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로이드 존스

성탄절과 현대인(Christmas and Modern Man)

은바리라이프 2010. 12. 22. 16:32

성탄절과 현대인(Christmas and Modern Man)

Ⅰ. 들어가는 말
Ⅱ. 성탄절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궤계
    1. 말씀으로 말씀을 희석시킨다
    2.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성탄절
   1. 하나님의 역사를 반복해서 선포하라
   2. 세상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 행하심
   3. 육에 속한 사람은 성탄을 이해할 수 없다
Ⅳ.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지혜
   1. 인간의 실패를 드러내신다
   2. “너희는 참된 지혜를 알아보지 못한다”
Ⅴ. 위대하신 하나님의 지혜: 마구간과 십자가
Ⅵ.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오늘 저녁 여러분들께서 주목해주기 바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장 20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저는 특히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는 구절을 다루고 싶습니다. 저는 이 강단에서 우리에게 필요하며 기독교인이라면 우선적으로 가질 만한 질문을 여러분과 함께 추구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구원자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분을 믿지 않습니까? 이 세계는 곤경에 처해 있으며 불행과 실패와 실망이 가득합니다. 모든 해결책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공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놀라운 메시지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 메시지는 성경에 있으며,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점은 이러한 곤경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은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그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이며 순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에 대해 실제적이며 유일한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행하지 않는 이유는 마귀(the devil)때문입니다. 이것만이 성경에 나타난 유일한 대답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했고 파멸에 빠뜨렸습니다. 그때 이후로 마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해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에는 큰 투쟁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항하는 찬탈자 마귀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공격하며, 마귀의 유일한 욕망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무산시키고, 그 대신 마귀 자신의 나라를 세우며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가장 첫 부분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일에 끼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마귀는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시킨 이후로 계속하여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을 때, 그 가운데서 마귀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보십시오. 마귀가 어떻게 가만히 들어와서 은근슬쩍 의심을 품게 하는 방법으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하여 사람이 우상숭배 등의 많은 범죄를 하게 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너무나 자주 한심하고 슬프고 비참한 실패입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마귀가 행한 일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말씀에 따라볼 때, 마귀가 공격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은 명백하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Ⅱ. 성탄절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궤계

 

1. 말씀으로 말씀을 희석시킨다

그 한 가지 방법은 마귀가 매우 공개적이고 분명한 시도와 전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때로 마귀는 왕들과 그 군대를 일으켜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학살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우리 주님께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마귀가 헤롯왕을 통해서 그분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마귀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헤롯왕이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분을 파멸시키려고 힘을 다해 애썼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때로는 마귀는 이처럼 무력을 동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잡혀서 처형되며 공정한 재판을 받지도 않고 학대당하거나, 군대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여 싸우며 학살한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때로 마귀의 공격은 매우 공개적이고 노골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력을 지닌 정사와 권세들이 기독교 사역과 그리스도인들을 실제적이며 물리적으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가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다른 공격 형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형태의 공격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비난하거나 대적할 때, 그것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것을 말로 분명히 드러내며, 모든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밀스러우며 잘 드러나지 않고 미묘한 형태입니다. 때로 마귀는 이러한 공격 형태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때로 마귀가 말씀을 자기의 의도대로 골라서 사용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마귀가 때로 빛의 사자로 가장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마귀는 말씀을 인정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뿐입니다. 물론 마귀는 정말로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마귀는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척 할 뿐 입니다. 마귀는 말씀을 굉장히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기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귀 자신의 방식과 형식으로 그렇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말씀의 참된 의미와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그 사이에 끼여듭니다. 

 

2.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저의 이 말에 모든 분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는 이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여 명백히 성탄절의 의미를 바꾸었습니다. 마귀는 말씀의 의미를 바꾸어서 성탄절의 메시지를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와 갈보리 언덕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성탄절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별과 구유,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성탄카드를 보내면서 성탄절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즉 성탄절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기분 좋으며 유쾌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간에 정답고, 친밀하며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시간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그 선량함에 대해 얘기합니다.

