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시리아-팔레스틴 역사 - 박종수 -

은바리라이프 2012. 2. 21. 18:54

시리아-팔레스틴 역사

 


-  박종수  -

 



1. 개관

 


 팔레스틴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펠레쉐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블레셋의 해안지역"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유래한 그리스어 팔라이스티네(Palaistine)는 이집트 북동쪽의 작은 연안지역을 가리킨다.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인 사이에서 이전 유대지역을 포함한 시리아 남쪽 1/3 지역에 대해 팔레스틴으로 불려졌다. 팔레스틴의 경계는 역사적 과정을 지나면서 심한 변동을 거듭해왔으나, 일반적으로 서쪽의 지중해 및 연안 평원에서 중간지대인 셰팔라(Shephalah)를 거쳐 고대 히브리왕국의 심장부인 유대와 사마리아 산악지대에 이르는 영토를 포함한다. 오늘날 말하는 시리아-팔레스틴은 지금의 지중해 동부연안에 있는 팔레스틴과 그 북쪽의 시리아의 영토 일부를 포함한다(Lasor, 632-648).
 성서에서 자주 거론되는 가나안 지역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레바논 해협과, 우가릿(라스샤므라), 남부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과 팔레스틴 모두를 포함한다(참조. Ward, 400). "가나안 계열"이라는 용어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해된다.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나안 지역은 단일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공통의 언어와 문화를 지닌 도시국가들-예를 들면 비블로스, 시돈, 두로, 세겜, 예루살렘 등-로 구성되어 있었다(Coogan, 9-10).

2
 팔레스틴에서는 초기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서 살아왔다.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팔레스틴은 세계적 강대국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했다. 이곳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제국과 그 후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다. 팔레스틴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조에 통일왕국을 세움으로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솔로몬 사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으며(기원전 721년), 남왕국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기원전 586년) 자국의 주권을 소유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통치를 받아왔다.
 

팔레스틴의 역사를 재건하는 것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재건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첫 번째 요인으로 지역의 역사를 증거하는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아직 충분하게 발굴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이 지역에 산재해 있던 나라들이 대개 도시국가 형태로서 완전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주변 강대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아이(Ai), 아랏(Arad), 벳산(Beth Shan), 므깃도(Megiddo) 등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기원전 3,000-2,000년대에 팔레스틴에도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왕조시대와 유사한 번영된 모습으로 잘 갖추어진 도시유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도시들은 자체 방위벽을 갖추고 이집트와 무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웃 나라들과의 교역이나 행정과 관련된 문헌들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Knapp, 124).

 북부 시리아에서 발견된 유적들 역시 발전된 도시생활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종 발견되는 시리아 유적들은 기원전 3,000-2,000년대에 이 지역에 유목민 혹은 반유목민들이 계절에 따라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동시에 알려주고 있다. 이들은 적어도 도시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고 팔레스틴의 도시유적과 비교해 볼 때, 기원전 3,000-2,000년대의 시리아 문화나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풍부한 고고학적 유물들은 이 지역에 상당히 발전된 도시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에블라
 한 이탈리아 고고학자가 발견한 고대 에블라(Ebla; 시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현대의 Tell Mardikh) 유적은 기원전 3,000-2,000년대의 시리아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에블라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수메르어 계통의 에블라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Briggs, 264). 그 가운데 80% 이상은 대부분 경제적인 내용과 행정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 나머지들은 역사, 법, 문학, 사전 따위의 문헌들이다. 1974년 이후 최근에 발견된 자료들은 아직도 대부분 번역과정에 있으므로 추후 밝혀질 내용도 많이 있다(Knapp, 125). 에블라 문헌에는 이집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병장식(vases)에 새겨진 것 가운데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케프렌(Cephren)과 페피 1세에 대한 내용이 왕궁 터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직까지 예언현상을 비롯한 에블라의 종교행위를 보여줄 만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Briggs, 264-265).

