정보를 공동체에 공포하는 것을 포함했다(특히 고전14:3,24-25,30을 보라). 바울이 예언을 말하면서 믿음의 분수대로를 덧붙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하라고 주신 것은 모두 교회에 전하되 하나님이 말하라고 주신 것 이상은 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다. 3절에서 이미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한다. 여기서 지혜롭게는 “절제하여(self-controlled: sober)"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래서 절제의 자세를 갖는 것이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자에게 중요했다. 더 나아가 선지자의 연설은 다른 선지자들의 분별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고전14:29-32) 이 은사의 사용은 매우 신중해야 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섬김(the gift of service)
어근 디아크(diak-)에서 나온 단어들은 원래 식사 시중드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쓰여졌으며, 이 의미가 신약시대에도 보존되었다. 신약시대에 이 단어는 주로 종교적이거나 제식의무로 쓰였는데 타인에 대한 개인적인 봉사를 가리키며, 70인력에서는 성전예배를 위해서, 기독교에서는 교회예배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헬라아 디아코니아(diakonia)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 영어의 해당어인 서비스처럼 광범위하게 사용된다(고전12:3참조). 바울이 여기에서 쓰는 이 단어의 의미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섬김,, 그리스도의 사역, 사도적 사역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특별모금사역, 그리고 교회에서의 특별한 직분 또는 역할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예언자들 가르치는 자들, 권위자(exhorter)들도 섬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만이 아닌 다양한 섬김을 이미 앞에서 언급했는데 다만 이 섬김은 주어진 임무라면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하고 있다.
(3) 가르치는 자(the one who teaches)
앞의 두 은사는 추상명사를 쓰다가 뒤에 나오는 4개의 은사를 말할 때에는 왜 사람에 대한 지칭으로 바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언과 가르치는 일도 다 같이 교회를 권면하는데 의미가 있는 은사지만, 둘은 뚜렷하게 구분된다. 예언은 계시를 근거로 하여 선지자가 하나님이 “그의 입에 두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반면에 가르치는 일은 교회에 보존된 대로의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지슬러(ziesler)는 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영감을 주장하지 않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전통들을 전달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관해서 알려진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교리문답 자료안에 있는 전통을 전달하고 설명해 준다고 하지만 던은 가르침자체를 은사활동으로 인정한다. 이것은 성실하고 겸손한 가르침으로 그 은사를 써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4) 권위하는 자(the person who exhorts)
이 단어(παρακλήσει)는 우리말로 보혜사로 번역된 성령의 다른 이름으로 원어의 의미가 '누구를 곁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위로와 격려, 권면을 의미함으로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위로하는 자 또는 격려 권면하는 자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 다음에 나오는 만큼, 이 단어는 필시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살라고 촉구하는 활동을 가리킬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대체로 가르침의 일과 병행하여 실천된 것으로 알려졌다(딤전4:13). 이 은사를 수행하는 자는 그 은사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5) 구제하는 자(the person who ---)
여기서 말하는 구제는 헬라어 메타디두스(μεταδιδοὺς)로 선한 동기에서 자신의 사적 소유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보다 넓은 개념으로 공공자금 마련을 위한 기부 및 희사의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그 배품의 내용으로는 음식이나 의복 또는 돈 등을 떠 울릴 수가 있다. 성실함으로는 가장 좋은 번역은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게 진심으로 또는 온 마음으로가 가장 자연스럽다.
(6) 다스리는 자( the person who----)
다스리다, 인도하다, 감독하다, 지휘하다, 관리하다와 같은 결과적인 의미들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 이 기본적인 의미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12에서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도 같은 맥락에서 지칭되는 말이다. 문자적으로는 ‘가운데 서는 자' 또는 ‘앞에서 인도하는 자', 즉 지도자를 뜻한다. 이는 공동체 전체의 관리의 책임을 맡아 감독하고 그 살림살이를 총괄하면서 복지행정을 관장하는 위치를 가리킨다.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전체를 두루 살피고 곳곳의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요청된다. 가족의 다른 지체를 아버지가 돌보는 양상은 디모데전서 3:4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바울은 공동체 내에서 무방비한 지체들(과부, 고아, 노예 이방인)을 돌보고 도와주는 것을 이 은사에 포함시켰다. 다스리는 사람, 또는 타인을 돌보는 사람은 완전한 헌신 자기포기 부지런함 또는 열정을 가지고 그 은사를 써야 한다. 이런면에서 다스리는 자에게 진지함과 부지런함이 최상의 덕목으로 거론되는 것이다.