 

성탄 기간의 신문이나 카드 등을 읽어보면, 결론적으로 그 메시지는 ‘사람이 최상의 상태일 때’(man at his best)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기분이 좋은 때입니다. 때로 인간은 문제에 처할 수 있으며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에서든 화난 상태에 있을 수 있고 처신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탄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화목하고 명랑하며 친절합니다. 원수가 용서되고 과오가 잊혀지며 모든 사람이 다함께 행복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런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 모든 이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갖는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제가 과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밤에 세상이 성탄절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이 성탄절의 메시지라는 인상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일으키는 존재는 다름 아닌 마귀입니다. 마귀는 성탄절을 받아들여 자기 나름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이용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 20절에 따르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의 참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탄절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세상에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즉,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 신문에 탁월한 논설과 글을 쓰며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쟁자,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성탄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러한 자를 불러내어 앞에 세우고 자신을 변호하라고 하는 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과 이 세상에 대해 도전할 뿐 아니라, 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을 낮춥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낮추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높이거나, 최상의 상태일 때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절의 메시지는 세상을 겸손하게 낮추며 거의 비웃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성탄절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이것이 성탄절에 일어나는 일이며 성탄절의 깊은 뜻입니다. 즉, 이 세상의 지혜와 허세와 영광을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문에서 여러분이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며, 세상이 성탄절을 축하하는 방법과는 정반대입니다. 이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실 것 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간단한 원리를 통해 이 문제를 더 풀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역사를 반복해서 선포하라

사도 바울은 성탄절의 메시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계속하여 선포하고 반복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0-25).

 

이 부분에서는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성탄절의 메시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데 대해 다들 동의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저는 그에 대해 확신하며 주저하지 않고서 말합니다. 이 전체 문단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성탄절에 대한 하나님의 유머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시편에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을 기억히십니까?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인간들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하늘에 계신 자는 웃으십니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의 유머감각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뒤엎으시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의 메시지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선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인간적 관점에서 성탄의 메시지를 표현한다면 우리는 성탄의 근본과 기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영광은 이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높여서 자신을 속량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역사하시는 분은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이라서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가장 소중하고 멋진 이 선물을 간과하고 사람들 간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 말할 수 없이 귀한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너무나 관심을 집중하는 나머지, 인간의 새로운 정신이나 지식을 추구하기에 바쁘며 항상 인간적인 수준에서만 일하려 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어버립니다.

 

만약 이천 년 전이라는 역사상의 특정 시기에 이 중대하며 믿기 어려울 만큼 굉장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성탄절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그 분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아들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베들레헴에서 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2. 세상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 행하심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 성탄의 밤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이 세상의 지혜와는 일치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사도 바울이 17절부터 그 다음 장 끝까지 전체 문단에서 계속하여 묘사하는 내용과 완전히 상반됩니다. 그 문단의 내용은 성경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일은 인간의 이치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 인간의 지식, 인간 철학과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과는 상충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수준에 맞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인간의 수준에 맞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으면,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우매함의 본질이며 이제 그것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성탄절의 이 일은 인간의 기대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전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 일은 역사상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독특한 역사였으며 어떠한 범주 안에도 구별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일들을 어떤 무리로 나누어 구분해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예수님, 모하메트, 기타 등등을 같은 범주로 묶어서 구분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름들은 이렇게 하나로 묶여질 수 없습니다.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 땅에 속한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그 범주에 속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탄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성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기적적인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이란 말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적이며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었더라면 저는 오늘 이 강단에 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는 단지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일들의 선포자이기 때문입니다. 제 신앙과 믿음의 기초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초월하여 어떤 일을 행하졌습니다. 한 아기가 처녀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 처녀는 남자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설명하거나 그에 대해 변명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며, 그것을 강력히 주장할 뿐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녀에게 임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은 기적이며 전부가 이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해 계속 말하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그전에 일어난 적이 전혀 없었던 일이 여기 있습니다. 한 아기, 한 아들이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 일 전체가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기가 자라서 사역할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현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런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과학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견해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 말에 대해서는 수많은 대답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일례로 현대의 과학자들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많은 사실들을 믿고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견해들과는 완전히 달리, 하나님께 대해서는 여러분이나 제가 그분을 이해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정의(定意)에 있어서 우리의 이해를초월하는 분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모든 개념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난감하게 하는 일들을 행하셨지만 그 일은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그런 방법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사실(fact)이며 우리의 의도에 따라 고쳐질 수 없으며 그 자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분류하는 어느 한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겉으로는 아주 평범해 보입니다. 거의 매일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저 평범해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축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닌 복음의 핵심이며 시작입니다. 만약 지금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그 자신의 노력이나 저의 노력이나 심지어 전 인류의 노력을 통해서라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지 물어온다면, 그것에 대해 가장 심각한 비관론자가 바로 제 자신이라는 것을 기꺼이 동의합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모든 일이 절망적일 것이며, 저는 강단에 서지 않고 다른 일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주목해보십시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능치 못하신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소망이 없다고 느끼셨던 분이 있으십니까? 또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끔찍한 죄악에 빠졌는데 아무도 그를 자유케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느끼셨던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탄의 사건이 기적적인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복음이 인간의 체계나 인간의 철학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3. 육에 속한 사람은 성탄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로 세 번째 원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세상은 방금 말한 두 번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하며, 2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고 반복해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성탄의 메시지가 아주 당황스럽다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그것은 이 성탄의 메시지가 정말로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성탄의 메시지에 대해 한 번도 어려움을 느껴보신 적이 없으신다면 그것은 성탄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아이들의 동화책이나 옛날이야기에서나 가능하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해주지만 현실적이고 힘들며 거친 삶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체의 메시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정직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임신하는 특별한 은혜를 누렸던 마리아조차도 천사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와서 그 사실을 말했을 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기를 임신한다고요? 저는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데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은 저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의도가 뭔가요?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저는 처녀입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임신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주장은 올바른 것이지 않습니까? 그 논리는 절대적으로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녀는 오직 인간적 견지에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인 일이나 철학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적인 일이자 초자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불가능할 수 있습니까?

