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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부활절 전 금요일)의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무능함을 기억한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그래서 일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능력은 약함과 겸손, 사망에서 찾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칼을 휘둘러서도 안 되고 분노하거나 공격적이거나 강하게 행동하거나 무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모든 상황에서 온유함과 긍휼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 윤리라고 주장한다.
한편 고난주간은 부활절로 막을 내린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정복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전능함을 보이셨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이 믿음과 소망, 그리고 다소 공격적인 사랑에서 능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미 승리자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삶에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할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소망을 가지고 활기차게 공의를 행한다. 거룩한 능력으로 권세 잡은 자들을 물리친다.
고난주간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형태의 악한 것을 물리치는 권세를 주셨다(마 10:1).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어야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가진 놀라운 분이다. 창세기의 도입부를 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계시록의 마지막은 또 어떤가?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성경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능력의 신성을 말한다. 아무런 도구 없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분은 바벨의 오만한 행위를 파괴하시고 단산한 사라의 태에 생명을 창조하셨다. 성경의 하나님은 기근과 재앙을 내리시고 물을 가르고 군대를 파멸시키신다. 자기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며 그 요구가 묵살되면 다른 민족을 일으켜서 망명의 시기를 보낸 백성을 이끌게 하시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백성을 예정된 땅으로 돌려보내신다.
하나님은 힘들게 수고하거나 땀을 뻘뻘 흘리지 않고도 놀라운 능력을 보이신다. 시편 기자의 말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잉태의 기적과 모두의 예상을 초월하는 부활을 행하셨다. 인자의 탄생에는 천사의 군대가 함께했다. 인자의 삶에는 눈먼 자가 앞을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귀신이 쫓겨 가고 죽은 자가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권세가 무엇인지 이해했던 로마 백부장은 직관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종을 고치려고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자 백부장은 그러실 필요 없다고 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6-8). 백부장의 말에 놀란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 백부장에게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검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당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역하던 당시에는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매우 많이 닮아 있었다.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에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 40:10).
요한계시록에서 람보처럼 힘을 발휘하시는 예수님은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치시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적힌 옷을 입으셨다(계 19:15-16).
초대교회는 믿음을 글로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권세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경외감과 찬양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비탄을 일으키기도 한다. 능력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실망하신다. 그러나 비탄의 고백들을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의 부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대에 만연한 불의를 보면서 통곡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 1:2-4).
요약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간절히 필요한 시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간구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수많은 악을 허용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능력을 갈망한다. 그러다 결국 이렇게 의심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은 게 아닐까?
신약성경을 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무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누이셨다.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기적을 행하는 것도 거부하셨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마 4:8)을 제시한 마귀의 제안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부당함 앞에서도 보복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다른 뺨을 대고 오히려 더 섬기라고 가르치셨다. 이런 모습만 보면 전능함보다 무력함이 먼저 떠오른다.
왼손잡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두 손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이라고 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를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구하신다고 했다(시 20:6). 출애굽기를 보자.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 15:6).
이와 대조적으로 레슬리 차드 신부는 “하나님의 왼손”이라는 글에서 왼손의 권능을 설명했다.
더러운 외양간에 놓인 간이침대에 아기가 누워있다. 그 앞에 오른손으로 세상에서 지혜와 권능을 행사하는 왕들이 무릎을 꿇는다. 그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오른손의 생각을 뒤엎으실 메시아다. 그는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하면서 오른손의 생각을 가졌던 야고보와 요한을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 부르며 책망하신다. 그는 천사의 군대를 불러서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오른팔에 검을 든 베드로의 도움도 거절하셨다. 그는 자신의 강한 오른팔로 적들을 무찌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이 불가피하다면 내가 당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능력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자도 힘이 있었으나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능력 운운하거나 하나님과 능력의 오른손을 연관시키는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십자가에 최고의 가치를 두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권능을 사용하신 여러 사건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고 폭풍을 잠재우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바울의 말이다.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면 능력의 오른손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왼손의 능력까지 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극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이 발휘되어야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능력이 지닌 본질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일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고통과 죽음 가운데서도 드러났다. 외견상으로는 패배했으나 실은 승리의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연약해 보이는 순간에 가장 전능하셨다.
우리의 의문이기도 한 하박국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세상을 보면서 왜 가만히 계시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세상의 고통은 곧 그분의 고통이며 하나님의 고통은 언제나 구속의 고통이다. 쓰나미나 에이즈를 보면 하나님이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그 시간은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하나님의 두 팔이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이다.
양손의 사랑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 전능함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분의 말씀을 보자.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전혀 없다. 무력함조차 하나님의 힘을 약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 미리암과 마리아, 다락방의 제자들처럼 영광과 권능, 기적과 능력의 순간 속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말세에 하나님은 연약함 가운데 그분의 권능을 보이기로 작정하셨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매우 흥미롭다. 하나님이 이 모든 혼란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굳이 역사를 파헤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일부러 역사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숨기셨다. 일부러 연약함과 무력함, 부재를 선택하셨다. 탁월한 마케팅 전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하신 이유를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어려움에서 마법처럼 우리를 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수준의 믿음을 넘어서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생각은 건강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 풍성한 삶으로 이끄는 10가지 방법의 하나님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신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가 경배하는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내 삶, 내 문제, 내 행복에 대한 종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함을 아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능력에 대한 이해를 넓히신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그분의 역설적인 능력을 실천하도록 부름받았다.
따라서 왼손, 곧 십자가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부르실 때가 있다. 모욕적인 발언을 한 동료에게 보복하지 않고, 배신한 친구를 용서하며, 기독교를 경멸하는 단체가 교회를 불태워도 그들을 용서한다.
한편 오른손, 곧 부활주일의 능력을 사용하라고 부르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 손을 잡고 길을 건너도록 가르친다. 감독은 선수의 경솔한 행동을 호되게 꾸짖는다. 경찰관은 강도를 뒤쫓는다. 군대는 테러리스트의 은신처를 공격한다.
양손 모두 능력이 있다. 일을 해결하려면 양손이 모두 필요하다. 오른손의 능력은 순종과 공의를 일으키나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왼손의 능력은 공의를 일으키지 못하나 마음을 움직인다. 오른손은 명령을 내리지만 왼손은 삶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하나님의 전능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공의를 가져오는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신다. 그분은 강한 오른손 아래 제한받지 않으시며 가장 연약한 모습에서도 자신이 성취하려는 뜻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모두의 하나님이다!
마크 갤리(Mark Galli)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편집장이며 이 글은 그의 저서 「거친 하나님」 (하늘산책 역간)의 일부를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