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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만으로’사상과 새로운 도전

은바리라이프 2010. 9. 27. 15:16

‘성경만으로’사상과 새로운 도전


신 11:13-25
2004. 10. 31.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면제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의 슐로스 교회의 문에 게시하였습니다. 루터가 교회의 문에 95개조 논제를 게시한 것은 당시의 학문적 관습에 따라 면죄부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논쟁을 전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면죄부란 아다시피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죄의 형벌을 면죄해주는 문서를 발행해 주고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것은 복음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루터가 당시 관습대로 교회 문에 논쟁점을 게시하여 논쟁을 벌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경건한 수도사로서 루터는 교회의 남용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시 교권에 대한 투쟁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그가 예상한 것을 넘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어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후대에 루터의 추종자가 된 뮈코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4주일 만에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다.” 파울 슈레켄바흐,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p. 47에서 재인용.
결국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이 흐름은 사회, 경제의 구조를 바꾸어 갔고, 프로테스탄티즘을 창출하여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의 도도한 흐름을 일으킨 근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사상에 있습니다. 믿음만이 구원을 얻게 한다는 믿음만으로 사상(sola fide)가 루터 사상의 핵심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사상이었습니다. 루터는 후에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일어나고 특히 농민들이 봉기하였을 때 우려 속에서 강조한 것도 오직 성경말씀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한 시대인으로서의 한계도 보여주는 면도 있습니다.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농민을 미친 개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듯이 죽이라는 말도 하였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면서도 자기 사상인 믿음만으로 사상에 맞지 않는 야고보서 같은 행위를 강조하는 책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루터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성경만으로’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루터보다 100년 정도 앞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존 후스나 존 위클리프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의 권위 속에서 종교개혁을 말하고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8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새로운 종교개혁을 말하게 되는데, 역시 성경만으로 사상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개혁하여 교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경만으로’사상을 붙잡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구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구호를 넘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생명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인 성경말씀만을 붙잡을 때 우리는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는지를 본문을 통해 생각과 실천을 모색해 보도록 합시다.

신명기 정신
신명기 정신의 기본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들려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전체를 통해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부단히 강조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들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꼭 들을 필요가 있느냐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타락 이후에 인류는 그런 두 마음 사이에서 더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피조되었을 당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 그저 따르는 것만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끼어들어 하나님의 명령은 꼭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꼭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달가워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대적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이 애굽 땅에 일어났고 그로 인해 완악한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애굽 군대를 떨쳐 버릴 수 있었고 광야 생활에 들어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사막의 기후를 견딜 수 있었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신발이 닳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삶이 불편해지거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곧바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는 죽음과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내와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줄 하나님의 법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모세를 호렙산으로 불러올리시고 돌판에까지 새겨주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욕망의 배설을 우상만드는 것으로 표출하였습니다. 모세의 중보로 진멸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습니다.
이렇듯이 수 없는 실수를 연발하는 백성을 보며 모세는 죽을 때가 되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에게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들려주고 지킬 것을 당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말끝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그중 하나입니다. 계속 듣는 말이라 하여 지겹게 느끼면 안 되겠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라며 짜증스럽게 받아들여도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들어 지킬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명령을 반복해서 듣고 들어야 합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이것도 이 본문에서 처음 말한 것이 아니고 이전에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반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 정신입니다.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신명기에서 모세가 계속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키는 것만이 인생의 최대 목적이자 사회의 궁극적 지향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겠습니다.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명령
왜 모세는 이토록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는 것일까요? 이 점을 본문에 근거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것은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키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내 생명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놓고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조차 허락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독립된 존재로서 자아를 추켜세우는 현대 사조에 비추어 볼 때 누구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 누구가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뭘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분명한 치료법을 가진 의사 앞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의사 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는 확실한 치료법을 가지고 고쳐 줄 의사의 말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대로 따르면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의사 말을 듣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 인간은 그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의 문제로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 명령을 듣고 따를 때 어떤 결과가 오느냐를 생각하며 하나님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거기서 오는 행복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훨씬 더 유익한 일입니다.
모세가 다시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 곧 13절은 6장에서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청조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그렇게 하면 누리게 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내 말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하지 말고 그냥 따르라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렇게 따를 때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 설명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말씀하시는데 이 비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게 할 것이고 가축들을 위한 풀이 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명령을 따른 자가 먹고 배부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해 주신 설명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복을 의미합니다. 배부른 상태는 지나친 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스러운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좇지 않는다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됨으로써 속히 멸망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현실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지 선택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따르면 생명의 풍요함을 누릴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멸망의 상태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삼 재사 확인하고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내 생명과 관계된 것이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듣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실히 듣고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 또는 따를 수 있나 없나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냥 따르십시오. 거기에 생명의 풍성함이 있다는 일념 하에서 그저 따르기를 실천하면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따라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마음에 새겨 기억할까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이 방법들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무엇을 느끼십니까? 좀 구태의연하고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방법에서 정말 생명과 연결되는 하나님 명령 지키기의 절실함에 대한 모세의 절절한 심정이 읽힙니다. 따라서 이 방법은 실천할 수 있다면 실천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이들이 글자 배울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전에 최기영 집사님 집에 가보니까 단어를 쓴 종이를 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집안 물건 하나 하나에 붙여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글자를 가르칠 때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현재 그렇게 철저히 하나님 명령을 곳곳에 붙여 외우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도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 성경에 나타난대로 그대로 한다면 좀 광신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요즘 성경쓰기 열풍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겠구요, 성경 테이프를 틀어놓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아이들에게는 그 주의 성구로서 한 두 절 써서 집에 붙여 두고 외우게 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결심을 해서 실천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아직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성경구절을 일주일에 두 세 구절을 우리 말 성경과 영어 성경으로 외워보자 하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오는 좋은 것은 다름 아니라 생명입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21절). 여기서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것에 더해서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날이 많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명령을 듣고 따르는 것은 내 생명의 풍요로움을 오래 누리게 하는 길입니다. 장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명령을 듣고 따르는데 있음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 두십시오.

