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약성서란 무엇인가?
a. 교회에서 보통 성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평신도와는 다르게 신학생이 성서를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면 된다. 면허증만 따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고장났다면 운전면허증만 가지고서 고칠 수 있는가? 자동차를 고칠 수 있는 카센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 전체의 구조도 파악해야하고 구체적으로 고장이 어떻게 일어 나는지를 정비할 수 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되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될 생각으로 신학교에 왔다면 당연히 신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평신도보다 더 깊게(deep) 넓게(wide) 체계적으로 알고 설명하고 이를 말씀선포의 설교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b. 신약성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사복음서의 차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기록한 기자의 시각이 관점이 이미 전제되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서를 신앙고백이 전제되지 않은 전제에서 보자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다가 올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한마디 하시니 말씀대로 나사로는 말씀대로 나왔다. 이것은 인간적 방법으로는 소생불가능한 상태임을 전제한다면 - 나흘이면 시체는 그것도 열대기후를 고려하자면 부패할 수 밖에 없다. - 이것을 문자그대로의 사실로 받아 들여야만 성서를 제대로 보는 것인가? 주님께서 열심히 기도하셔서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는 데, 제자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한 것인가? 그러나 이런 모든 이적기사들이 성서적 의미를 지니고 지금 이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물을 수 있고, 그 말씀들이 유효한 이유는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전제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를 보기 때문이다.
c. 신약성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언어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 언어는 당시 민초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언어이다.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져 있는 데, 만일에 플라톤의 저작을 비롯한 고전 헬라어로 신약성서가 기록되었다면, 신약성서가 기록된 이후로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언어는 문화의 꽃이다. 언어적인 접근과 소통없이 문화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성육신적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바로 그 말씀으로 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1장)처럼 신약성서의 말씀은 그런 성서신학적 지평에서 기록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d. 신약성서는 어떤 탁월한 학자들의 수준 높은 사상을 담은 책이 아니다. 신약성서는 철저하게 한 개인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집단적인 다양한 측면이 모두 담겨진 신앙고백이다. 성서를 문자영감설(축자 영감설)을 받아 들여서 믿는 이들의 한계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도대체 축자영감의 본문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미 원본은 없으며, 수없이 많은 사본들이 집대성된 성서의 본문을 대도체 어떤 텍스트를 원전으로 근거하고서 문자영감설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불가타 라틴어 성서?(중세) 이후 킹 제임스 번역본 성서?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상황은 여기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인의 언어로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대한성서 공회에서 벌써 ‘새번역 성경’을 편낸 것이 얼마던가? 가톨릭 개신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온 것이 얼마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드러난 본문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극복되지 못한 것은 아직도 문자영감설에 충실하려는 경향의 잔재로 읽혀진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하려는 순수한 의지와 의도가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지만, 이렇게 시야가 안목이 판단이 관점이 갇혀버리게 되면,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져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감동시킨 성령의 힘을 문자의 감옥 안에 갇히게 만들 수 있다. 사도바울의 고린도후서 3장 6절의 말씀처럼 문자는 율법적 속성으로 결국 죽이는 역할을 하게되고 영은 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져서 성도들을 감동시키게 하는 것은 그 문자적 측면이 아니라 성서를 통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서의 인격적 감동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성경중독에 빠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하철을 타게 되면 적지 않게 성경을 읽는 이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지만,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이들은 성경을 분량상 많이 읽었기 때문에 많이 읽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의식을 즐기기 위한 혐의를 부정할 수 없다. 극 적나라한 예는, 정신적인 아픔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들 중에서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성경을 손에서 놓게 되면 대단히 불안해 하고 어떤 이들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인도에서 사역한 위대한 선교신학자가 통찰한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자고 자부하면서 성서를 대하는 이들 중에서 대부분은 성서를 많이 읽고 더 나아가서 암송도 하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성서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읽혀지는 체험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온전한 변화가 읽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일갈한 바가 있다.
e. 신약성서는 27권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총서)이다.
