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가 되어도 젊게 사는 방법이 있단다. 바로 분노할 일에 분노하고 기쁨을 느끼면 살면 된다고 한다. 그는 93세의 나이에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며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저항정신은 그 자체가 젊음이다.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면 사춘기 전 후가 가장 저항을 많이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이유 없는 반항기’라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이 시기를 넘기면 기존 질서인 사회에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더물게 이성적으로 저항논리를 체계화한 사람의 경우 40대 쯤이면 저항정신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발휘하면 감옥에도 가고, 가택연금도 당하게 된다. 그들도 인생 70이 되면 세상을 조용하게 관조하며 살아가는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93세의 노신사가 그가 남은 인생의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며 젊은이들에게 저항정신을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바로 나치 정권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였던 스테판 에셀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절박했기에 유언처럼 그의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려고 했단 말인가?
그는 독일 베를린 출생이면서도 프랑스로 귀화한 뒤 독일의 나치즘에 저항했고, 유태인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무자비한 적대행위를 세계인에게 공개비판하고 나섰다. 그의 인생은 ‘깨어있음’ 그 자체이다.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도 ‘깨어있음’에서 시작된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과 더불어 아무런 생각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빚어내는 불평등과 불행에 누군가가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의 물꼬는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지게 된다. 불평등과 불행에 관심을 가진 다는 것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자비심에서 출발한다. 그런 만큼 이런 자각을 가진 자들의 행동은 생명력이 길어지리라.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 저항하라.”고 호소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이익을 위한 분노와 저항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위해 자비심을 발휘하라는 의미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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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2011)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구체적으로 실천방안까지 명시한 이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오늘날 행동하는 소수가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겐 반죽을 부풀릴 누룩이 생기는 셈이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커다란 도전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놓인,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격차. 둘째,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
테러리즘은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