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이집트의 역사 - 박종수 -

은바리라이프 2012. 2. 21. 17:41

이집트의 역사

 


-  박종수  -

 

 


1. 개관


 "나일강의 선물"로 알려진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사막에 비유될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의 홍수에 의존하여 농사가 이루어진다. 경제적 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나일강 유역의 삼각주는 오늘날 카이로 북쪽에 있는 여러 개의 나일강 지류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북동쪽에 있는 수에즈 해협은 시나이 반도 및 서아시아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교류 지역이었다.
 이집트 역사에 대한 연구는 대략 기원전 3,000년경부터 알렉산더 대제가 이집트를 함락할 때까지의 332년까지 이어진다.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사실 현대적 개념의 역사의식이 없었다. 그들은 사건의 진행을 연대순에 따라 이해하는 일직선상의 역사관보다는 순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의 역사기록은 연속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왕 중심으로 모아진 여러 자료들의 모음집과도 같다. 따라서 이집트 역사는 주변 아시아국과의 관련성 안에서 고찰할 때 그 모습이 구체화되는 경우가 많다(Simpson, 190-191). 이집트의 제사장이었던 마네토(Manetho)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별한 최초의 사람이다. 이집트 역사를 크게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 왕조시대(3,100-2,686): 1-2왕조
           고왕국 혹은 피라미드시대(2,686-2,160): 3-8왕조
           제 1 중간기(2,160-2,040): 9-11왕조(11왕조의 재 정복기)
           중왕국시대(2,040-1,633): 11(정복후기)-13왕조
           제 2 중간기(1,633-1,558): 14-17왕조
           신왕조 제국시대(1,558-1,069): 18-20왕조(19-20왕조: 람세스시대)
           제 3 중간기(1,069-656): 21-25왕조
           세이트(Saite) 시대(664-525): 26왕조
           후기왕조시대(525-330): 27-31왕조

 이집트에서의 종교는 이집트 문명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종교생활이 이집트 문명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이집트의 역사기록은 신화와 의식들의 융합으로 표현되었으며, 신화적 의식은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문자는 일종의 그림문자(hieroglyphics)로서 일반적으로 상형문자라고 불린다.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통해 수많은 설화(narratives), 지혜문학, 시, 그리고 많은 종교문헌을 남겼다. 이집트 서기관들이 주로 문학활동에 참여했으며, 그 가운데 일부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2000-1000         2000-1000년대의 이집트 지도
(Knapp, 162)




















2. 왕조이전시대(-기원전 3,100)
 우리는 보통 이집트의 선사시대 신석기 및 후기 단계를 보통 "왕조이전시대"라고 부른다. 왕조 이전시대의 문화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나일 삼각주의 남서쪽에 있는 마림다바니살라마와 파이윰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5000-4000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들은 당시의 주민들이 손쉽게 지은 움막에서 살았고, 죽은 사람을 집안에 묻은 흔적이 발견된다. 왕조이전시대와 초기왕조시대의 이집트 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땅은 대부분 관리들에게 할당되었으며, 일반인들은 그 땅에서 농사일을 하였으며 거주의 자유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신분은 아니었다. 노예들은 주로 전쟁포로와 외국인 또는 부채로 인해 노예가 된 고용인들이었다. 왕조 이전 시대의 가장 독특한 사치품으로 화장품을 가는데 사용했던 석판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은 재산과 지위의 차이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청금석 수입은 이집트의 교역망이 아프가니스탄까지 뻗어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집트 사회는 신(神)-왕-죽은 사람-인간(이집트인) 순으로 이루어진 계급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왕은 대체로 열등한 신으로 여겨졌으며 인간보다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다(Baker, 74-76).
 이집트에서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기록된 문헌은 많지 않다. 의식(ritual)과 관련된 벽화나 사냥, 동물, 전쟁 등과 관련된 벽화를 통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뿐이다. 이런 것들은 주로 이집트인들이 자기들을 지켜준 신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성전에 보관했던 유물들이다. 이 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원통형 실린더에 새겨진 비문이나 담황색 토기들은 그 형태 면에서 보면 시리아나 팔레스틴에서 유래한 제품으로 여겨진다. 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여러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 유물들과 많은 점에서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점에서 볼 때 이집트 문자의 기원 역시 메소포타미아의 문자구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Simpson, 189).