 

마리아의 질문에 대해 천사는 단 한 가지 대답만을 했는데, 그것은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었으며 사실적인 선언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마리아는 아기를 임신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거듭남을 알 수 없었던 니고데모의 예

니고데모를 기억하십니까? 그도 똑같은 점에서 실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분이 위대한 선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허풍을 떠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니고데모가 비웃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당신이 가르치신 말씀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고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신 게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는 당신이 행하셨던 이런 기적들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었을 때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너무 터무니없고 비과학적이며 분명히 허튼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인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이스라엘인이고 나이 들어 연륜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제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 다음 니고데모의 말에는 교묘히 비꼬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변사인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변사는 그 자신의 논리나 제한된 지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 안에 제한됩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5-8).

 

바람에 관련된 현상은 볼 수 있지만 그 존재 자체는 눈으로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사람이 영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기적이며 육적인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이며 사람이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 역사는 단지 사람의 범주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이 중요시 하는 것을 헛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순간 여러분들의 신앙을 테스트해보고 싶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진 신앙 때문에 당황스럽게 되거나 어려움에 처하게 된 적이 없었다면, 여러분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단지 도덕, 훌륭한 삶, 남을 돕는 것, 성탄절에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거기에는 당황스럽거나 어려움을 주는 요소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이해범위 안에 있으며, 아무에게도 위협을 느끼게 하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어리석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러한 것을 높이고칭찬합니다. 그러나 참된 성탄의 메시지는 참 어리석게 보이지만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Ⅳ.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지혜

이제 마지막으로 말할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탄에 행하신 역사는 인간의 지혜와 부합되지 않고, 인간의 지혜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할 뿐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게 합니다. 다시 “지혜 있는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는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성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이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고 우습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일을 행하셨습니까? 이제 그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1. 인간의 실패를 드러내신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란 철학이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아주 진실되게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동안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의 한 면을 발견하긴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들의 명성을 손상시키고자 하지 않고 그들의 명성을 100퍼센트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지 못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살아계시며 유일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신을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능한 사유(思惟)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애씀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를 매우 자랑합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철학에 대해 자랑합니다. 자신의 두뇌 즉 사고의 역량에 대해 자랑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인간은 “내게 불가능한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실패한 일도 있습니다. 성탄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가 강조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어 보이게 하시며 그 실패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2. "너희는 참된 지혜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제 두 번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는 두 번째 방법은, 세상이 참된 지혜를 볼 때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위대한 지혜, 심오한 지식을 가진 자들로 자처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며. 그 야만인들은 생각하지 않고 철학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인들 자신은 지혜와 지식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직 지혜만을 믿으며, 그것을 볼 때 인식하고 찬사를 보낸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지혜가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것을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혜가 어리석은 것이 되었습니다.