(7)긍휼을 베푸는 자(the person who---- )
무(D. Moo)는 던(J. D. Dunn)의 글을 인용하여 바울이 긍휼을 베풀다라는 동사를 인간에 관해서 쓴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신약에서 긍휼이라는 단어가 아주 주요한 유대인의 경건한 자선 행위-가난한 자들에게 물자는 대주는 일-를 기술하는데 쓰인다는 점에 주목하여 여기에서 바울도 이 섬김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긍휼이라는 단어와 유대인의 자선을 연결 짓는 일은 무리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아서 이 섬김을 앞에서 언급한 소외된 자를 제외시킬 수 없는 노약자와 불구자들 돌보기 그리고 빈민의 구제등에 대한 일체의 긍휼 행위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긍휼은 긍휼의 행동을 제공하는 자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이것이 자발적인 동기에서 우러나는 일이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긍휼을 베푸는 은사에 즐거움 또는 흔쾌함을 그 선결조건으로 꼽고 있다. 이것은 궁핍한 자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사역으로 바울에게서 긍휼의 실제적인 표현은 인간의 곤궁에 대한 사회적 관심사의 애씀의 표시가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고 경험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구체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긍휼이 하나님께로부터 출발되어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받은자를 통하여 흘러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긍휼을 “가능케 하시는 은혜”로 이해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6. 두 서신에 나타난 은사목록의 특징분석
1 원어로 분석해 본 은사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12:6-8 예언(propheteia) 섬기는 일 (diakonia) 가르치는 자(ho didaskon) 권면하는 자(ho parakalon)구제하는 자 (ho metadidous) 다스리는 자(ho proistamenos) 긍휼을 베푸는 자(ho eleon)
고린도전서12:6-8
지혜의 말씀(logos sophias) 지식의 말씀(logos gnoseos) 믿음(pistis) 병고치는 은사(charismata iamaton) 능력행함(energemata dunameon) 예언함(propheteia) 영들 분별함 (diakriseis pneumaton)방언을 말함(gene glosson) 방언들 통역함(hermeneia glosson)
고린도전서12:28
사도(apostoloi) 선지자(prophetai) 교사(didaskaloi) 능력(dunameis) 병고치는 은사(charismata iamaton) 서로 돕는것(antilemphesis) 다스리는 것(kuberneseis)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gene glosson)
엡 4:11
사도(apostoloi) 선지자(prophetai) 복음전하는 자(euaggelistai) 목사와 교사(poimenai kai didaskaloi)
2. 은사목록의 특징
(1) 열거된 순서와 열거의 기준이 일정하지 않다.
로마서12:6-8에는 7개의 은사가 고린도전서12:6-8절은 9개의 은사가 고린도전서12:28절에는 8개의 은사가 나오고 에베소서 4:11에는 4개(혹은5개)의 은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은사가 고린도전서 12:6-8절과 에베소서4:11절은 일관된 기준에 의해서 은사가 열거되나 로마서12:6-8절과 고린도전서12:28절은 그렇지 않다. 로마서12:6-8절에서 예언과 섬기는 일은 사역면에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으나, 그 다음에 나오는 가르치는 자 권위하는 자, 구제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는 사역으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로 묶여진다. 고린도전서12:28절도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는 사역자로 묶여지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은사들은 사역으로 묶여진다.
(2) 열거된 은사는 공통된 은사가 있고 각각 따로 언급되는 은사가 있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공히 취급되는 은사는 예언인데 고린도전서에는 선지자로 나온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와 다스리는 것도 원어가 다르게(ho proistamenos/kuberne-
seis) 나타난다. 그리고 로마서에만 나오는 은사는 섬기는 일 구제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흉을 베푸는 자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6-8절과 12:28절에서는 서로간의 겹치는 은사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병고치는 은사와 능력을 행함, 방언을 말하는 것, 예언(선지자)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영분별, 방언의 통역과 사도의 은사는 겹치지 않는다.