3. 초기 왕조시대(1-2왕조; 기원전 3,100-2,686)
 1-2왕조 시기에는 왕조이전의 상태와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남부이집트(Upper Egypt)와 북부이집트(Lower Egypt)는 한 왕권 아래 있었다. 이집트의 제 1왕조(3,100-2,890)를 실제로 창건한 사람은 나머(Narmer)이다. 이집트의 왕조는 어떤 절차와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네토(Manetho)는 티스(This 혹은 Tjeni)를 아비도스(Abydos) 지역의 주요 도시로 언급하고 있으며, 처음 두 왕조는 흔히 티나이트(Thinite) 시대로 불려진다. 이집트 전승에 의하면 남부 이집트와 북부 이집트의 지배자가 따로 존재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지역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족장체제를 이루며 독립적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얼마 후에 메네스(Menes)는 남부 이집트의 대부분과 델타 유역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이집트의 제 1 왕조는 남부와 북부의 영역이 한 사람에 의해 통일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의 정치적인 영역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지배자들이 한 왕을 중심으로 동맹을 맺은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외부 세력이 이집트의 왕조형성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 발견된 원통형 인장과 문자의 기록은 이집트 문명이 바빌론의 영향을 받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Simpson, 209).
 이집트에는 제 1 왕조때 문자가 보급되었다. 제 1 왕조 중엽에는 파피루스가 필기도구로 사용되었고, 갑자기 부유해진 사람들은 다양한 무덤을 남겨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했다. 제 1 왕조 말기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제 2 왕조가 들어서서 국내의 파벌을 평정했다(Baker, 76). 이집트의 제 1 왕조와 제 2 왕조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제 2 왕조(2,890-2,686 B.C.) 초반부만 해도 아비도스에서 왕족들의 무덤이나 장례를 위한 궁전 따위는 건설되지 않았다. 이점을 고려할 때 제 2 왕조에 들어서면서부터 국가종교(state religion)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태양신 레(Re/Ra)에 대한 새로운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동시에 왕조를 상징하는 신이었던 호러스(Horus) 역시 태양신 레와 함께 섬겨졌다. 메네스가 두 개의 이집트를 하나로 통일했을 때 하늘의 신 호러스를  호국신(護國神)으로 섬겼으며, 자신은 호러스가 현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Packer, 202). 나중에 호러스의 형제이자 삼촌인 셋(Seth) 신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에드푸에 있는 신전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집트신 호러스
(BAR 85-1-21).















4. 고왕국(피라미드) 시대(3-8왕조; 기원전 2,686-2,160)
 이집트는 3왕조 시대(2,686-2,613)부터 초기왕조 시대와 구별된다. 3왕조의 두 번째 왕인 도세르(Djoser 혹은 Tosorthros)는 이집트 왕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카라(Sakkara)에 있는 그의 피라미드는 돌로 만들어진  계단식 피라미드으로서 이전 것보다 몇 배나 큰 피라미드으로 알려져 있다(Baker, 76). 2왕조에서 3왕조는 비교적 큰 변화 없이 진전된다.


                       사카라에 있는 도세르(Djoser) 왕의 피라미드모형(Simpson, 219)