 

간단한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미술적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소중히 여기는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미술공부에 쏟아 부었고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등 온 세상의 화랑을 다니며 위대한 예술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장의 작품을 보면 작가의 서명을 보지 않고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러분이 그의 지식을 시험해 봅니다. 여러분은 많은 그림들을 걸어놓습니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거장의 작품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아마추어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이름을 가립니다. 그 작품들을 그의 앞에 전시해놓고 “이 작품들 중 어떤 것들이 훌륭한 것들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저 작품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작품은 렘브란트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마추어의 작품이군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한 일이 그를 어리석어 보이게 했다고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미술의 전문가라고 하면서도 거장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가 자부하는 전문가적 식견이 작품을 분류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미술을 감상할 줄 아는 안목이 없고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전문가인 체했으나 진품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볼 줄을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듣는 사람이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하는 정교한 비유를 통해 훌륭하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시요 지혜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임금 마귀는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람. 이 목수가 도대체 누구인가?그가 하는 말은 터무니 없는 헛소리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이 순간에도 그와 같이 비웃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탄절은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합니다. 사람들은 모사(謀士), 철학자, 사상가들의 의견에 자신들의 믿음의 근거를 둡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탄을 통해 세상의 지혜가 얼마나 헛되며 실속이 없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지혜를 볼 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철학자들이었고 사상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세상의 위대함

이제 여기에서 더 깊이 나아가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고 우리의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이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세상이 특정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태생의 고귀함, 지혜, 힘. 권력 등을 위대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위대함에 대해 갖는 개념입니다. 즉 유명한 이름에 관심을 갖지 그 사람 자체의 인격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의 사람됨에 관심을 갖는 대신, 그가 훌륭한 가문 출신이면 세상은 그에 굴복합니다. 그 사람 자체는 바보이거나 그 정신력이 평균 이하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시되지 않습니다. 유명한 이름과 고귀한 신분의 출생이 중요시됩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이 세상은 지혜와 두뇌의 능력과 지력, 영리함, 출중한 지혜. 사고와 말에 있어서의 지혜 등을 숭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이 항상 동경하는 것은 힘과 권력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갖게 되면 그는 권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그에게 굴복하고 그는 권세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인정받아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많은 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학을 보자면 그는 미련한 자일수도 있지만 돈을 갖고 있으면 돈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돈은 지배하는 능력이 있으며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세상은 그러한 의미의 힘을 믿습니다. 물리적 힘, 지위의 힘 등이 위대함을 판단하는 기준들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그러한 각 방면의 인간의 위대함을 다 합한 것보다 분명히 더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려고 하셨다거나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려고 하셨다면, 그분께서는 천사를 앞서 보내시며 영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구름을 갑자기 가르시고 눈부신 영광으로 압도하시며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그분을 자세히 보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강한 군대를 호령하시고, 능력과 권세가 무한하시며, 그분의 지혜와 학식과 지식은 모든 철학자들을 무한히 곱하여 합한 것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V. 위대하신 하나님의 지혜 : 마구간과 십자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방법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궁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멋진 건물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면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탄생하신 곳은 마구간 안이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하늘나라에서는 웃음이 터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시다니요! 짚단과 노새들, 가축들, 소들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나타나지 않으셨고. 처녀의 태를 통해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왕의 궁전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것은 여관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와 화려한 광경, 영광을 전혀 드러내시지 않고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하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지실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철학적 학파의 지도자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그분은 목수이셨고 친히 그 손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으로 훈련을 전혀 받지 않으셨고, 철학이나 바리새인들의 규례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군대를 갖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가 명사(名士)라고 부르는 특별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전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분께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인생 말기에 너무나도 연약하고 무능한 가운데 체포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에 못 박히셨습니다. 위대함과 지혜에 대한 인간의 개념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일들은 실족케 할 만한 일들일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미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규칙에서 벗어나며 완전히 터무니없고 황당무계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고 우매하게 하기 위해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이었고,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며, 부활이 그것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 모든 것을 거부했고 오늘날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위대하다고 자처하는 지혜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VI. 나오는 말