하나님 명령 지키기와 땅의 소유
하나님 명령을 지키면 누리게 되는 것이 생명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땅의 소유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릴 가장 중요한 생명의 문제는 단순한 관념적인 것에 그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생명 누리기를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풀어 설명해 줍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땅을 놓고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관련해서는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열조에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처음 한 말씀입니다. 창 12:1을 보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여기서 땅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하나님은 땅을 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떠났습니다. 긴 여정이었지만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가나안 땅으로 갔다가 애굽을 거쳐 돌아 나왔습니다. 400년 정도 흐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열조들과 마찬가지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지시할 약속의 땅을 향하였습니다.
이 약속의 땅에 관해서 신명기를 비롯한 역사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서 역할하는 땅이란 개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신명기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시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야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의 땅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만을 듣고 따르지 않으면 그 땅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에 나타난 땅에 관련한 기본 내용입니다. 약속의 땅에 있으려면 하나님 명령에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더 나아가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든 나라 백성을 다 쫓아내실 것이고 더 강대한 나라들이라도 얻게 할 것이라고 한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그들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은 본문 후반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을 잘 지킴으로써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점령을 해야 할 약속의 땅이 있음을 하나님의 백성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것은 생명과 연결된 하나님 명령 지키기의 현실태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명령 지키기는 생명을 얻는 것이지만 그 생명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소유로 획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기대는 신명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명령을 듣고 잘 지킴으로써 얻게 될 땅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밟는 곳마다 이방 백성들이 물러나고 그들이 차지했던 땅을 우리 소유로 만드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해야 할 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복주의적 태도의 삶을 살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둠의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확보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어져 있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상징적인 관념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관념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비전만 있고 현실의 구현이 없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비전이라는 관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반드시 역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는 기대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기대는 역사의 엄연한 현실로 구현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여호수아서나 사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나 사사기는 기대가 실현되는 역사를 기록하여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구약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여호수아 속에서 발견되는 땅의 개념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들과 땅을 차지하고 분배하는 일들이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사기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나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는 과정들을 묘사한다고 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역사 속에 실현되어야 하고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 밟기에 나서서 나의 소유로 만드는 사역을 행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땅에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나타난 변화된 땅의 개념입니다. 약속의 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획득 이후 땅에 대한 오해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 관리하라고 선물로 주신 땅을 자신의 소유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는 여호수아나 사사기에서 보여주었던 땅의 개념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이스라엘의 왕)가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삼상 8:14) 구절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지키라고 왕을 요구했으나 정작 왕은 그들의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을 빼앗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자기 개인 소유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 속에서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연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시온 산성을 빼앗아 다윗성으로 삼았습니다(삼하 5:7). 이로 인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다윗성에 여호와의 궤를 들여왔습니다(삼하 6:12). 이로써 예루살렘은 언약궤가 있는 여호와의 도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소유 안에 하나님의 궤를 들여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역임을 회복시킨 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또한 이렇게 이루어진 과정들은 처음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영토를 넓혀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솔로몬 왕 때 와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솔로몬 왕 때에 이르면 이스라엘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고 많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게 된 것입니다(왕상 4:20-21). 이것은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정착하면서 그 한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넓어지는 땅의 개념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제한적인 영역으로서의 땅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왕들을 통하여 더욱 그 영역이 탄력성 있게 확장될 수 있는 땅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기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실제로 밟는 정복과 정착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약속의 땅은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가슴 뛰는 믿음의 열정이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인 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땅은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림하는 주부로서, 어떤 사람은 직장을 통해 돈 버는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은 세상을 일깨우는 사상가로서, 어떤 사람은 삶의 편의를 위한 기술개발을 해내는 기술자로서, 세상 만물의 돌아가는 이치를 해명하는 과학도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 속에 영적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소명으로서의 약속의 땅을 좀더 확고히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대에 그치지 않아야죠. 역사 속에 구현되는 정복과 정착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5년째 그런 소명의 길을 가고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에 실망을 할 때가 있었는데 더욱 그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를 소망으로 붙잡고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고 더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배웠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우리의 땅에 대한 꿈을 더욱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마음에 품고 실천할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내 개인의 땅에 대해서도, 또 우리 교회의 땅에 대해서도,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땅에 대해서도 신앙적 의지를 뜨거운 마음을 불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 명령을 듣고 따름으로써 그런 각자가 불살라야 할 땅에 대한 의지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여러분이 정복하고 확장해야 할 땅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불태우시며 새로운 도전의 거보를 내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만으로’사상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따르는 실천을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만으로 사상을 붙잡으면 새로운 도전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날 여기의 현실 속에서 듣고 따르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문명의 전환기에 새로운 도전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 도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행하심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주님! 이 땅에서 이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가 약해져 있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변함없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온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마음 더욱 붙잡게 하옵시고, 그 약속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실현을 위한 발걸음을 옮기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그 약속이 우리가 정한 한계에 머물지 않고 확장되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이런 우리의 영적 믿음의 발걸음이 시대를 바꾸게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실현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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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 안순기 목사 - 경청과 침묵의 증언 예수랑 2010/07/1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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