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스크랩] [신약 배경사] 제 3 장 로마 총독 지배 하의 유대

은바리라이프 2012. 3. 23. 19:11

 

 

[신약 배경사]

제 3 장 로마 총독 지배 하의 유대

 

 

앞장에서 헤롯 왕가 이야기를 간단히 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로마에 아첨하여 유대인을 통치하던 고용제 임금 (client-king)이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로마는 골치 아프게 여겼던 유대민족을 통치하는데 이들을 이용하면서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답니다. 그래서 직접 로마의 정치적 입김을 불어넣을 관리를 파견했고, 이들을 '총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로마의 '총독'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유대 로마 총독들

 

혹시 로마의 총독이 왜 유대 땅에 파견되게 되었는지 기억납니까? 그렇습니다. 헤롯의 뒤를 이어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세 분봉왕 중 하나인 아켈라오가 학정을 펴 로마에 의해 퇴위됨으로 총독이 관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유대 땅이 로마 영지의 지휘로 격하되어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총독에 의해 통치 받게 되어 자치권이 더 제한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켈라오가 파면될 당시 시리아 사절은 술피우스 구레뇨(P. Sulpicius Quirinius)였는데, 그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속국의 조공 액수를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단행합니다. (비교. 눅 2:2.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유대는 이 인구조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외세의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를 굴욕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정서였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젤롯당(zealot='열심당', 영어의 zealous도 같은 희랍어 어근에서 나옴) 운동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폭동이 진압되고 인구조사가 끝난 후 처음으로 취임한 유대 총독이 '코포니우스'입니다. 그는 아켈라오가 가지고 있던 권한은 물론이고, 대제사장의 법의도 지킴으로 대제사장들을 로마당국의 통치아래 두게 되었습니다. 소요가 있기 쉬웠던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말썽이 일어나기 쉬우니까 병력을 증강해서 감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과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총독이 원래 거주하고 있던 가이사랴 사령부를 떠나 예루살렘에 체류하여도 묵인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실 당시에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포니우스는 주후 9년 마르쿠스 암비비우스로 교체되었고, 3년 후 아구스도(주전 27-주후 14 로마제국 통치. 아우구스투스)가 죽었을 때는 안니우스 루푸스로 바뀌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황제가 디베료(주후 14-37. 티베리우스)인데, 그는 총독을 자주 바꿨던 전임 황제와는 달리 오랜 기간 내버려 두는 정책을 썼습니다.

 

기존의 총독이 수탈하고 있는 것을 묵인함으로써, 새로운 총독이 더욱 수탈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니 그 수탈이 얼마나 심한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주후 15년경 임명된 총독은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였습니다. 그는 4명의 대제사장을 갈아치우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임명했던 대제사장이 안나스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당시의 대제사장(요 18:13)입니다. 신약 시대 대제사장은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돕는다는 본연의 기능은 거의 잃어 버렸고 본인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고 권력을 따라 움직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세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행사하던 대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던 당시 메시아운동의 지도자 예수님을 그냥 나둘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예수님을 자칭 메시아라는 죄명을 붙여, 황제를 모독하였고,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곧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였습니다. 사형권은 당시 로마총독에게만 있었음으로, 빌라도가 사형선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총독과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곧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죽이는 일에 서로 결탁한 것입니다. 당시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총독 빌라도

 

빌라도가 그라투스를 이어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주후 26년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못박은 장본인입니다. 요세푸스 등 당시 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고집스럽고 잔인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금기시된 황제 초상 군기를 들여옴으로써 유대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 디베료 황제를 기념하는 금방패를 설치하여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빌라도는 수로 공사 경비를 성전세로 담당하도록 지시한 후 유대인들이 반대하자 남자가 해마다 내는 반세겔 헌납기금을 착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반대시위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그가 행한 잔인한 행동이 눅 13:1에 암시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빌라도는 그리심산 언덕 위 사마리아의 순례자 무리를 공격하는 등 극도로 잔혹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시리아 총독(주후 35-39)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항의했고, 빌라도는 주후 36년 로마로 송환되었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신 직후에 그는 쫓겨난 것입니다.

 

디베료 황제가 죽은 후(주후 37) 새 총독 마룰루스가 임명되어 가이오 통치 기간 중 로마총독 지배는 계속되었으나 헤롯 아그리빠 (주후 44년 사망) 생존시 유대는 로마에 의해 직접 통치 받지 않고 유대 왕들에 의해 관리되게 되었습니다.

 

브루스(F. F. Bruce)는 신약의 배경이 되는 1세기 예루살렘 인구를 요아킴 예레미아스를 좇아, 25,000내지 30,000명 정도, 그리고 축제 시에 3배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산해요.

 

이 시대 팔레스틴 인구 전부를 합치면 50이나 60만 정도였다고 부루스는 짐작하는데 이는 요세퍼스나 그랜트라는 사람이 추정한 것보다는 훨씬 적습니다. 브루스는 자신의 추정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속국으로 유대는 조공을 바쳐야 했고, 신정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종교적 부담금도 내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30-40%의 높은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백성들의 분노는 로마는 물론 자국의 부자들에까지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피폐한 삶을 살고 있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주후 66-70년의 유대-로마 전쟁입니다. 결국 70년 예루살렘성은 로마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유대와 로마와의 관계입니다. 로마는 앞서 언급한 셀류키드 왕조처럼 혹독하게 팔레스틴을 다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동안 느낀 설움과 좌절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배경인물입니다. 그에 대한 로마제국의 역사가의 관점에서는 여러 총독 중 하나인 빌라도 재임시 유대백성 사이에서 예수라는 사람의 죽음은 별로 중요치 않게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제국의 한 지방관리 총독에 의해 처형된 예수가 2세기 정도가 흐른 뒤 로마 전체를 정복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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