 에블라의 유적들은 대략 40년 동안의 역사기록을 담고 있다. 왕들은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과 권력을 나누어 에블라 도시들을 통치했다. 군주는 주로 내정에 치중했으며, 다른 왕족들은 외교를 맡아보았다. 도시의 장로들은 상당한 수준의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략 140에이커에 이르는 에블라 안에 약 260,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정부가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 중심부(acropolis)이며, 다른 지역은 주변지역으로서 지방정부가 도시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에블라는 당시 시리아의 경제중심지였다. 시리아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도시였던 에블라는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군사적 시위를 감행했다. 에블라의 무역품목으로 밀, 보리, 포도, 가축, 농산물뿐만 아니라 직물과 청동제품도 끼어 있었다. 이점에서 볼 때 에블라는 당시 금속기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에블라의 경제활동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에블라와 어떤 도시간에 체결된 계약문서가 발견되었으며, 당시 유명한 도시였던 마리(Mari)를 공략했던 점을 들 수 있다. 마리는 에블라에게 금과 은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Knapp, 126-127). 에블라는 아카드의 사르곤 왕의 손자였던 나람신(Naramsin; 2230-2100 B.C.)에 의해 결국 멸망당했다. 이후 에블라의 경제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에블라에 대한 문헌자료의 부재는 당시 시리아 역사를 재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Knapp, 128).

 기원전 21세기 동안의 에블라는 우르 제 3 제국과 경제적으로 독립된 상태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 에블라는 두 번째로 멸망하게 된다. 학자들은 우르 3제국을 멸망시켰던 아모리인(Amorites)들에 의해 에블라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모리인 역시 에블라와 아카드인들 처럼 셈어(Semitic language)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생활방식은 차이가 있었다. 에블라 사람들과는 달리 아모리인들은 주로 반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원전 19세기 후반에 기록된 마리문서(Mari texts)에 의하면 아모리인들은 관개시설이 비교적 용이한 상태에서 농토를 확보했다. 동시에 그들은 도시 상인들과 행정가들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반유목적인 목가생활과 도시생활을 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Knapp, 130-131).

 에블라에서 발견된 문헌들은 기원전 2200년 이후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에블라와 시리아의 다른 지역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도시중심의 생활이 아모리인의 침입으로 인해 반유목생활로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고고학자들간에 아직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당시 아모리인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반유목생활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도시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9세기 말엽에 아모리인들은 시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북서부 메소포타미아까지 지배세력을 확장했다. 비록 아모리인들이 정치적으로는 넓은 지역을 통치했지만 반유목생활에서 도시의 호화로운 생활에로의 전이과정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Knapp, 132).





에블라 시의 서쪽 도시 위쪽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Knapp, 126)





3. 우가릿

 에블라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장소는 우가릿(Ugarit)이다. 오늘날 라스샤므라(Ras Shamra)로 알려진 우가릿은 기원전 14세기에 가나안의 주요 도시였다. 기원전 1200년경 바다민족의 침략으로 멸망당한  우가릿은 1928년 시리아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시리아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우가릿은 기원전 2,000-1,000년대에 가나안의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다민족, 다언어로 구성된 복합문화를 형성했던 우가릿에는 그리스의 미케네인(Mycenaeans) 외에도 히타이트, 바빌론, 허리안족(Hurrians), 이집트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Coogan, 9).
 우가릿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거주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 시대의 시리아-팔레스틴은 농업을 기초로 정착생활(sedentary life)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기원전 6,000년경에 농업의 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도구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이전과는 달리 광물질이 함유된 도기가 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우가릿이 가장 발달했던 시기이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구가 증가하여 군집을 이루었다. 신석기(Neolithic)시대에서 동석기(Chalcolithic) 시대에 이르는 동안 우가릿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동양의 새로운 영향력이 증대됨으로써 우가릿 사회는 급격한 변화와 함께 "할라프"(Halaf)라고 부르는 문명시대에 접어든다. 이 때 채색된 우가릿 도기들이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와 시리아로 퍼져 나갔다(5,250-4,300 B.C.). 이후 우가릿은 이전보다는 덜 번영된 체제였으나 메소포타미아의 수준을 유지했다. 이 시기가 "우바이드"(Ubaid)시기와 일치한다(Yon, 698-699).
 초기청동기 시대에 우가릿은 도시화 성격을 띠게 되면서 작은 도로와 안전을 위한 누벽(ramparts)을 갖추게 된다. 기원전 2,200년경 이후 우가릿은 얼마 동안 발전이 멈춘다. 중기청동기(2,000 년경)에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던 아모리인과 시리아 사람들이 이 지역에 들어  오면서 우가릿은 새로운 형태의 삶을 경험한다. 점진적으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우가릿의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한 이들은 금속제를 만들어 사용했다. 무덤에는 아름답게 꾸민 장신구(ornaments)와 은으로 된 신상들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대의 우가릿 사람들을 "목걸이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부름으로써 당시 우가릿 사회를 묘사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 우가릿에서 이집트와 관련된 수많은 물건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 가끔 이집트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장례식에 사용된 작은 입상(figurines)과 조상(彫像), 그리고 스핑크스가 발견된 점을 통해 우가릿과 이집트가 서로 교역했음을 알 수 있다(Yon, 699-700).