 4왕조 시기(2,613-2,494)는 세계적으로 문명화가 이룩된 주요 시기이다. 이 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르곤이 이끄는 아카드 왕국이 강성해져서 이집트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시대의 정점을 이룬 것이 4왕조 시대이다. 4왕조 시대에는 왕의 죽음에 대비하여 피라미드를 지나치게 많이 건설했던 시기로서, 이로 말미암아 국가 경제가 피폐해진 원인을 초래했다. 무덤에 새겨진 비문을 살펴보면 고위 관리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진 땅을 하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은 대부분의 수확을 소작료로 납부하였다(Baker, 76). 5왕조에 들어서야 이집트는 본격적으로 피라미드 시대에 접어들며 왕을 위한 태양신 제단이 세워진다. 이후 6왕조까지 이집트의 왕들은 거대한 피라미드 군(群)을 건설했다. 이 시대에 대규모로 건설된 피라미드는 왕권의 상징으로서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 피라미드는 왕이 죽은 후에 마지막으로 안식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왕이 묻힌 후에 안으로 들어가는 복도는 봉쇄되고 출입구는 봉인되어 이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피라미드가 왕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게 하였다(Simpson, 222).
 5왕조 시기(2,494-2,345)에 태양신 레(Re/Ra)를 숭배하는 의식(ritual)이 강조되었다. 이 때 왕은 태양신 레의 현신(現身)으로 간주된다. 당시에 주목할만한 내적인 발전은 왕궁이 관할하는 태양신 성전의 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신전들은 태양신을 예배하는 장소뿐만 아니라 왕의 무덤으로 사용되기도 했다(Baker, 76). 이러한 현상은 이전에 없었던 것으로서, 도세르(Djoser) 치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 이후에도 거의 발견되지 않은 특이한 현상이었다. 제 5왕조의 마지막 3명의 왕대는 태양신 숭배가 다소 주춤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오시리스의 출현은 훨씬 이전의 일이지만 5왕조에 들어서 그 존재가 입증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에 작성된 "프타호텝의 교훈"(The Teachings of Ptah-Hotep)은 성서의 잠언서처럼 젊은이에게 주는 부모의 훈계를 포함하여 자만하지 말 것과, 좋은 충고를 받아드릴 것과, 친구를 잘 사귈 것과, 여인을 잘 대우하라는 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참조. Matthew, 184).
 6왕조 시기(2,345-2,181) 이후 이집트 땅은 멤피스(Memphis)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시대에 발견된 고위 관리들의 비문은 그 내용이 길어짐으로 해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나일강 유역의 엘레판틴 섬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페피 1세(Pepi I)와 2세 때에 교역을 위해 남쪽으로 원정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집트는 하누비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별도의 정치세력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페피 2세 때는 무력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후 여러 명의 통치자와 단명했던 7-8왕조의 왕들이 통치했다(Baker, 76).
 7왕조의 아홉 왕에 이르는 8년 동안과 8왕조의 여섯 왕에 이르는 13년 동안은 피라미드 시대의 전승을 이어나갔다. 8왕조가 끝나면서 이집트의 고왕국은 전국에 퍼진 기근과 폭력으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중앙집권 세력이 약화되었다(Baker, 76).
 고왕국 시대는 신과 동일시되는 왕이 다스렸던 시대로서 왕족과 지배계층의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전 국토에 곡물창고가 지어졌고, 과세를 위한 평가기구가 설립되었으며, 관료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체제가 형성되었다. 지역에 흩어져 있는 지방군주들은 왕의 권력에 순응하였으며, 왕은 그들에게 세금을 면제하는 특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그들의 도움에 의지하는 상호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고왕국 시대의 말기에 들어서 멤피스에 권력의 누수현상이 생기면서 피라미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때 유명한 노래로 하퍼연주자의 노래(The Song of Harper) 가 있다(Simpson, 235).

5. 제 1 중간기(2,160-2,040): 9-11왕조(11왕조의 재 정복기)
 제 9왕조부터 11왕조에 이르는 시기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왕들은 새로운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는데 실패했다. 이 시기는 왕의 측근에 있는 관료들과 이집트 남부의 군주들에 의해 왕권이 약화되었다. 그 결과 제 1 중간기가 도래하였고, 이 시대를 가리켜 멤피스(Memphis),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 테베(Thebes) 시대라고 부른다. 멤피스 중심의 왕권이 지방으로 분산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테베를 도읍으로 삼았던 11왕조의 4번째 왕인 멘투호텝 1세(Mentuhotep I)는 이집트를 점차 재통일하고 헤라클레오폴리스 인들을 추방했다(Baker, 76).
 제 1 중간기 동안에 이집트에 기근이 있자, 왕들은 자신의 곡물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도시는 왕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체적인 힘을 키우는데 주력하였고, 중앙정부보다는 지방 도시의 정부에 더욱 충성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중앙정부의 몰락을 초래함으로써, 결국 멤피스 중심의 고왕국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이 때 기록된 유명한 지혜문헌에는 왕의 통치와 도덕적 책임을 설교하는 "메리카레를 위한 교훈"(The Instruction for Merikare)과 "달변가 농부의 이야기"(The Story of the Eloquent Peasant)가 있다. 제 12왕조에서 13왕조로 넘어가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약 1세기 동안에 70여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어떤 왕들은 수개월밖에 다스리지 못했다. 제 13왕조(1786-1633) 때는 아시아 이민이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기원전 18세기 말엽부터는 북동부 지역의 삼각주에 팔레스틴 사람들이 이주해서 정착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메리카레를 위한 교훈' 등을 비롯한 여러 문헌들은 이런 종류의 이민이 초래하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으며, 이것은 당시 정부의 힘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Baker, 76).
 제 1 중간기의 이집트는 불안정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살과 방종이 성행했다. 이푸웨르(Ipu-wer)나 네페르로후(Nefer-rohu) 등과 같은 예언자들의 사회비판도 바로 이 시기에 나온 것들이다(강성열, 116).