신약성서 중에서 최초로 기록되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는 대략 48~50년 사이에 기록되어졌다고 본다.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나중에 마지막으로 기록되어졌다고 보는 유다서나 베드로 후서가 180년 이후로 상정된다면, 신약성서는 무려 100여년에서 130여년의 격차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각기 다른 저자가 각기 다른 시대에서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주제로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쓰여 진 것이다. 그럼 신약성서가 기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중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것은 구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기에 수없이 많이 구약성서가 기록되고 편집된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를 접하면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양성이다. 신약성서 안에는 문자적으로 대립시키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말씀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져 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10장 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 7장에서는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갈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갈 자격이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유교가 양명학으로 발전되면 보여주는 지평과 거의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어진 야고보서를 보자, 루터는 당시의 종교개혁 시기의 상황 상 자신의 종교개혁 신학을 전개하면서 야고보서를 한마디로 ’지프라기‘ 라고 취급하였다. 이런 관점의 차이의 다양성이 성서에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특히 50대 이후의 기성세대는 복잡할 정도로 다양하고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다고 느껴지면 일단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상징적으로 ’사영리 전도‘ 로 불리는 단순하고 공격적인 전도방식의 폐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이렇게 바라보게 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하고 신묘막측한 놀라운 지평들은 다 괄호를 치고 생략해 버리고, 신약성서를 간단한 교리요약서의 각주정도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발상을 전환해서 성서를 보자.
f. 신약성서의 다양함은 애매하고 불확실하다는 그래서 복잡하다는 그런 현상적인 선입견으로 인한 단점처럼 보이는 편견을 뛰어 넘게 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오묘하고 풍요롭고 아름답고 더구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다시한번 신약성서의 저자들과 정경으로서의 편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들의 의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그 도도한 장강의 흐름 속으로 수렴되고 때로 압축되면서 좌우의 날선 검처럼 예리하고 시대를 퉁찰할 수 있는 분별력을 제시하게 되었는 지를 성찰해야 한다. 때로는 충돌하기까지 하는 상이성들을 함께 묶어서 정경으로 만든 이유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들의 사고 속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그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서가 기록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g. 그런데, 오늘의 한구교회는 왜 이토록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가? 본질적인 케리그마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일치한다면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이 바로 웨슬리신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 한국교회와 감리교회에 아직도 만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한국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조직에서 성공했다는 자의식을 떨칠 수 없어서 에고-자아의 허영심을 극대화하고 자아팽창감을 만끽하며 과시하는 성공했다고 기득권을 획득했다고 암묵적으로 의식을 투항한 이들의 멘탈리티의 독소의 쓴뿌리 때문일 것이다. 가장 치명적으로 현재 한국교회에서 선교의 방해물이 되고 있는 ‘목회세습’ 또한 이 멘탈리티에서 한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들의 의식구조와 정권을 잡았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고 확신하는 정치인들이나 대형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 - 그 물질적인 도구들을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사용하라는-은 성찰할 깜냥도 없고 그저 그 교세를 유지하고 무슨 재벌의 오너가 아들에게 세습하듯이, 목회직을 세습하면서도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멘탈리티 때문이다.
