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총독들-<예수 이야기>중에서

은바리라이프 2012. 3. 23. 19:30

A.D. 6년 아켈라오가 파면당했을 때 시리아의 사절은 술피시우스 구레뇨(P. Sulpicius Quirinius)였다. 

구레뇨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정리하고 로마 제국의 국고로 납부해야 할 조공 액수를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해야 했다(누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했는데 호적등록은 A.D. 6년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 재임시에 예수가 출생했다는 정설과는 10년 이상의 시차가 있다). 
그 무렵 갈릴리 사람 유다가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폭동이 진압되고 인구조사가 끝나자 코포니우스(Coponius)가 유대의 첫 총독으로 취임했다.


코포니우스가 재임하던 어느 유월절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정이 지나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잠입하여 사람들의 뼈를 흩뜨려 성스러운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 일어났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언자 에스겔이 본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를 풍자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코포니우스는 성전의 안전을 강화했다. 


9년경 코포니우스의 후임으로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총독에 취임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4년 8월 19일 사망하기까지 영지의 통치자들을 자주 바꾸는 정책을 썼다. 
그와 달리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들을 관직에 오래 머물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티베리우스에 의해 15년경 유대의 총독에 임명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는 11년간 재임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라투스는 대제사장을 네 차례나 바꾸었는데 부를 축적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방법이었다. 
그라투스가 임명한 마지막 대제사장은 안나스(Annas)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Joseph Caiaphas)였다. 
가야바는 예수를 체포하고 빌라도로 하여금 정치범으로 사형에 처하게 한 교활한 사람이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그라투스의 뒤를 이어 총독에 부임한 것은 26년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oho)에 의하면 빌라도는 “천성이 고집불통이며 고집과 잔인이 혼합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부임 초기에 밤을 이용하여 로마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전을 짓밟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전임자들 중에는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없었다. 
날이 새자 분노한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저택을 에워쌌고 가이사랴까지 따라가서 초상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초상들을 치우지 않았다가는 전국적으로 소요가 번질 것을 알게 된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빌라도와 예루살렘 지도자들 사이에 또 한 차례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의 급수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수로를 건설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남부 고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물을 운반해오는 수로의 건설은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베푼 호의였다. 
성전은 수로를 필요로 했다. 
성전에서 동물들을 도살하여 제사를 지낸 후 그 지역을 청소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수로건설에 드는 비용을 성전의 보고에서 지불토록 했다. 
성전 관리자들은 하나님께 바친 돈을 세속적인 사업에 사용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맞섰지만 빌라도는 강제로 돈을 빼앗았다. 
국내외에 거주하는 성년 유대인들이 희생 제사를 위해 매년 의무적으로 반 세겔(Shekel)을 헌납해온 금고를 턴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처사가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며 시위를 벌였지만 빌라도는 무력을 사용하여 시위대를 강제해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