6. 중왕국시대(2,040-1,633): 11(정복후기)-13왕조
  멘투호텝 1세의 후계자들은 테베를 거점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멘투호텝 3세 때 왕의 대신 아메넴헷(Amenemhet I)이 왕위를 빼앗고 중왕국시대를 열었다. 그는 12왕조(1,991-1,786)의 창시자로서 왕족이 아닌 가문에서 출생하여 왕이 된 후에 괄목할만한 개혁을 수립했던 뛰어난 행정가였다. 그의 첫 번째 개혁은 왕궁의 거처를 테베에서 새로운 도시였던 잇토이(Itj-towy)로 옮긴 것이다. 두 번째 개혁은 도시(nome) 체제를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왕권의 형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신과 동일시되었던 이전의 왕권은 이제 중왕국에 들어서 백성을 위한 목자로서의 왕권으로 바꿔졌다(Simpson, 246).
 이집트는 제 12왕조 초에 고전형태의 이집트어가 문어로 정착되었다. 이것은 일상언어와는 차이가 있는 인위적인 언어였다. 이집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중기 이집트어로 쓰여졌다(Baker, 76). 이집트의 중왕국은 행정의 전문화를 통해 발전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가리켜 관료자들과 회계사들의 시대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 때 시리아와 팔레스틴은 아직 메소포타미아의 팽창정책 아래 놓여 있었다. 이집트의 12왕조는 이후 약 2백년 동안 존속되었다. 

7. 제 2 중간기(1,633-1,558): 14-17왕조
 이집트의 영광은 13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이 때부터 이집트는 제 2 중간기에 접어들면서 나라는 여러 왕권으로 분할된다. 13-14왕조는 단명으로 끝나고 15왕조는 비교적 긴 수명을 유지하는데 바로 이 15왕조가 힉소스족에 의해 다스려지는 시기였다. 힉소스족(Hyksos)은 제 2 중간기의 혼란한 상황을 노려 이집트를 점령했던 아시아족속으로서 점차 그 세력을 확대했다. 힉소스족은 나일 삼각주에 있는 아바리스(Avaris)를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헬리오폴리스의 지방신 레(Re)를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힉소스족은 이집트 전역을 통치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실제로 이집트 남부(Upper Egypt) 지역만을 통치했으며, 북부에 있는 여러 왕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Packer, 204). 몇몇 성서학자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 바로 이 시기에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된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이집트의 역사기록에서 성서의 증언은 발견되지 않는다.
 아시아족이 이집트를 통치함으로써 이집트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이 전래되었으며,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기술과 직조기술에 이르는 다양한 기술이 이집트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다.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되었으며, 전쟁에서 말과 전차가 등장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기술적으로 뒤져있었던 이집트를 아시아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17왕조가 끝날 무렵 이집트는 힉소소족의 지배에 항거하여, 테베왕 카모세(Kamose; 1545-1539)는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Baker, 76).