h. 따라서, 이들의 목회와 프로그램이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따라 배우려는 장학생들을 키워낸다 한들, 이것은 反 성서적이며, 反 복음적이다. “성서가 교회에서 특히 평신도들에게 침묵하고 있고, 읽혀지는 듯하지만, 제대로 읽혀지고 있지 못하다”는 건전한 성서학자들과 평신도신학자들의 권면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 벌써 50여년에 이르고 있다. 특히, 감리교단 신학대학의 커리큘럼은 성서학과 설교학 분야가 타 교단에 비해서 취약하다는 평가를 적지 않게 받아 왔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실제 목회현장에서 평신도들이 목회자에게 가장 크게 기대하고 요청하는 역할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깊이 있게 해석하고 그것이 말씀으로 선포되면서 평신도의 삶의 자리에서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로 인한 어려움들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전유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기대한다고 전제했을 때, 그런 대안을 제시하는 목회자들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적당하게 교인들의 입맛에 편승하는 소위 말하는 ‘앵무새 목회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I. 성서를 향한 재정향이 단지 성경통독운동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성서신학자들이 아니라, 일반 인문(문·사·철)학자들이 성서를 다시 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감벤이 로마서 1장 1절 주석으로 펴낸 텍스트처럼 엄청난 인싸이트를 몰고서 다가온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성서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그 깊은 통찰력에 접근하고자 하는 일정한 수준이상의 교양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신학대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한국교회의 청년층이 적지 않고, 그들은 표피적인 한국기독문화의 역량으론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갈수록 척박하고 천박해져가는 기독문화는 깊이 있는 성서해석의 인싸이트가 제시되지 못하면, 일반인들에게는 ‘그 은혜가 충만한 찬양집회의 열광의 도가니’는 그저 기독교식 나이트클럽 문화의 대체현상으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 천박한 주입식 전도방식은 각 대학 캠퍼스에서 가장 난감한 골칫거리로 비쳐지고 있다. 어쩌면, 성서에 대한 근본적인 편견 때문에 기독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사라져가야 하는 안타까운 실존으로 내몰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j. 그럼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가? 각 교회교육의 현장 속에서 단지 성경을 많이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벗어 나야만 한다는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또한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처럼 현대인의 실존과 일상의 체험들이 녹아 있는 성서 번역본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물론, 그들의 성서신학적 수준이 전제되어져야 함음 물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학대학의 교육이 전향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서대문 감신 캠퍼스 정문을 지나서 50초 정도 올라오면 웨슬리 채플 벽면 앞에 존 웨슬리가 오른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바이블모스’ ‘한책의 사람‘ 이고 ’성경벌레‘라고 까지 일컬여 졌던 그가 일기와 설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메몰되어서 반복해서 읽자는 의미가 아니라, 이 엄청난 한 책,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삶으로 번역해 내자면 그 한 책을 중심으로 엄청난 책들을 섭렵해야 하고 그리고 결국은 그 한책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사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칼 바르트가 지금 살아 있어서 감신 캠퍼스에 들린다면 그 웨슬리의 왼손에 신문을 건넸을 것이다.
a. 교회에서 보통 성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평신도와는 다르게 신학생이 성서를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면 된다. 면허증만 따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고장났다면 운전면허증만 가지고서 고칠 수 있는가? 자동차를 고칠 수 있는 카센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 전체의 구조도 파악해야하고 구체적으로 고장이 어떻게 일어 나는지를 정비할 수 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되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될 생각으로 신학교에 왔다면 당연히 신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평신도보다 더 깊게(deep) 넓게(wide) 체계적으로 알고 설명하고 이를 말씀선포의 설교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b. 신약성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사복음서의 차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기록한 기자의 시각이 관점이 이미 전제되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서를 신앙고백이 전제되지 않은 전제에서 보자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다가 올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한마디 하시니 말씀대로 나사로는 말씀대로 나왔다. 이것은 인간적 방법으로는 소생불가능한 상태임을 전제한다면 - 나흘이면 시체는 그것도 열대기후를 고려하자면 부패할 수 밖에 없다. - 이것을 문자그대로의 사실로 받아 들여야만 성서를 제대로 보는 것인가? 주님께서 열심히 기도하셔서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는 데, 제자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한 것인가? 그러나 이런 모든 이적기사들이 성서적 의미를 지니고 지금 이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물을 수 있고, 그 말씀들이 유효한 이유는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전제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를 보기 때문이다.
