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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트 신경 - 개혁주의 교회의 3번째 신조

은바리라이프 2012. 2. 18. 20:20

돌트 신경 - 개혁주의 교회의 3번째 신조

 

1. 돌트 신경의 역사적 배경

 

17세기 초 화란의 개혁교회 안에 일어났던 알미니안 교리 논쟁이 발단이 되어 작성된 신경이다. 알미니안 교리의 중심인물인 알미니우스는 제네바에서 칼벵의 제자인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그는 15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베자에 의해 이해된 칼벵의 가르침이 실제 삶 속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해 칼벵의 가르침에 반론을 제시했다. 그는 칼벵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과 예정론에 대해 반박했다. 이에 대한 논쟁 때문에 1610년에 돌트 총회가 열렸다. 그 총회에서 알미니우스의 주장(알미니안주의)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교회역사 속에서 알미니안주의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감리교 안에도 알미니안 요소가 있고, 많은 개신교 목사들의 설교 속에서도 알미니안적인 요소가 발견된다.

 

II. 돌트신경의 5가지 강조 내용

 

1).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다(Unconditional Election).

알미니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미리 내다보시므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는 믿을 자들을 미리 내다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 구원은 완전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칼빈주의 주장은 선택된 자들에게 큰 위로를 주고 동시에 겸손을 요구한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이 선택을 안 해주셔서 믿을 수 없다.'말한다면, 그 대답은 '누구든지 믿

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 그러므로 빨리 믿으십시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 사람들은 '왜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고 어떤 이는 선택을 받지 못했느냐?'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의 주권적인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적 선택은 사람의 뜻에 따라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전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서 출발한다. 완전히 부패한 인간은 원칙적으로 모두 멸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패한 인간을 모두 구원하실 책임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부패한 인간은 다 멸망해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선택을 받았으니 오직 감사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 받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로써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국 그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그만 열매라고 맺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을 맺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사실에 담대하게 확신을 가질수 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제한적인 속죄의 사역이다(Limited Atonement).

알미니안주의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 속죄론(universal salvation)을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제한적 속죄론을 주장한다. 곧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의 사역에 유효하다고 말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하시기에 충분하시다. 칼빈주의는 속죄의 효과는 선택 받은 자들에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제한적 속죄와 보편적 속죄의 뜻이 모두 들어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피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속하셨고, 그 구속의 효과는 모든 사람의 구원에 필요 충분한 조건이 된다.

 

3).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전적인 부패란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영적인 선이 전혀 없는 무가치한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죄는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의 고백처럼 시편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전적으로 부패해서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완전히 무능력하게 되었다 즉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없다.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결단코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우리 모두는 복음의 자리로 나갈 수가 있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알미니안도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를 말하지만, 이 은혜를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선택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끝내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녹이셔서 결국 하나님의 참을 수 없는 사랑으로 설복시키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결과로 강퍅한 마음이 자원하는 심령으로 변화된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알미니안은 한번 은혜가 주어진 후에도 구원의 은혜가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은 연약한 신자를 끝내 붙드셔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신앙치 않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신앙해야 한다. 믿음을 주신 주님만이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성도의 인생길은 항해와도 같다.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방주 안에서 성도는 항상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밀려오는 미움과 다툼, 세상의 유혹과 실수에 멀미도 하고 토하기도 한다.

넘어지고 낙심되어도 여전히 성도는 하나님의 방주 안에 있음을 알고 있다.

방주 안에 있는 성도는 아무리 험한 파도에도 자신들이 분명히 자신들의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방주는 이미 '영혼의 닻'(히6:19)이라는 십자가에 굳게 견인되어 천국 항구에 매여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