8. 신왕조 제국시대(1,558-1,069): 18-20왕조(19-20왕조: 람세스시대)
 기원전 1,558년 아모세(Ahmose)의 출현과 함께 이집트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자신의 통치기간에 힉소스족을 몰아내고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이집트를 통일하기에 이른다(Simpson, 255). 이집트의 전설은 아모세를 신왕조의 시조로 보고 있다. 아모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집트의 종교를 개혁하였다. 그들은 아문(Amun)에 대한 예배를 태양신 레(Re)와 관련시켜 부활시키고, 이를 국가신 아문-레(Amun-Re)라고 불렀다(Packer, 206). 이집트는 이제 바야흐로 이웃 나라와의 경쟁체제하에 돌입하게 되며, 이집트 역사상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대로 접어든다. 18-20왕조 기간에 이집트는 여러 나라와 종족이 혼합하여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아모리족은 북동쪽에서, 누비아족은 남쪽에서, 그리고 리비아족은 서쪽에서 그 세력을 형성했다.
 18왕조(1,558-1,303)는 외형적으로 볼 때 군사적인 면이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왕조의 초기에 르네상스 운동이 있었고, 이집트는 재통일을 시도하여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중왕국시대의 조각이나 회화물(繪畵物)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신왕국 시대의 예술작품들은 이전 시대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모된 형태로 그 독특성을 창출해 나갔다. 동시에 상당한 수준으로 이전의 문학이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18왕조의 초기에는 모계중심적인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왕비들과 왕가의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발견된다. 투트모세 2세가 죽은 후에(1504), 여성이었던 핫셉수트(Hatshepsut)가 이집트의 왕이 된 것은 이집트 여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태양신 레의 딸이라고 부르면서 지배권을 강화했다(Packer, 206).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의 왕들은 신(神)이 육체를 입고 지상에 온 것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왕이 신으로 경배되었다. 투트모세 2세가 죽었을 때, 이집트의 역사는 그가 "하늘에 올라가 여러 신들과 섞여졌다"고 기록함으로써 왕은 신의 현현이요 죽은 다음에는 다시 신이 된다는 신앙이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Packer, 206).
 왕가의 장례의식과 매장의식들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매장 장소와 종교의식을 행하는 성전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Simpson, 261-262). 신왕국에서는 왕들의 무덤으로 멀리 떨어진 계곡에 있는 바위들이 활용되었다. 신왕국 시대에 다양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뾰족한 기둥모양의 첨탑(obelisks)이 건축양식으로 발전되었다. 이 시기에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1,479-1,425)의 군사적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는 팔레스틴을 공략하여 므깃도를 장악하기도 했다. 신왕국의 왕 가운데 특히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1,382-1,344)는 왕권을 상징하는 거대한 무덤을 건축하였고, 이를 통해 아문-레의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영원불멸의 존재로 받들어졌다(Packer, 209)
















황소상 안에 하토르(Hathor)신이 앉아 있으며, 아문-레(Amun-Re) 신이 뒷쪽 벽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  이것은 기원전 1440년경의 아메노피스 2세 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BR, 1990-3-19).











 아멘호텝 4세(1,352-1,336)는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톤(Akhen-aton/Akhen-aten)으로 바꾸고 수도를 아마르나로 정했다. 그는 아문-레 대신에 태양신 아톤(Aton/Aten)을 유일한 최고신으로 섬기게 했다. 아케나톤은 이전의 태양신 숭배종교를 더욱 발전시켰다. 태양신 종교는 태양신을 세계의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종교이다. 왕의 신성도 강조되어 아케나톤 자신이 태양신 아톤의 아들로 간주되었다. 그는 태양신을 위한 신전을 많이 지었으며, 이 신전을 짓는 동안 아몬 신이나 다른 신들에 대한 경배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Baker, 77).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마르나 지역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 의하면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는 국제적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로 알려진다. 아마르나 서신들은 팔레스틴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 오갔던 외교문서로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물이 되고 있다. 






파라오 아케나톤과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그들의 딸과 함께 놀고 있다(신왕국 18왕조). 태양신 아톤의 상징이 그들 사이에 있다(Knapp, 176).





 아멘호텝 4세가 죽고 나자 그의 후계자 투탄카문(Tutankhmun; 1,336-1,327)이 왕이 되어 도읍을 멤피스로 환원하고 유일신 아톤을 제거한 다음 다시 아문-레의 신앙을 회복했다. 거의 원형이 보존된 투탄카문의 무덤에는 지하신 오시리스(Osiris)에 대한 여러 상징물들이 매장되었으며, 이것들은 당시 오시리스에 대한 예배가 성행했음을 보여준다(Packer, 210). 투탄카문의 호화로운 무덤장식과 부장품은 당시 이집트가 경제적으로 부국(富國)이었음을 암시한다. 투탄카문의 뒤를 이어 아이(Ay)가 왕을 이었으나 4년만에 죽고 하렘합(Haremhab)이 왕이 되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집트 장군이었던 람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Baker, 77).