c. 신약성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언어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 언어는 당시 민초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언어이다.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져 있는 데, 만일에 플라톤의 저작을 비롯한 고전 헬라어로 신약성서가 기록되었다면, 신약성서가 기록된 이후로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언어는 문화의 꽃이다. 언어적인 접근과 소통없이 문화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성육신적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바로 그 말씀으로 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1장)처럼 신약성서의 말씀은 그런 성서신학적 지평에서 기록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d. 신약성서는 어떤 탁월한 학자들의 수준 높은 사상을 담은 책이 아니다. 신약성서는 철저하게 한 개인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집단적인 다양한 측면이 모두 담겨진 신앙고백이다. 성서를 문자영감설(축자 영감설)을 받아 들여서 믿는 이들의 한계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도대체 축자영감의 본문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미 원본은 없으며, 수없이 많은 사본들이 집대성된 성서의 본문을 대도체 어떤 텍스트를 원전으로 근거하고서 문자영감설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불가타 라틴어 성서?(중세) 이후 킹 제임스 번역본 성서?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상황은 여기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인의 언어로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대한성서 공회에서 벌써 ‘새번역 성경’을 편낸 것이 얼마던가? 가톨릭 개신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온 것이 얼마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드러난 본문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극복되지 못한 것은 아직도 문자영감설에 충실하려는 경향의 잔재로 읽혀진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하려는 순수한 의지와 의도가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지만, 이렇게 시야가 안목이 판단이 관점이 갇혀버리게 되면,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져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감동시킨 성령의 힘을 문자의 감옥 안에 갇히게 만들 수 있다. 사도바울의 고린도후서 3장 6절의 말씀처럼 문자는 율법적 속성으로 결국 죽이는 역할을 하게되고 영은 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져서 성도들을 감동시키게 하는 것은 그 문자적 측면이 아니라 성서를 통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서의 인격적 감동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성경중독에 빠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하철을 타게 되면 적지 않게 성경을 읽는 이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지만,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이들은 성경을 분량상 많이 읽었기 때문에 많이 읽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의식을 즐기기 위한 혐의를 부정할 수 없다. 극 적나라한 예는, 정신적인 아픔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들 중에서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성경을 손에서 놓게 되면 대단히 불안해 하고 어떤 이들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인도에서 사역한 위대한 선교신학자가 통찰한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자고 자부하면서 성서를 대하는 이들 중에서 대부분은 성서를 많이 읽고 더 나아가서 암송도 하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성서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읽혀지는 체험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온전한 변화가 읽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일갈한 바가 있다.
e. 신약성서는 27권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총서)이다.
신약성서 중에서 최초로 기록되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는 대략 48~50년 사이에 기록되어졌다고 본다.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나중에 마지막으로 기록되어졌다고 보는 유다서나 베드로 후서가 180년 이후로 상정된다면, 신약성서는 무려 100여년에서 130여년의 격차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각기 다른 저자가 각기 다른 시대에서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주제로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쓰여 진 것이다. 그럼 신약성서가 기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중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것은 구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기에 수없이 많이 구약성서가 기록되고 편집된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를 접하면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양성이다. 신약성서 안에는 문자적으로 대립시키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말씀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져 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 10장 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 7장에서는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갈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갈 자격이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유교가 양명학으로 발전되면 보여주는 지평과 거의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어진 야고보서를 보자, 루터는 당시의 종교개혁 시기의 상황 상 자신의 종교개혁 신학을 전개하면서 야고보서를 한마디로 ’지프라기‘ 라고 취급하였다. 이런 관점의 차이의 다양성이 성서에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특히 50대 이후의 기성세대는 복잡할 정도로 다양하고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다고 느껴지면 일단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상징적으로 ’사영리 전도‘ 로 불리는 단순하고 공격적인 전도방식의 폐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이렇게 바라보게 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하고 신묘막측한 놀라운 지평들은 다 괄호를 치고 생략해 버리고, 신약성서를 간단한 교리요약서의 각주정도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발상을 전환해서 성서를 보자.
