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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받아들인 범 교회적 신앙고백서 4가지 교회신경

은바리라이프 2012. 2. 18. 20:23

초대교회가 받아들인 범 교회적 신앙고백서 4가지 교회신경


초대교회가 받아들인 '범 교회적 신앙고백서' 4가지 교회신경(신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신앙고백 위에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이는 올바른 교회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신학의 발전과 함께 복잡해졌고 역사적 배경에 따라 그 표현의 강조점이 달라져왔다. 그로 인해 신학적 논쟁과 교파의 분열이 파생되었다.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로마 가톨릭처럼 개인적 성경해석을 금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 교파 간에 신앙고백의 다양성이 있다. 문제는 그 신앙고백이 성경에 얼마나 충실하며 역사적 검증을 거친 것이냐에 달려 있다.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의 제 9조에는 기독교회의 초창기에 만들어진 네 가지 문서를 신경(신조)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우리는 기꺼이 받습니다.(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반응이 신조) 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세톤 신경, 아다나시우스신경이다. 이 네 가지 신경이 교회 신조라고 불리는 것은 범 교회적으로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사도 자신들이 이것을 만든 것은 아니다. 다만 사도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 세례 시에 신앙고백에서 출발했다. 실제 사도신경은 세례 문답집 이었다. AD.100년쯤에 나오는 [디다케]에서 생수로 세례를 주라고 한다. 생수란 흐르는 물이다. 생수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상징하고 생명력을 상징한다. 당신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하면 물속에 머리를 넣고 꺼낸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세례에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는 보통 죄 씻음을 생각하지만, 초대 교회  의식에서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 중요했다.


사도신경은 모든 신경 중의  신경이다. 다른 신조들은 이 사도신경을 근간으로 해서, 발전된 것이다. 사도신경은 삼위 일체교리의‘놀라운 명확성, 탁월한 간결성, 신학적인 순서, 그리고 예배의 장엄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형태는 4세기 이전의 것으로서, 교회의 신앙의 상징으로 불려 질 수 있다. 실지로 초대교회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십계명을 고백했다. 종교개혁자들도 사도신경을 참된 신앙의 표준으로 생각했다. 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초대교회와의 연속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고 중세 교회가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개혁교회 전통도 사도신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개혁교회의 소 요리 문답을 보면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해설이다.


사도신경의 한글 번역은 성경 번역 완료 전에 선교사들이 조사의 도움으로 번역했다. 그 근거로는 독생자 대신 외아들로 번역한 것을 보면 성경 번역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예수님의 수난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말한다.


원문에 따른 한글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분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사흘 만에 죽은 사람들로부터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그리로 부터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와

사죄와

육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1). 현 사도신경의 한글 번역상의 오류에 대한 개선 점.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누락.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아버지 누락.

저리로서-그리로 부터, 

성령을 믿사오며-나는 성령을 믿사오며,

공회-공교회, 

성도의 교통-성도의 교제


2). 내용과 특색

① 사도신경은 삼위 일체적이다.(Trinitarian)-초대 교회 신앙의 핵심이다.

루터를 비롯한 대부분 개신교 신학자들이 3부분으로 나누었다. 전통신학은 삼위 일체적 관점에서 발전되어 왔다(신론, 기독론, 성령론). 성경에는 삼위일체 계시가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있다. 구약에서는 흔적은 볼 수 있지만, 신약처럼 명료하진 않다. 신약에서도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예수님의 세례시다. 즉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신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육신 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력이 우리 안으로 밀려오는 것이 성령 체험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은바  된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성부 하나님이  함께 임신 것을  체험한다.  곧  삼위 하나님이  체험적으로 느껴지고 깨달아진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만큼 정교한 삼위일체 교리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시대에도 누리지 못한 풍성한 삼위 하나님을 체험을 하고 살았다(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행전을 보라). 초대 교회의  사도신경은 성령 체험에서 온 것이다. 오늘날은 성도들이 삼위하나님을 삶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령 체험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으로 삼위일체를 주장하지만, 삶으로는 일위를 섬기는 것 같다. 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설명해 줄 순 없다. 다만 이론적 틀만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교리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성령 체험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삼위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피조계 안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예, 아버지/아들/남편, 삼지창, 달걀(노른자/흰자/껍질), 물(수증기,얼음,물), 빛(에너지,빛,열)etc.). 이러한 인간의 비유를  통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한다.


구원이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성령으로 연합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경륜이요 목적이다. 우리는 성령 체험을 통해 삼위일체적인 신앙으로 진입한다. 성령 체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누리고 있다.


② 사도신경은 예수 중심적(Christocentric)이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적인 내용과 구조를 취하면서 예수 중심적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항상 예수 중심적으로 계시하신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현대신학의 문제점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다원주의 신학(범신론)의 대부인 John Hick같은 사람은 "예수 중심적인 신학의 모델은 끝났고, 이제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 모델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역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 중심 신학으로는 부족하다.“는 잘못 된 주장을 한다.