우가릿 지역의 미네트 엘베이다 무덤에서 발견된 상아조각. 미케네 예술의 영향을 받은 이 여신상은 손에 염소와 곡식단을 들고 있는 것을 볼 때 풍요의 여신으로 여겨진다
(BAR 83-5-57).









 1929년이래 계속되어온 우가릿 발굴은 성서연구와 더불어 고대 팔레스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우가릿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 도시가 기원전 2,000년대 초에 이미 번성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우가릿 왕들은 자신의 인장을 사용했는데 "우가릿 왕 닉마두의 아들 야카룸" 식으로 새겨졌다. 이러한 인장은 기원전 19세기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4세기에 이르기까지 누가 우가릿을 통치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가릿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기원전 1400-1200 사이의 기록을 보여준다(Packer, 262).




























                       우가릿의 위치(BAR83-5).


 우가릿은 베이루트(Beirut), 비블로스(Biblos), 두로(Tyre)와 함께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국제 무역항구였다. 이들 도시들은 작은 규모였지만 독립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륙에 있는 미타니(Mitanni), 앗시리아(Assyria), 히타이트(Hittites) 제국들은 이들 항구를 통해 국제무역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들 항구 도시들은 다른 후배지(hinterland) 나라들과의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우가릿은 기원전 14세기초에 이집트와 조약을 맺었으며, 그 후에 히타이트와 조약을 맺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이들 도시들은 대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후에 두로(Tyre)와 시돈(Sidon)과 같은 페니키아 도시들이 기원전 1세기 기간에 이들 도시의 역할을 이어 받았다(Knapp, 188).









전형적인 바다족속의 배모양이다. 해양족 가운데 블레셋은 기원전 13세기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나안 해안지역을 공략하였다(BAR 91-6-34).