 람세스 1세(Ramesses I)는 19왕조(1,295-1,294)의 창시자로서 람세스시대(19-20왕조)를 열었던 주역이다. 람세스 시대는 북부이집트(Lower Egypt)에 그 기원을 둔다. 람세스는 나일 삼각주 동부출신으로 이집트 중심지는 19왕조가 시작되면서부터 나일 삼각주로 이동했다. 그 왕조의 후원자격인 신은 아바리스의 셋(Seth)이다. 람세스 시대는 이전의 문화를 적절하게 계승하였으며,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것들을 다시 활용하는 유연성을 발휘했다(Simpson, 276). 이 시대의 성전과 지하의 매장시설은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구조물과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띠었다. 이 구조물의 북쪽에는 무덤시설이 있었고 남쪽에는 종교의식을 행하는 성전이 있었다. 람세스 1세는 팔레스틴과 시리아에 원정하여 군사적인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군사적 정책은 그의 아들 세티 1세(Sethi I; 1,294-1,279)에게 계승되었다. 세티 1세는 팔레스틴을 침략하여 히타이트(Hittites) 족속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는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인들을 무찔러서 이집트의 안전을 도모했다(Baker, 77).











투탄카문의 시신을 보호하는 제단.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 제단의 안과 밖은 금으로 채색되어 있다(BAR 89-3).










 람세스 2세(1,279-1,213)는 이집트 전역에서 건축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출애굽기 1장에 묘사된 히브리인의 부역은 이집트에서 람세스 2세 치하의 건축사업이 매우 왕성했음을 보여준다. 이 때의 건축물로서 아부(Abu)와 누비아(Nubia)에 건설된 성전이 있다. 이 기간에 히타이트 족속이 이집트의 왕들과 서신을 교환했다는 증거들이 있다. 람세스는 기원전 1285년에 히타이트와 가테스(Kadesh)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 후에 강화조약을 맺었으며, 히타이트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Knapp, 181).
 람세스 2세를 이은 메르넵타(Merneptah; 1,213-1,203)는 팔레스틴을 무자비하게 공략하였다. 메르넵타 비문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를 침략해온 지중해 연안의 여러 민족을 물리쳤으며, 팔레스틴을 침공하여 이스라엘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메르넵타 비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최초의 공식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메르넵타비문은 "이스라엘 왕국은 황폐하여 뿌릴 씨앗이 전혀 없다"는 승리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비문은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노출되어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Packer, 209-210). 이 시대의 문학적 산물로 유명한 것은 이집트의 두 형제 이야기(The Tale of the Two Brothers)를 들 수 있다. 두 형제 이야기는 19왕조 시대의 산물(1225 B.C.)로서 창세기 39장의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이야기와 유사하다.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고 결국 승리한다는 한 영웅의 이야기는 국제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로서 성서기자들이 이집트의 두형제(아누비스와 바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Matthew, 41-45).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된 이집트의 파라오 
메르넵타(1212-1202 B.C.)(BAR 90-5-26)








 20왕조(1,200-1,069)의 설립자인 셋낙트(Setnakht; 1,186-1,184)는 국가적 혼란을 정비하고 질서를 세우고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그의 아들 람세스 3세(1,184-1,153)는 신왕국 최후의 위대한 군주로 평가된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5년 째 되는 해에 나일 삼각주에 대규모로 침략해 들어온 리비아인들을 무찔렀다. 람세스 3세는 지중해 연안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바다민족 블레셋 족속에 대항하여 싸웠다. 메디네트 하부(Medinet Habu at Thebes) 신전에는 그의 승리를 보여주는 부조상들이 있다(Simpson, 281). 그러나 람세스 3세 통치 말년에는 행정의 비효율성과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정부가 왕의 무덤을 짖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제때에 식량을 배급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시위를 촉발하기도 했다(Baker, 77). 이런 와중에서 람세스 3세는 암살자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람세스 4세와 5세가 통치하는 동안에 다시 범죄가 난무하게 되었다. 전국은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었으며 서로 경쟁하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하기도 했다. 이 때 핀하시(Pinhasy) 장군이 누비아를 다스렸으며 왕궁의 곡물창고를 감독하는 군사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람세스 11세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아 이집트 정부를 새롭게 정비했다. 신왕국 말기(1200-1000)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으로는 서기관 "아멘엠오페의 교훈"(The Teachings of Amen-em-ope)이 있다. 이것은 고왕국시대에 기록된 "프타호텝의 교훈"과 함께 이집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혜문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전승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프타호텝의 교훈은 즉각적인 행동과 분명한 입장을 강조한 반면에, 아멘엠오페의 교훈은 부드럽고 말없는 지혜를 강조함으로써 지혜전승의 서로 다른 두 처신을 보여준다(Matthew, 189).
 누비아의 왕들은 왕이 되기 전에 아문의 대제사장이 되어 왕위를 얻는 초석을 마련하였으며 종교적 정치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이 무렵 팔레스틴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권이 형성되고 있었다. 다윗은 이집트의 혼란기를 틈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은 왕궁과 성전건축으로 인해 재정적인 고갈과 정치적인 약화를 초래했다.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에돔의 젊은 왕자 하닷을 본토로부터 몰아내자, 그의 부하들은 하닷을 이집트로 모시고 갔다(왕상 11:14-19). 하닷은 그곳에서 이집트 왕의 처제와 결혼한 후에 다시 돌아와서 솔로몬을 괴롭혔다(왕상 11:21-25). 이로 인해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내정을 간섭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참고. 왕상 3:1; 9:16; Packer, 214).