예수 중심적이란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님에게서  잘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 중에서도 예수님보다 성령님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성령파). 예수만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내주하신다. 성령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완전히 이원화할 수 없다.


③ 사도신경은 성경기본 진리에  대한 직설적 해석이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핵심 되는 진리를 글자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대 신학의 주류는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현대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문자적, 여자적, 직설적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재해석하길 원한다(창조,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④ 사도신경은 성경적인 언어로 쓰여 졌다.

사도신경은 철학적인 용어가 아닌 성경적 언어로 되어 있다. 성경의 언어는 일상적, 사실적, 관계적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도 여전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런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른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그 고백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시대가 사조가 아무리 변해고 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변할 수 없는 기본 법칙, 참된 기독교 진리의 잣대가 사도신경의 특징으로 제시한 네 가지 법칙에 있다


2. 니케아신경

 

니케아신경의 원문번역

‘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의 빛이시오,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갖으신 분이시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서 우리를 취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는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광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님이 되시며, 생명의 공급자 되시는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셨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는 선지자들에 의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또한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나는 죄를 용서해주는 한 세례만 인정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바라본다. 아멘 '


A. 역사적 배경


니케아 신경은 교회가 최초로 에큐메니칼 공회를 거쳐 작성된 신조이다. 교회가 내린 가장 오래된 신학적인 선언으로서 325년 니케아 회의와 381년 칼케돈 회의의 결과이다. 니케아 신경은 사도신경보다 더 신학적인 체계를 이룬 신조로 발전되어 갔다.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파 때문에  생겨났다. 아리우스는 교회 사제였고, 인기 있는 설교자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성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고, 성부 하나님보다는 한 급수 낮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주의 주장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론적인 유일성, 초월성(Transcendence)을 강조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다른 인격체와 공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아리우스 골1:15, 히1:1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주장을 했다.


지금 우리가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리우스주의가 훨씬 더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리우스주의가 얼마나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는가는 당시 자주 불리는 유행가 중에서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유행가가 있을 정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여, 그대는 우리 마을의 대변자올시다. 성자의 친구여, 하늘의 택함을 받은 자여 학식으로 가득하시고 명성이 자자하시구려. 당신이 로고스 교리를 원하시면 뜨겁게 구워서 뜨겁게 드리리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낳기 전에 있지 않았습니다."(당시 유행가)


교리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리우스적인 이단의 오류를 답습할 수가 있다.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는 '여호와의 증인'이다. 그들도 예수님이 여호와보다 한 수 낮다는 주장한다. 그리고 단편적으로 성경만 알면 된다는 생각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리적인 이해와 선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성경만을 연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아리우스와 같은 잘못 된 해석, 곧 예수님은 성부보다 어느 정도 열등한 분,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격이 낮으신 분이라고 이해하고 싶은 충동을 쉽게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한 선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에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다.


아리우스 논쟁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종교적인 분쟁이 로마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불씨가 될까 하여 황급히 중재로 인해 니케아회의가 모였다. 318명이 모였는데 2명 빼놓고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 논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동방교회에서는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세력이 많이 존재했고,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도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아리우스는 출교 후 2년 만에 다시 복권된다. 황제를 배경으로 아리우스파가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리우스의 이단사상에 대항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다나시우스는 5번이나 유배를 당할 정도로 고난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381년 킬케톤 회의(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다시 정통파인 아다나시우스의 호모우시오스(μοουσιο, the same being or essence, 동일 본질) 교리가 재확인되었다.


B. 니케아신조의  내용적 특색


사도신경에 기초하여 사도신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신학의 네 가지 원칙과 특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삼위일체, 예수중심, 성경적 표현과 용어사용, 기독교의 기본적 항목을 문자적 직설적으로 받아들임).


①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도신경과 다르다.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본질론적으로 논의 하고 있다. 그 전에는 주님의 사역, 주님과 우리의 사역에 대해서 논했지만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하시냐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②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시작되었지만 니케아신경은 공의회의 산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도신경과 같은 단순한 신앙고백에서 니케아신경과 같은 교리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는가를 볼 수 있다. 아리안 논쟁을 종결지은 "호모우시아"는 성경적인 용어를 초월한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기독교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때문에 현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정통 기독론, 삼위일체론은 헬라철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C. 필리오케의 차이로 인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니케아 공의회 중에 성자에 대해서 호모우시오스(μοουσιο , the same being or essence, 동일 본질)를 주장하면서, 왜 성령에 대해서는 그런 표현을 강조하지 않느냐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모우시아라는 표현을 성령에게 직접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방측 교회에서 589년 Toledo회의에서,  "Spirit proceed from the father and the son." 'filioque(and from the son)'를 삽입했다.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이 동 서방 교회의 분열에 영향을 미쳤다.  동방교회는 필리오케를 삭제하고 있다. 우리는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른다. ....‘그리고 나는 주님이 되시며, 생명의 공급자 되시는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셨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는 선지자들에 의해서 말씀하셨다.’