 중기 청동기 시대 말엽부터 후기 청동기 시대, 즉 아마르나 시대의 말엽(기원전 15세기)은 레바논과 우가릿 등지에서 괄목할만한 문화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기는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로서 도시발전이 잠시 정체되었던 시기로 짐작된다. 그러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도시도 그 이름과 명맥을 유지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우가릿은 다시 한번 도시문명을 꽃피웠다. 기원전 15-12세기에 이르는 동안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기원전 14세기에 주로 작성된 아마르나 서신들과 당시 모습을 밝혀주는 우가릿 문헌들은 이 시대의 활발한 국제관계를 보여준다. 기원전 1400-1350년 사이에 우가릿은 이집트 영향 아래 들어갔다. 1360년경에 왕궁은 불탔으며, 닉마두 2세(1360-1330)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아미스탐루 1세(1300년경)는 이집트의 아메노피스 3세(Amenophis III)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우가릿은 이집트와 교역관계를 맺었다. 그후 우가릿은 1350년경에 또다시 히타이트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된다(Yon, 700-701).
 기원전 1400-1200년 사이에 8명의 왕이 우가릿을 통치했는데 처음 두 왕(Ammistamru I, Niqmadu II)은 애굽에 충성했다는 것이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나 있다. 닉마두 2세는 애굽 왕을 섬기는 것을 중단하고 히타이트왕 슈필룰리우마를 섬기기로 하였다. 세 번째 왕인 아르칼바(Ar Khalba)에 이어 네 번째 왕인 닉메파(Niqmepa)는 우가릿을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다 그는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족이 카데쉬에서 싸울 때 히타이트를 도와 이집트에 대항하였다. 그 결과 우가릿은 이집트에 대해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히타이트 족속은 다섯 번째 왕인 암미쉬탐루 2세(Ammishtamru II)와 그의 아들 이비라누(Ibiranu)를 강요하여 돈과 군대를 준비시킨 후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앗시리아를 방어하게 하였다. 우가릿의 마지막 왕들인 닉마두 3세(Niqmadu III)와 아무라피(Ammurapi)왕 시기는 짧았으며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이 발견되지 않는다(Packer, 262-263).
 13세기 초엽에 우가릿 왕국은 경제가 활성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왕궁은 군사적으로 힘이 약화되어 이비라누(Ibiranu) 왕은 히타이트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3세기 말엽에 우가릿의 마지막 왕 아무라피(Ammurapi)는 "해양족"(Sea People)에 의해 멸망당한다. 우가릿의 완전한 멸망은 기원전 1180년으로 추정되며, 이후 그곳에 있는 집들과 거주지들이 파괴되었고 약탈당했으며 불탐으로써 우가릿왕국의 흔적을 상실하게 되었다(Yon, 701).
 육지와 바다 사이의 길목이었던 우가릿은 멀리 떨어진 지중해의 키프로스(Cyprus)와 북쪽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는 실리시안(Cilician) 항구와 근동지역을 이어 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우가릿은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여 청동제 무기, 채색 옷감, 곡물, 향료기름, 포도주, 소금 등을 수출했다. 이집트와 에게해의 상품들이 주요 거래 품목들이었다. 설형문자로 된 우가릿의 문헌들은 당시 히타이트와 이집트 상인들이 우가릿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가릿 문헌에 나타난 카사이트(Kassite)와 모압족(Moabites)의 신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 바빌론 사람들과 트랜스 요르단으로부터 온 팔레스틴 사람들이 당시 국제적 도시였던 우가릿에 거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살았던 우가릿은 그 문헌도 다양한 언어로 남겨놓았다. 우가릿 언어 외에도 허리안족 언어, 아카드어, 히타이트어, 이집트어, 키프로-미노아어(Cypro-Minoan), 그리고 상형문자인 루위안어(Luwian)가 발견된다(Knapp, 188-189).


4. 에돔
 구약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돔은 지역과 민족 모두를 의미한다. 창 36:9은 에돔족속의 조상이 에서(Esau)이며 세일(Seir) 산에 거주했음을 밝히고 있다(참조. 삿 5:4). 그러나 기록된 문서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에돔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에돔지역은 사해 남서부 지역을 일컫는다. "에돔"이라는 용어는 셈어의 어근에서 볼 때 "빨간"(red)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에돔"이라는 지명이 불그스레한 그곳의 모래땅 색깔을 따라 붙여진 것이라 여겨진다(Bartleft, 287).
 에돔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이집트 문헌에 나타난다. 메르넵타(Merneptah) 왕의 통치기간에(1224-1214 B.C.) 국경지역에서 활동했던 한 관리의 보고서는 이집트와 에돔의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에돔의 베두인(Bedouin) 지파를 티제쿠(Tjeku) 지역에 있는 메르넵타 호텝히르마아트 요새를 통과하여 페르아툼 호수로 가게 했습니다.- 생명, 번영, 건강이 있으시길!-  ... 위대한 파라오의 카(ka)를 통해 그들을 살리고 그들의 가축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ANET, 259).

