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사도행전 자료

네로

은바리라이프 2010. 7. 19. 11:32

네로

 

 

 

네로(라틴어: 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3일 ~ 68년 6월 9일)이다. 좋게 평가하면 그의 재위기간 동안 로마의 문화는 크게 발전했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자살로 이어졌고 엮시 폭군이었다.

 

 

생애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小)아그리피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후, 소아그리피나가 숙부인 클라우디우스의 두 번째 아내가 되자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의붓동생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로서 어린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여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브루루스의 보좌를 받아 치세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신이 자신에게 로마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55년 이복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온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65년에는 세네카를 자살명령으로 살해하였다. 더불어 64년에 기름창고 사고가 원인인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소수종교인 기독교를 박해하여 민심을 돌렸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로 사도 성 바울로등의 성직자들이 순교하는 등 교회는 타격을 입었고, 네로도 폭군이라는 오명을 갖게 된다.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고받는다. 68년 6월 8일 자살하였다.

 

네로가 죽음으로 인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단절되었으며, 로마는 황제 난립으로 알려진 전란의 시기를 맞게 된다.

죽은 후에도 네로가 다시 돌아온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가짜 네로의 출현이 잇달았다.

 

황제즉위

겉으로 보기에 네로의 황제 계승은 평화로웠다.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이 자연사로 처리되고 그의 아들이 자연스럽게 황제직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클라우디우스가 이룬 안정 속에서 네로가 제국을 더욱 번영시킬 것으로 기대하였다. 열일곱의 나이로 황제직에 오른 네로는 아버지를 신격화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기념 주화를 발행함으로써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황제 즉위식에서 클라우디우스는 ‘명백한 신’으로 네로는 ‘세상의 좋은 영이자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으로 선포되었다. 여기서 ‘영’은 그리스어로 ‘다이몬’ (δαιμων)을 옮긴 것인데, 세상에 현존하는 신적 존재들을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다.

 

새 황제에 대한 기대는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 네로는 국사를 돌보는 대신 음악, 연극, 스포츠에 사로잡혀 거기에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리스를 자주 방문한 이유도 그 곳에서 당대 최고의 연주가들과 운동선수들과 겨루기 위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새 황제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가 방문할 때에 맞추어 올림픽을 비롯한 많은 운동 경기를 열었다. 한번은 황제가 전차 경기에 참가하던 중 전차에서 떨어져 골인점에 도달하지 못했는데도 우승 월계관이 그에게 돌아갔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동쪽 벽에는 “최상 황제이자 신의 아들인 네로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걸렸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64년 여름 로마 시민들을 격분하게 만든 9일 동안의 방화는 네로가 저지른 짓이라고 밝혔다. 네로는 궁전 지붕에 서서 불타는 로마 시내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수금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네로가 로마를 불태운 이유는 새 궁전을 지을 공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황금 궁전’이라고 이름 붙인 거대한 저택을 시내 한복판의 주거지역 50헥타아르에 지을 계획이었다. 방화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자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부정적인 견해를 이렇게 전한다. “예수 운동의 창시자는 티베리우스 치세 아래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십자가형을 받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이 위험천만한 마신은 한동안 박해를 받아 잠잠하더니 다시 일어나 로마에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연대기」 15,44).

 

타키투스가 그리스도들이 미신에 빠져있다고 비난한 까닭은 그들이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로마를 보호해 주는 신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로마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적으로 여겨지던 그리스도인들을 방화의 주범으로 지목한 것은 로마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음모였다.

 

방화범으로 체포된 그리스도인들은 네로의 궁전 뜰과 원형경기장에서 개들에게 찢겨 죽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며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미루어 1세기 후반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2세기 초엽 플리니우스(Plinius Major의 조카이자 양자)는 30여 년 동안 로마에서 일어난 법적, 정치적 사건들에 깊이 개입하였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따라서 1세기 말엽에 있었던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우스의 순교와 요한묵시록의 배경이 된 박해는, 제국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지엽적이고 간헐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로마의 정치적 권위와 세금 징수 같은 통상적 요구에 복종하라는 바울로의 권고(로마 13,1-7)나, 로마 관리들의 호의를 얻어 내려는 사도행전 저자의 호교론적 태도는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박해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네로 황제의 만년은 주색잡기와 온갖 범죄로 얼룩졌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이유로 수많은 친지들을 살해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올바른 정치를 펴라고 충고한 그의 스승 세네카도 포함되었다. 68년 여름, 한때 그의 황제 등극을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이 그의 목을 요구하자 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디오카시우스가 기록한 네로의 마지막 말은 “오 제우스 신이여, 이토록 훌륭한 예술가가 멸망하게 되다니!”(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63)였다. 원로원은 네로가 죽기도 전에 이미 그를 배신자요 민중의 적으로 선언하였다. 이에 대한 징계는 로마의 모든 공적 기록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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