9. 제 3 중간기(1069-656 B.C.; 21-25왕조)와 알렉산더 시대까지의 이집트(26-31왕조)
 이집트의 제 3 중간기에 해당되는 21-25왕조는 람세스(Ramesside) 시대와 셋(Saith) 시대에 다양한 왕조가 존재했던 시대이다. 21왕조(1,069-945)는 왕권이 약화되었던 시기로 정치세력과 종교세력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였다. 아문(Amun) 신의 첫 번째 제사장은 종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어 혈연이나 결혼관계를 통해 왕가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22-25왕조 기간(945-656)은 일반적으로 리비아 왕조로 규정된다. 22 왕조의 쇼센크 1세(Shoshenq I; 945-924)는 르호보암 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한 시삭왕으로 알려져 있다(왕상 14:25-26).
 23왕조 말기에 이집트는 분할되어, 델타지역에 독립체제를 갖춘 몇몇 도시국가체제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하나인 사이스(Sais)는 테프낙티(Tefnakht)와 바켄레네프(Bakenrenef)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집트의 24왕조(720-715)가 형성되었다. 25왕조 기간에 이집트에는 리비아 족속 중심으로 귀족정치가 이루어졌다. 이집트의 제 3 중간기에 피라미드 식의 매장문화가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인해 멤피스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앗시리아 수도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인해 이집트는 다시 독립을 되찾았으며 이집트는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여력을 마련했다(Simpson, 291-292).
 셋(Saith) 왕조로 알려진 26왕조(664-525)는 삼틱(Psamtik)에 의해 창건되었다. 26왕조는 왕권의 강화로 인해 이집트 전역이 한 왕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외부 세력이 모두 물러난 시기이다. 셋르네상스(Saith Renaissance) 시대로 불려지는 이 시기는 이집트가 오랜만에 자체적 힘을 키웠던 시대이다. 삼틱은 다시 아문-레를 이집트의 국가신으로 확립하였다(Packer, 214). 이집트의 느고 2세(Neko II; 609-594)는 이집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신바빌론과 경쟁을 벌였던 왕이었다. 그는 앗시리아와 동맹하여 바빌론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가 유다의 요시야 왕과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연합을 저지하려 했던 유다의 요시야 왕은 므깃도에서 느고에게 패하여 전사하고야 만다(609년; 대하 36:4). 이로 인해 유다는 바빌론의 침략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함락당하게 된다(586년). 원정 나갔던 이집트 군대 역시 신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몇몇 사람만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느고의 군대는 시리아-팔레스틴의 남부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셋왕조의 토대를 굳건히 했다. 느고는 아시아에서 군대를 철수한 다음에 이집트의 상업을 발달시키고 해군을 증강했으며,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했다(Baker, 77).
 페르시아 시대의 27왕조 기간(525-404)에는 아람어가 이집트에서도 주요 언어로 통용되었다. 아람어를 통해 페르시아와 외교 및 통상활동을 전개했다. 이집트의 법률구조는 페르시아의 칙령에 의해 성문화되었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고유법률에 의해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마네토 왕조인 28왕조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28-30왕조(404-341)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로서 독립을 추구하려했지만 결국 알렉산더 대제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헬라제국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출처: 고대근동의 역사와 종교. 대한기독교서회, 2000. pp.3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