 구약성서에서 에돔 지역으로 알려진 세일 땅에 대한 기록은 람세스 문헌에도 발견된다. 람세스 3세(1193-1162 B.C.)는 쇼수(Shosu) 부족 안에 있었던 세일 사람들을 물리칠 때, 그들의 텐트를 유린했으며 그들의 소유물과 가축을 노략질했음을 적고 있다(Papyrus Harris I: 76: 9-11). 따라서 기원전 14-12세기의 이집트 자료들이 에돔과 세일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지역이 동일한 장소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Bartleft, 287).
 민 20:14-21은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초기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에돔지역이 이르렀을 때, 모세는 가데스(Kadesh)에서 에돔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그 지역을 통과할 것을 요청한다. 지나는 길에 해로운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통과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에돔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이스라엘은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이다. 출애굽시기에 에돔왕국의 활동에 대한 증거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적대관계는 이스라엘의 왕국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에돔은 기원전 8-7세기경에 와디-아바라(Wadi Arabah)의 서쪽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과 경쟁관계에 서게 된다. 이 때 앗시리아의 행정력은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자 했으며, 에돔의 군사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Bartleft, 288).
 하지만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이 형성되는 시기에 에돔 역시 왕제도를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울은 에돔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며(삼상 14:47), 다윗 역시 염곡(the Valley of Salt)에서 에돔을 대파함으로써 우위권을 확보하게 된다(삼하 8:13이하; 비교. 대상 18:12). 솔로몬은 에돔 땅 에사온게벨(Ezion-Geber)에서 배를 건조하기도 했으나 에돔과의 구체적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에돔의 활동은 여호사밧의 통치시기(873-849 B.C.)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이집트의 시삭이 팔레스틴을 공략할 때(르호보암 5년 922 B.C.) 에돔이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뿐이다(MacDonald, 19).
 유다왕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에돔과 연합하여 모압을 제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왕하 3:4-27). 유다 왕 여호람(852-841 B.C.)때 에돔은 유다를 배반하여 독립적인 왕권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여호람은 그들을 진압하기에 이른다(참조. 왕하 8:20-22). 아마샤 왕(802-786 B.C.) 때 에돔은 유다에게 패배했으나 아하스 왕(743-728 B.C.) 때는 유다를 격파함으로써 엘랏을 회복한다(왕하 16:6). 이처럼 에돔과 유다는 서로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대치관계에 있었다. 유다가 에돔을 지배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으며 전쟁에서 이긴 경우라도 실제적인 지배력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에돔은 유다의 경우처럼 결국 앗시리아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다. 바빌론이 근동을 장악했을 때 유다는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에 대항했지만, 에돔은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렘 27:8-22). 관망하고 있었던 에돔은 유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이러한 태도는 바빌론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유다인은 형제관계에 있는 줄 알았던 에돔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참조. 아 1:11; Bartleft, 292).
 에돔의 경제는 농업과 상업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와디아라바의 구리광산은 경제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에돔은 인도와 아라비아, 지중해, 이집트를 연결하는 낙타로(caravan routes)를 장악함으로써 경제를 유지했으며, 이 길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그 문명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에돔의 종교는 풍요의 신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진흙으로 만든 작은 입상들(figurines)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셔졌다. 에돔 지역의 대표적인 신은 카우쉬(Qaush)로 알려지고 있으며, 다른 이름의 신으로 엘로아(Eloah)가 있다. 엘로아는 야훼의 별칭인 엘로힘의 연계형 "엘로헤"와 유사하다. 그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스라엘에게 형제의 나라로 알려진 에돔은 팔레스틴에서 기원전 13세기경부터 6세기까지 존속하면서 이스라엘과 많은 것을 공유하였다. 하지만 보존된 문헌의 절대적인 빈곤으로 인해 에돔의 역사를 재건하는 일이 쉽지 않다(참조. 문희석, 336-375).


