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모은 건 ‘정의 이후’였는데, 독자들의 선택은 정의에 대한 사회 관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처지를 돌보는 쪽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보이는 젊은 세대의 호응은 공적인 관심과 사적인 고민 사이에 놓인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던지는 조언과 위무의 수신자이고자 했다. 사적인 고민에 매몰된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홀로 선’ 청춘들이 공감의 공동체로 묶일 가능성도 주어지는 것이니까. 그 공감이란 ‘아픔’이다.
ⓒFlickr 에셀은 ‘분노하라’고 호소하면서도, ‘격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
그리고 그 아픔이 ‘사회적 고통’이기도 하다는 인식까지는 한 걸음이다. ‘반값 등록금 투쟁’은 우리 시대 ‘사회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시험대이다. 그것은 대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다. 대졸자가 80%를 넘어가는 사회에서 등록금 투쟁은 곧 사회 전체의 투쟁이다. 단순히 ‘반값’의 쟁취가 핵심인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사느냐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이러한 고민과 투쟁에 힘을 보태는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로 읽힌다.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가 넘게 팔린 이 소책자에서 1917년생 레지스탕스 투사는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과거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세상에서 비켜났다고 비판한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며, 노동이 창출한 부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이 스테판 에셀 같은 이들이 기획한 사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없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사회’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한 에셀은 분노를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격분을 경계한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이며 그 격분의 한 표출 방식이 테러리즘이다. 그가 테러리즘 같은 폭력적인 수단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효과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적인 투쟁과 평화적인 봉기를 권유한다. 그가 유일하게 허용하는 폭력은 희망의 폭력 혹은 폭력적인 희망이다.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빌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93세의 노투사가 희망을 노래한다면 우리에게도 절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