마지막으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심으로써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루려고 했던 일은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는 일이었습니다. 또 세상은 죄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축복되고 거룩한 삶에 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죽음의 본질을 간파하고 죽음 이후의 삶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모든 분야에서 인간들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일들을 정말로 성취하셨습니다. 30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하셨는데,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보고 이해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의와 용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세상의 변사들, 지혜 있는 자들, 선비들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저도 여러분께 도전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까? 어떤 일을 떠올리게 될 때 양심이 우리를 고소합니까? 아니면 평화가 있습니까? 이 세상을 다 돌아다녀봐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어봐도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었을 때, 나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저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나의 의(義)가 되십니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그분만이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의와 거룩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떻게 미련케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거룩함과 내적인 정결함에 대한 추구를 하지만, 세상은 그 일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께서는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했던 부분에 그분께서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고전1:27-29).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실패한 일을 그분께서는 능히 이루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속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무덤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여행에 대해 두려워하십니까? 누가 그런 일에 있어 여러분께 빛을 비춰줄 수 있습니까? 단 한 명의 철학자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 모든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다 위대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은 사후의 삶이 환영과도 같다는 개념을 가졌습니다. 그 사후의 삶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배회하는 환각과도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그것은 정말로 침울한 느낌을 주며, 그들은 사후의 삶에 대해 정말로 알거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했고 위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복음을 통해 생명과 영생에 대해 분명한 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이기셨고 천국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실패한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일은 이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올바르고 또한, 누구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효과가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철학은 보통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 제 말을 듣고 계신 분들 모두가 그리스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이해할 수 있는 두뇌를 가져야 하며, 여가 시간이 있어야 하고, 특정한 책들을 읽을 능력이 있어서 관련된 논쟁들을 이해하며,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철학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면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명성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그분께 등을 돌리고 비웃었을 때, 많은 무리와 죄인들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애썼으며, 그러한 일이 인간의 역사를 통해 계속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방법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회중이나 런던 시내에 얼마나 악한 죄인이 있든지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아주 심각한 범죄로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졌을지라도, 죄와 음주와 악행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 설교로도 여러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시며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조주이시자 하나님의 능력 이신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자신을 너무나도 자랑하지만 그 지혜로 이룬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 지혜는 "나는 지식으로 가득하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며 아무도 올바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그들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미련하게 보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녀의 모태로부터 아기로 태어나고 마구간의 말구유에 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절망에 빠지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마지막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지혜를 깨닫습니까? 오늘 이 순간 여러분이 가진 견해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철학입니까? 과학입니까? 어떤 정책입니까? 예술입니까? 문화입니까? 당신의 인생의 기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 행한 일에 기반을 두거나, 온전한 하나님의 지혜에 기반을 두거나 둘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첫 번째 성탄절에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간들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께 용서를 베푸시고, 거듭남과 새로운 본질을 주시고, 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그 환경으로부터 여러분을 들어 올려서 하나님께로 구별시키시며 결국 이 세상과 죽음을 이기게 하십니다. 또 그분 자신께로 우리를 받아들여 영원한 영광에 참여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보고 계십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지혜가 정말 미련함이요 확실히 실패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뿐 아니라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혜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를 등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서 지혜롭고자 하는 자는 지혜롭게 되기 위해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성탄절에 태어난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또한 우리는 그분이 돌아가셨고 그 피가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게 되었다고 믿는것 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미련한 자가 되면 여러분은 지혜롭게 됩니다. 그 지혜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며,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큰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할 것이며, 그 영광가운데 영원한 하나님의 지혜를 더욱더 알아갈 것입니다. 아멘!

 

성탄절과 현대인(Christmas and Modern Man)-마틴 로이드존즈 (The Band of Puritans)

 

'영성 > 로이드 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 묻은 십자가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0) 2018.01.04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마지막설교  (0) 2017.12.31
기독교의 도전  (0) 2010.12.22
기독교  (0) 2010.12.22
목사  (0) 201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