5. 모압
 모압 역시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민족과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모압은 사해 동쪽의 고지평원(plateau)에 위치한 작은 왕국이었다. 모압 아래에는 에돔이 있었고, 북쪽에는 암몬이, 그리고 사해 건너편 서쪽에는 유다가 자리잡고 있었다. 창 19:36-38은 모압의 조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모압과 암몬 족속의 기원에 관한 창세기의 언급은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를 반영하며, 적어도 그 두 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가까운 친족의 나라이면서도 경쟁관계에 있었다.
 고고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압은 도시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지 평원에 살았으며 농업이 주요 경제수단이었다. 성서의 룻기는 베들레헴 주민들이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이주해 갔던 사실을 전하고 있음을 볼 때, 모압에 먹거리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참조. 박종수, 1995: 174-203).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모압지역에 인구가 점차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모압은 일찍부터 이집트와 북쪽 시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웃나라인 이스라엘과도 빈번한 접촉을 하였다((Miller, 885).
 모압에 관한 초기 기록은 이집트의 저주문헌에 나타난다. 기원전 19-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저주문헌은 "슈투의 왕들"이 이집트를 대적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 안에 끼어 있다고 기록함으로써 "슈투"가 모압지역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참조. 민 24:17-18). 그러나 모압에 대한 보다 분명한 언급은 이집트의 팔레스틴 지배가 강화되었을 때 나타난다. 아멘호텝 2세(1436-1410) 시기의 비문에는 에돔과 모압 족속의 조상들로 보이는 샤수(Shasu)가 언급되어 있다. 비문에 나타난 모압 족속은 트랜스요르단 남단에 살고 있던 유목민들이었다(Kautz, 391). 람세스 2세(1279-1213)의 룩소비문(Luxor inscription)에는 그가 요새화 된 모압을 공략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1930년에 발굴된 발루석비(Balu stele)에 세 인물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둘은 신들로 여겨지며, 세 번째 인물은 모압의 왕으로 여겨진다. 이집트의 비문은 모압이 이집트에 대해 충성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3세기에 모압이 이미 국가적 체제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Kautz, 391).
 1868년에 발굴된 메사비문(모압비문)을 통해 모압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메사비문(Mesha Inscription)은 기원전 9세기에 활동했던 모압 왕 메사의 치적을 소개하고 있다. 이시기는 이스라엘의 아합왕 통치시기(873-851 B.C.)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비문에 의하면 메사는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있었던 메데바(Medeba) 땅을 회복하고 모압의 대표적 신인 그모스(Chemosh)를 기념하는 신전을  봉헌하였다.
 앗시리아의 기록에도 모압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티글랏필레셀 3세는 기원전 734-732년에 걸쳐 모압을 비롯한 시리아-팔레스틴의 여러 나라를 앗시리아의 통치권 아래 두었다.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된 점토조각에는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쳤던 왕들의 목록이 담겨 있는데, 그 안에 모압왕 살라마누(Salamanu)가 언급되어 있다.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721-705 B.C.)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에는 모압왕이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한 팔레스틴 왕들의 목록에 들어있다. 그러나 이후 정황을 볼 때 모압은 앗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나라의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ANET, 287). 이 때문에 모압은 이스라엘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앗시리아의 세력 안에 들어간 모압은 바빌론의 대두와 함께 유다처럼 바빌론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된다(Miller, 886).
 민수기 21장은 이스라엘과 모압의 첫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아모리왕 시혼을 물리치고 그 지역의 통과를 거부하는 모압지역의 아르논을 멸한 내용이 소개된다. 민 22-32장은 모압의 왕 발락과 미디안 족속이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민 22-24장은 모압의 예언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요구대로 행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기원전 700년경의 작품으로 보이는 데어알라(Deir 'Alla)의 발람이야기는 모압지역의 예언현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민 22-24장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Hackett, 571). 결국 민수기의 보도는 이스라엘과 모압이 갈등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던 왕국시대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왕이 될 때쯤 모압은 나중에 수도가 된 디본(Dibon)을 요새화 했다. 사울과 다윗은 모압지역에 진격하여 그곳을 제압했으며 다윗시대에는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다(삼상 14:47; 삼하 8:2). 솔로몬은 모압의 여자를 사랑함으로써 예루살렘 동편에 모압의 그모스신을 위한 산당을 만들기도 했다(왕상 11). 이스라엘의 모압지배는 곧 끝나고 모압은 독립을 추구한다. 모압비문에 의하면 메사왕이 오므리 왕조 후반기에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메사는 아르논을 왕의 대로와 연결하고 디본을 자치경제가 가능한 도시로 건설했다(Kautz, 393). 메사가 죽자 모압은 아르논(Arnon)과 제렛(Zered) 사이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고, 이스라엘과 아람은 아르논의 북부 도시들을 장악하였다(왕하 10:32이하).
 모압이 자체적 세력을 상실할 때, 바빌론과 시리아, 암몬족속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략하였다(왕하 24:2). 그러나 모압은 암몬과 더불어 기원전 582년에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유다가 바빌론 포로기를 지내는 동안 모압은 유다백성과 결혼하여 섞여 살았다(에 9:1이하; 느 12:23). 모압 역시 유다의 경우처럼 신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Kautz, 394).
 모압의 언어는 히브리어, 페니키아어, 우가릿어와 유사했다. 그들의 종교는 그모스신을 중심으로 하는 풍요제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 높은 구릉에 제단이 세워졌으며(민 22:40; 23:1, 14, 29), 돌기둥과 동물의 희생제사에 대한 흔적이 발견된다. 그모스는 야훼의 기능과 유사하여 전쟁과 심판의 신으로 여겨졌으며, 그 여성파트너는 아쉬타(Ashtar) 였다. 아쉬타는 풍요의 여신으로서 작은 입상모양의 형상으로 제작되어 섬겨졌다. 바알신도 종종 언급되지만 바알은 "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바알이 다른 가나안의 지역처럼 신앙의 대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Kautz, 395). 그러나 바알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지명(예를 들면, 벧바알페올, 벧바알메온 등)이 종종 발견된 것을 볼 때 바알 신전이 도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모스와 더불어 바빌론의 느보(Nebo/Nabu) 신도 섬겨졌으며, 그 밖에 셈족계통의 신들인 페올(Peor), 메온(Meon), 그리고 호론(Horon) 등과 같은 신의 이름도 발견된다(Kautz, 395; Miller, 892).

