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성령과 악령

이신건 - 제13강: 성령은 누구입니까?

은바리라이프 2012. 6. 19. 19:23

이신건 지음 


[예영 커뮤니케이션, 1998년] 

제13강: 성령은 누구입니까? 


다른 종교와 달리,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기원을 같이 하는 다른 종교와도 달리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4장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즉 한 분의 하나님은 아버지요, 아들이요 또한 성령으로 불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 주체로서 하나의 공동체, 사귐을 이루시는 신비한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세 주체로 나누다 보니, 종종 엉뚱한 오해와 착각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남자나 여자이기라도 하듯이, 그분을 성(性)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남자나 여자는 아니지만 중성적인 물체도 아니고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남성이나 여성의 이메지(Image)나 상징(象徵)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마치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남성적인 두 주체와 성령이라는 여성적인 한 주체로 구성되어 있기나 하는 것처럼 은연 중에 착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남녀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어떻게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더욱이 성령조차도 여성적인 이메지로 생각하기를 꺼리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조차 온통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즉 성령은 완전히 독자적이고 별난 주체이고,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완전히 독특하고 별난 존재라고 멸시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성령과 무관하거나 성령보다 더 높은 분인 것처럼 착각하며, 그래서 성령과 성령운동가들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물론 성령과 성령운동가들이 이처럼 무시당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론을 올바르게 확립하기 위해 너무 오래 동안 이단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리다 보니, 성령에 대해 미처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리스도의 역할을 너무 높이려다 보니, 상대적으로 성령의 역할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운동가들이 자주 균형과 절제를 잃고 무분별해지거나 과격해지다 보니, 이들을 견제하거나 억누르는 동안에 교회가 제도적으로 너무 경직화되고, 신학도 너무 그리스도론에 치우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날에 이르러 신학과 교회 안팎에서 많은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성령을 너무 망각하고 무시한 것은 하나님과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의 성령경험을 너무 백안시했으며, 그래서 신앙이 무기력증과 형식주의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성령론을 올바르게 복권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성령은 과연 누구입니까? 



1.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원래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한, 하나님과 무관한 어떤 마술적인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한복음 4:24). 교회 안에서 성령의 온갖 은사들을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은 세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면서도 세상 가운데서 권능을 발하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신적인 실재였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만물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을 '바람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영(靈)'이라는 단어는 바로 바람과 호흡은 뜻하는 '루아흐’에서 파생했습니다. 루아흐는 출처와 방향을 알 수 없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힘, 혹은 호흡 속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힘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설명할 때, 성령을 바람과 같은 실재에 비유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8).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말이 무슨 뜻을 갖는지를 바람에 비유해서 설명해 봅시다. 



1) 앞에서 예수가 말한 대로, 영은 바람과 같이 임의로 부는 실재입니다. 바람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자유(自由), 파악불가능성(把握不可能性), 불가시성(不可視性), 초월성(超越性)을 의미합니다. 그 분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면서도 만물을 너무나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조종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하시는 일은 거룩하면서도 기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까?(출애굽기 15:11). 



2) 자유롭고 보이지 않는 바람도 사물을 움직입니다. “바람도 안 부는데 살랑살랑”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바람이 불지 않고 움직이는 무생물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물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움직이는데, 그 이유도 사실은 생물의 중심(본능과 마음)에서 나오는 바람(바람기?) 탓일 것입니다. 여하튼 안에서 나오든 밖에서 나오든, 바람은 뭔가를 움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은밀하게 만물을 움직이는 영이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역동성(力動性)을 의미합니다. 특히 태풍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도 때로는 굉장한 에너지(活力)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이 엄청난 창조적 에너지를 쏟아놓으셨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을 생성시킬 뿐만이 아니라 메마르고 죽은 것들도 소생시키는 힘입니다. 즉 영은 죽은 자들까지도 일으켜 세웁니다. 죽은 예수를 살리고 이미 죽거나 언젠가 죽을 인간을 다시 살릴 힘도 바로 성령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죽어가는 피조물은 오늘도 “창조자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말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인격성(人格性), 관계성(關係性), 개방성(開放性)에 있습니다. 물체는 공간과 시간에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특정한 상황에 매여 있습니다. 이런 물체는 쉽사리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기 어렵고, 그래서 대개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어디나 갈 수 있고, 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넘어서서 모든 것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으실 수 있고, 그것들에게 자신을 개방하실 수 있으며, 그것들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얼굴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은 인간에게로 얼굴을 돌리는 영, 인간을 깨우며 활동케 하는 영, 인간에게 힘을 주고 위로하는 영,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기도와 영감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이러한 영 속에서 하나님도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 보이시고 알리시며 나누십니다. 



2.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일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도 역시 하나님과 무관한 또 하나의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빛에서 나온 빛)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역시 영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다”(고린도후서 3:17)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령 가운데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은 바로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며,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향해 가던 길에 바로 이 ‘영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처음부터 바로 성령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으며,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시험받았으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있게 전파했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창조의 기적을 행했으며, 성령 안에서 ‘아바’ 하나님과 기도했으며, 성령 안에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높이 들림받은 예수는 이제 성령을 보내며, 성령 가운데서 만물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은 온통 성령에 의해 침투되어 있고, 성령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은 '또 한 분의 하나님'입니다 



성령은 비단 하나님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일 뿐만 아니라 또 한 분의 신적인 존재, 주체 혹은 위격(位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 에너지로 생각하기는 쉬워도, 한 분의 신적인 주체로 생각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위격성(位格性)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령을 하나님과 아들 간의 사랑을 이어주는 ‘사랑의 끈’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삼위(三位) 하나님보다는 이위(二位) 하나님을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4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온전히 세 주체로 존재하시면서도 신비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도 또 한 분의 하나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해야만, 삼위일체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은 성령을 ‘그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분’이라고 인격적인 용어로 부릅니다. 요한이 증거하는 성령은 주체적인 분으로서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진리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고 증거합니다(요한복음 14-15장). 그렇지만 요한만이 아니라 다른 증인들도 성령의 주체적인 활동을 증언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하고 가르치며, 우리를 감동시키고 깨닫게 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을 속이고 훼방할 수 있으며, 욕되게 하고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서는 성령의 독자적인 속성과 활동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며, “창조자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진리의 영이여,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위로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