서방교회의 신학 전통은 성령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에게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장점1) 예수와 성령이 긴밀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보혈과 성령이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성령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는 예수의 구속사역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바탕 위에 성령이 사역하신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아들의 영이다. 보혈의 공로로 성령이 사역하신다. 믿음 외의 다른 것을 구원의 조건을 얘기하면 구원론적인 이단 즉 율법주의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 보혈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이단이 된다. 서방교회의 신학 전통은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성령 충만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의 의미다.

(장점 2) 성령은 예수님 지상 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자신의 냄새와 색깔이 없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

(장점 3) 성경은 기독론적 성령론을 가르친다.


(단점1) 사역적인 면에서 성령을 예수께 종속시켜 버린다. 성령을 너무 예수그리스도께         도구적인  역할을 하는  분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단점2) 성령론이 발전하지 못한다. 성령론이 너무나 예수 중심적인 성령론으로 발전됨으로 말미암아 교회론적으로 구원론적으로 성령론이 축소되고 있다. 그래서 성령사역의 우주적 관점, 우주를 갱신하는 성령의 사역을 제대로 밝혀주지 못하는 한계성을 안고 있다.


동방교회의 신학 전통 : 서방교회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장점 1) 성령이 예수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성령의 독자적 인격성을 강조한다. 성령을  예수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우선적으로 본다. 동방신학은 주관적 측면을 강조한다. 성령을 예수의 도구적인 역할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독자적인 사역을 강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하므로, 구원의 영이면서 창조의 영으로 이해한다. 모든 창조의 영역 속에서 역사하시고 임재하시는 우주적인 성령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장점 2) 신학에 있어 성령론이 기독론에 종속되지 않는다. 성령론의 독자적 발전에 기여했다.


(단점 1) 동방신학에 내포된 위험성은 예수와 성령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와해시킬 수 있다. 성령의 예수중심적인 특성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단점 2) 동방신학의 단점은 성령론이 기독론으로 통제가 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독립적인 성령론으로 치우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게 된다. 성령중심적인 성령론, 하나님 중심적인 성령론으로 흐르는 위험성이다. 현대신학이 안고 있는 위험성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필리오케'의 한 구절로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의 특성이 결정되어 버렸다.

동방신학은 주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영성신학이 발달했다. 그러나 서방신학은 객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곧 성령의 가장 입체적인 사역은 그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방측의 신학은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체험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런 서방신학의 약점에 대응해서 나타난 운동이 경건주의 운동(Holiness), 곧 성령운동이다. 서방 교회의 흐름은: 성부-성자-성령, 동방 교회는 성부-성령-성자의 경향이 있다.


3. 칼세돈 신경


 칼세돈 신경에 요약된 기독론적 내용의 특색

니케아 신경(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다)을 재확인 하였다면,  

칼세돈 신경은 그리스도의 본질과 인성에  대하여 확인한 것이다.

① person과  nature를 구별했다.

nature(본질)은 신적이고 인적이다. (nature란 것은 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 속성을 가리킨다.)

person(인격)이라는 것은 신적인가? 인적인가? 신적:100%, 인적: 100%인가?

※신적인 인격체(divine person)가  본래 신적인 본성(divine nature)을 지니고 있었는데, 인적인 본성(human nature)도 취하셨다.

② 본질(NATURE)과 인격(PERSON)의 두  본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부정적 선언(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는 사실이다.)

without confusion(혼합 없는), without conversion(전환 없는), without separation(분리 없는) without division(나뉨 없는)

긍정적 선언

personal union, hypostatic union(인격적 연합)

Divine Person + Divine Nature ( + Human Nature )

The Doctrine of anhypostatic : 예수님의 인성은 신적인 인격 안에서만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의 인성은 impersonal하다.


4. 아다나시우스 신경


 아다나시우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정통주의 수호의 상징인 그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 신경이 철저히 정통교리에 입각한 신조라는 것을 표방하기 위함이다.  1-28절의 내용은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교리를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고백되고 있는 삼위일체론은 니케아 신조에 나타난 삼위일체론보다 진보된 것으로서 어거스틴의 입장과 일치한다. 29-41절의 내용은 기독론이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기독론은 칼세돈에서 채택된 기독론과 비슷한 입장이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짧은 문장이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는 형식이며, 시문구와 같은 아름다운 문형(文型)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경에 진술된 삼위일체론, 기독론을 배척하는 자는 영원히 배척되고 망하리라는 저주문(anathema)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는 이단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주문 때문에 이 신경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