(3)바울이 은사와 은사받은 자를 함께 열거하는 것은 은사를 직분과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동일한 한 성령은 열정과 질서의 영이라는 것이며, 사도나 예언자는 공식적인 직분이었다면, 권위하는 자나 긍휼을 베푸는 자는 그런 직분이 아니었다. 또 은사들이 서로 겹치는 것은 상호중첩의 요소들이 있어서 예리한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4)은사들 가운데서 신유나 능력등은 외연적으로 즉각 증명되는 은사들이지만, 권위하는 것이나 긍휼을 베푸는 것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즉각 증명되기 어려운 은사다. 기적적인 은사들이 전도에 도움을 준다면 교육과 같은 봉사지향적인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응집하여 세우는데 도움을 준다.
(5)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이 은사목록의 맨 뒤로 오게 된 것은 고린도교회의 영적 은사의 오용으로 인한 경고인 것 같다. 당시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은사목록의 맨 앞에두고 방언을 과도하게 행사했던 것 같다. 두 본문에서 취급하는 은사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6)성령의 나타나심은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목적이 있 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4-6에서 삼위일체적 공식 수단을 써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은사의 다양성(카리스마타) 그러나 한 성령
봉사의 다양성(디아코니아이) 그러나 한 주님
사역의 다양성(에네르게마타) 그러나 모든 사람가운데 그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한 하나님
이것은 은사의 통일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러나 다양하게 은사들(복수)이 나타남으로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 같아서 각각의 악기가 조화를 이루어서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매우 다양한 은사를 부여하시어 몸 전체에 기여하게 하심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7)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공히 성령의 은사를 논한 다음에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전서12장에 이어서 13장에서 아가페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에서도 12장에서 은사를 언급한 다음에 거짓이 없는 사랑의 교훈을 들려준다. 그리고는 악을 악으로 값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면서 원수에 대하여도 사랑의 길로 행하도록 가르쳐준다. 고린도전서13장에서 모든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은사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한다.
(8))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장소는 여러지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자아를 높이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개인을 세워주는 것도 은사의 목적으로 정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개별 자아의 세움은 공동체의 몸을 세우는데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따라서 자랑이나 멸시는 있을 수가 없으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만이 은사를 사용하는 자의 목적이어야 한다.
7. 나오는 말
고린도교회 로마교회는 바울의 서신에 의해서 그 교회의 당시 상황이 우리에게 알려진 교회다. 교회의 상황을 분석해본 결과 두 교회의 공통점은 이방땅에 세워진 교회로서 공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성원인데 두 교회가 다 내부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고린도교회는 분파의 문제가 드러났고 로마교회는 구성원간의 갈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교회의 경우는 그러한 교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은사를 거론한다는 것이고 고린도교회는 직접 은사문제로 인한 갈등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잇다는 것이다. 그 두 교회에 주는 공통적인 대답은 몸의 비유를 써서 은사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사의 언급이 교회의 몸을 세우라는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다양한 배경으로 시작된다. 크게는 이방인의 배경에서와 유대교의 배경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아 과부 노예출신, 가난한자 약한 신자 강한 신자등의 다양한 구성원간의 계층이 있다. 그들 모두는 예수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서로 간에 형제의 사랑으로 용납하고 섬기며 귀히 여겨야만 공동체가 든든히 선다. 바울은 은사를 통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이루고 교회공동체를 굳게 세우고 하나되게 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약 그러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면 그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은사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가 공히 내부에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은사를 통해서 해당교회를 세우라는 교훈이 있다. 이런 면에서 은사를 주신분의 목적은 신자자신을 유익하게 하려하시고 교회의 몸을 세우려 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것을 잊고 마치 은사가 자신만의 특권인양 비교하고 무시하고 교만하여서 편가르기를 하는 순간부터 이미 은사를 주신 분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신 분께 대한 감사와 함께 겸손과 섬김으로 은사를 통해서 교회의 몸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1세기에 다룬 두 교회에 대한 은사문제를 오늘의 교회에 대입하면 겸손과 사랑으로 은사받은자가 교회를 세우느냐 허무느냐를 통해서 은사자의 분별을 하게되는 것이고 이 원리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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