f. 신약성서의 다양함은 애매하고 불확실하다는 그래서 복잡하다는 그런 현상적인 선입견으로 인한 단점처럼 보이는 편견을 뛰어 넘게 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오묘하고 풍요롭고 아름답고 더구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다시한번 신약성서의 저자들과 정경으로서의 편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들의 의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그 도도한 장강의 흐름 속으로 수렴되고 때로 압축되면서 좌우의 날선 검처럼 예리하고 시대를 퉁찰할 수 있는 분별력을 제시하게 되었는 지를 성찰해야 한다. 때로는 충돌하기까지 하는 상이성들을 함께 묶어서 정경으로 만든 이유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들의 사고 속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그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서가 기록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g. 그런데, 오늘의 한구교회는 왜 이토록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가? 본질적인 케리그마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일치한다면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이 바로 웨슬리신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 한국교회와 감리교회에 아직도 만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한국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조직에서 성공했다는 자의식을 떨칠 수 없어서 에고-자아의 허영심을 극대화하고 자아팽창감을 만끽하며 과시하는 성공했다고 기득권을 획득했다고 암묵적으로 의식을 투항한 이들의 멘탈리티의 독소의 쓴뿌리 때문일 것이다. 가장 치명적으로 현재 한국교회에서 선교의 방해물이 되고 있는 ‘목회세습’ 또한 이 멘탈리티에서 한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들의 의식구조와 정권을 잡았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고 확신하는 정치인들이나 대형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 - 그 물질적인 도구들을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사용하라는-은 성찰할 깜냥도 없고 그저 그 교세를 유지하고 무슨 재벌의 오너가 아들에게 세습하듯이, 목회직을 세습하면서도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멘탈리티 때문이다.
h. 따라서, 이들의 목회와 프로그램이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따라 배우려는 장학생들을 키워낸다 한들, 이것은 反 성서적이며, 反 복음적이다. “성서가 교회에서 특히 평신도들에게 침묵하고 있고, 읽혀지는 듯하지만, 제대로 읽혀지고 있지 못하다”는 건전한 성서학자들과 평신도신학자들의 권면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 벌써 50여년에 이르고 있다. 특히, 감리교단 신학대학의 커리큘럼은 성서학과 설교학 분야가 타 교단에 비해서 취약하다는 평가를 적지 않게 받아 왔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실제 목회현장에서 평신도들이 목회자에게 가장 크게 기대하고 요청하는 역할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깊이 있게 해석하고 그것이 말씀으로 선포되면서 평신도의 삶의 자리에서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로 인한 어려움들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전유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기대한다고 전제했을 때, 그런 대안을 제시하는 목회자들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적당하게 교인들의 입맛에 편승하는 소위 말하는 ‘앵무새 목회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I. 성서를 향한 재정향이 단지 성경통독운동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성서신학자들이 아니라, 일반 인문(문·사·철)학자들이 성서를 다시 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감벤이 로마서 1장 1절 주석으로 펴낸 텍스트처럼 엄청난 인싸이트를 몰고서 다가온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성서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그 깊은 통찰력에 접근하고자 하는 일정한 수준이상의 교양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신학대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한국교회의 청년층이 적지 않고, 그들은 표피적인 한국기독문화의 역량으론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갈수록 척박하고 천박해져가는 기독문화는 깊이 있는 성서해석의 인싸이트가 제시되지 못하면, 일반인들에게는 ‘그 은혜가 충만한 찬양집회의 열광의 도가니’는 그저 기독교식 나이트클럽 문화의 대체현상으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 천박한 주입식 전도방식은 각 대학 캠퍼스에서 가장 난감한 골칫거리로 비쳐지고 있다. 어쩌면, 성서에 대한 근본적인 편견 때문에 기독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사라져가야 하는 안타까운 실존으로 내몰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j. 그럼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가? 각 교회교육의 현장 속에서 단지 성경을 많이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벗어 나야만 한다는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또한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처럼 현대인의 실존과 일상의 체험들이 녹아 있는 성서 번역본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물론, 그들의 성서신학적 수준이 전제되어져야 함음 물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학대학의 교육이 전향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서대문 감신 캠퍼스 정문을 지나서 50초 정도 올라오면 웨슬리 채플 벽면 앞에 존 웨슬리가 오른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바이블모스’ ‘한책의 사람‘ 이고 ’성경벌레‘라고 까지 일컬여 졌던 그가 일기와 설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메몰되어서 반복해서 읽자는 의미가 아니라, 이 엄청난 한 책,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삶으로 번역해 내자면 그 한 책을 중심으로 엄청난 책들을 섭렵해야 하고 그리고 결국은 그 한책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사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칼 바르트가 지금 살아 있어서 감신 캠퍼스에 들린다면 그 웨슬리의 왼손에 신문을 건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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