6. 암몬
 성서는 롯과 그의 작은 딸 사이에 태어난 벤암미가 암몬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한다(창 19:36-38). 오경전승은 암몬 족속이 아르논강과 얍복강 사이에 있는 삼숨민 (Zamzummim) 지역에 살았음을 전한다(신 2:20이하, 37; 3:11). 후대에 와서 이 땅이 아모리인들에 의해 점령당하자 암몬족들은 얍복강 동쪽지역에 주로 모여 살게 되었다(민 21:24; 신 2:37; 수 12:2; 13:10, 25; Thompson, 111).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암몬 족속과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민 21:24). 그러나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암몬족 역사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여호수아에 의해 인도된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암몬이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통해 이스라엘 형성 초기에 암몬이 아직 위협할 만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Tarragon, 194).
 사사시대에 암몬은 모압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위협하기도 했으나(삿 3:13; 11:4, 12-33), 역사적인 진실성은 희박하다. 사울은 암몬의 나하스 왕에 의해 점령된 길르앗 야베스를 구했으며(삼상 11:1-11), 다윗은 암몬의 수도였던 라밧암몬(Rabbath-Ammon)을 공략하였다(삼하 10-12). 이 때 비로소 암몬은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게 된다. 솔로몬 시대에 암몬과 이스라엘이 가족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왕상 11:1, 5, 7, 33). 이후 암몬은 솔로몬 사후에 독립된 왕국을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호사밧의 통치기간(877-853 B.C.)에 암몬은 모압, 에돔과 더불어 유다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하고 만다(대하 20:1, 10, 22-23). 암몬은 유다의 웃시야와 그의 아들 요담에게 조공을 바쳤다(대하 26:8; 27:5).  암몬왕 사니푸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앗시리아의 티글랏필레셀 3세(744-727 B.C.)에게 조공을 바쳤다. 앗시리아의 에살하돈(680-669 B.C.) 통치시기에는 암몬왕 푸두일(Puduil)이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쳤으며 유다의 여호아김을 괴롭히는 세력에 동참하기도 했다(왕하 24:2).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바로 전에 유다는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 나라와 연합하여 바빌론에 대항하려 했으나, 암몬은 아람과 모압과 더불어 갈대아인(Chaldeans)의 침략에 동조하여 유다를 공격하였다(601 B.C.; 왕하 24:2). 그러나 바빌론은 유다를 멸망시킨 후에 암몬도 곧 멸망시켰다(581 B.C.; 겔 21:25, 33).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 유다의 그달랴는 암몬에 피신한다(렘 41:10, 15). 암몬족은 바빌론 포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느 4:1-2). 동시에 그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거부했던 유다인과의 결혼을 감행함으로써 정통 유대인의 세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에 9:1이하; 느 13:1, 23-31). 페르시아의 속주로 있었던 암몬은 마카비 전쟁 시기에도 유다의 적대세력으로 남아 있었다(Tarragon, 195).


<암몬의 왕들>

나하스(1030-1000)                        삼상 11:1-12; 12:12; 삼하 10:2
하눈(나하스의 아들)                        삼하 10:1-4; 대상 19:2-6
쇼비(나하스의 아들)                        삼하 17:27
샤닙(733)                                    티글랏필레셀(ANET, 282)
자쿠르(샤닙의 아들)                        암몬 조상(Ammonite Statue)
야리에젤(?)                                    암몬 조상(Ammonite Statue)
푸두일루/부두일루(701-677)            산헤립/에살하돈
아미나답 1세(667)                        앗수르바니팔(ANET, 294)
힛살엘(아미나답의 아들)                        텔 시람(Tell Siran) 전투
아미나답 2세(힛살엘의 아들)            텔 시람(Tell Siran) 전투
바알리스/바알야샤(587)                        렘 40:14; 텔 우메이리의 인장(bulla)(Tarragon, 195).


7. 아람(시리아)
 구약성서에서 시리아는 고대의 다마스커스(다메섹)와 아람지역을 의미한다. 시리아는 일반적으로 팔레스틴의 북쪽과 북동쪽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과 하보르(Habor)강 사이의 땅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한다. 창 24장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을 보내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한 곳이 아람 나하림("두 강의 아람"이라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아람은 일찍부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어온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아람 나하림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의미한다(창 24:10). 이처럼 성서에서의 "아람"은 광범위한 지역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시리아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지역에서 분포하여 살았던 거주민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지역적 한계는 불분명하다(Lasor, 687).
 기원전 3,000-2,000년대에 시리아 지역의 주요도시는 북부 시리아의 에블라와 우가릿을 들 수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마리 등이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Dornemann, 275). 이집트인들은               2400-1200         2400-1200 년경에 상당한 수준에서 시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1482-1450)는 허리안족의 미타니 왕국을 알렙포(Aleppo)와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제압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아람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앗시리아의 티글랏필레셀 1세(1115-1077)의 연대기에 출현한다. 이 문헌에 의하면 북쪽 셈어를 사용하는 아람인은 기원전 10세기에 정치세력을 갖춘 집단으로 근동에 나타났다(Lasor, 690-691).
 사울은 아람의 주요 도시였던 소바(Zobah)를 쳐서 아람족을 물리쳤다(삼상 14:47). 다윗이소바의 왕 하닷에셀을 물리치자 다마스커스(다메섹)의 사람들이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다. 그러나 아람은 성공하지 못하고 다윗에게 조공을 바친 것으로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삼하 8:3-6). 헤시온(Hezion; 925-915 B.C.)은 타브림몬(Tabrimmon)과 벤하닷 1세(Ben-hadad I)를 포함하는 왕조를 건설하고 다마스커스를 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요새화 했다. 시리아의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아합과 싸우기도 했으며(왕상 20), 앗시리아의 샬람에셀 3세의 공격대상이 되었다(853-845 B.C.). 벤하닷은 하사엘에 의해 살해되었다(왕하 8:15; 843 B.C.). 하사엘은 예후(839-822 B.C.)와 여호아하스(821-805 B.C.) 시절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그의 아들 벤하닷 2세 역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괴롭혔다(왕하 10:32이하; 13:3, 22). 여로보암 2세(788-748 B.C.)는 다마스커스와 하맛을 짧은 기간 다스렸으며, 시리아의 르신은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였다. 시리아-에브라임 전쟁(734 B.C.)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쟁에서 유다의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티글랏필레셀 3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다마스커스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원인을 초래하였다(왕하 16:5-9; ANET, 283; Lasor, 691). 이후 시리아는 유다의 멸망과 함께 바빌론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 페르시아의 통치기간에는 페르시아의 속주로 편입되었다(Lasor, 692).
<출처: 고대근동의 역사와 종교, pp. 5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